[236화]
“…네?”
[못 들었나? 다시 말해 줄까? ‘우주’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 라네!]
“우주… 를?”
[그래. 아직 목표치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나는 ‘빅뱅’을 다시 일으켜 이 모든 ‘우주’를 재창조할 걸세. 그러기 위해서 수많은 ‘별’에서 마정석을 모으고 있지.]
“맙소사…….”
역시 ‘성좌’다운 생각이라고 해야 할지, 압도적인 스케일의 계획에 유성원은 어처구니없어했다.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별’들에서 ‘마정석’을 끌어모으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고, ‘손해’를 싫어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손해가 나면 날수록 ‘우주’를 만들기 위한 마정석이 모자란 것이었다.
“저기… 그러면 왜 굳이 성좌 종말자라는 이름을?”
[그 ‘별’에 종말을 가져오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아니, 새로운 ‘우주’를 만든다는 건 곧 지금의 ‘우주’를 종말로 데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아무튼 이름은 상관없네.]
‘이건 또… 엄청난 양반이네.’
[아무튼 어설픈 인간이었다면 여기 들어온 즉시 그냥 ‘종말기장’들에게 처리하라고 했겠지만, 자네는 나와 협상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라서 대접받을 수 있는 게야. 그러니 기뻐하게.]
살갑게 말하는 단어 속에 가시라도 있는 건지 날카롭게 찔러 들어온다.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이 약하거나 다른 성좌들을 쓰러뜨리는 걸 멈추고 왔다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리라.
그런 가정을 해 보니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섬뜩함이 느껴지는 유성원이었다.
“후우~ 협상… 이라. 뭐죠?”
[‘별’의 수호자로서 그대의 사명은 이 ‘별’에서 제멋대로 설치는 다른 ‘성좌’들을 쫓아내는 일이겠지.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압도적인 무력이 더 필요할 테고 말이야. 지금도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빼더라도 다른 ‘성좌’를 처리하기가 힘들겠지?]
“안 힘든 ‘성좌님’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죠.”
[그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군. 나는 ‘마정석’이 필요하네. 우주를 만들기 위해서 아주 막대한 양이 필요하지.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우주’를 죽이긴 하겠지만 알다시피 그건 아주 머나먼 일이고 자네의 수명, 아니 그 ‘별’의 수명을 아득히 뛰어넘는 과업이네. 그러니까 협력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지.]
“그러니까… 요점은?”
[나와 계약을 해서 ‘마정석’을 준다면 내 ‘군단’을 사용하게 해 준다는 이야기다. 덤으로 이 ‘별’에서 하던 일은 모두 접고 물러나지. 어떤가? 자네는 ‘별’을 구하고, 나는 ‘마정석’을 얻고. 일석이조 아닌가?]
성좌 종말자의 제안을 들은 유성원은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멸망급 성좌 하나를 이 별에서 내보낸다는 것부터가 손해가 없는 제안이기도 했고, 그 휘하 군단을 빌릴 수 있다면 다른 멸망급 성좌와 쉽게 겨룰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네.’
[뭐가 내키지 않는 거지?]
“보통 이런 달콤한 제안엔 독이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거든요. 가령… 마정석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이 요구한다거나, 아니면 계약 기간이 거의 무한이라서 막 죽고 난 이후에도 낭패를 보거나? 뭐, 그런 거요. 인간끼리도 불공정 계약을 하면 낭패를 보는 판국인데, 초월적 존재와 계약을 해서 피 보면 취소가 불가능하다거나… 이런저런 것들 말이죠.”
인생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나름대로 험난한 인생사를 자랑하는 유성원이기에 달콤한 제안을 던지는 쪽은 위험하다는 걸 본능 레벨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 아닌 경우도 일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로또 복권 당첨 레벨로 희박했고, 설사 반대라고 하더라도 의심하고 가는 쪽이 더 안전하기에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경계 중이었던 것이다.
[과연 납득이 가는 이야기로군. ‘별’의 생명을 빨아들이고, 군세로 침략하던 침략자가 갑자기 태세를 바꾸어서 계약을 하자고 하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하겠지. 아무튼 계약에 대한 걸 명확하게 말을 해 주도록 하지.]
“그러면 좋죠.”
[일단 계약이 성사만 되면 여기서 물러나는 건 기본으로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을 걸세. 다만 시간이 좀 걸리겠지. 설치한 기계들이랑 공장도 나름 자원이 들어간 거니까 회수해야 하거든.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 ‘군단’을 ‘대여’하는 부분인데, 강매 이런 거 없고 표기된 마정석을 선불로 지급받아서 빌려 주지. 기간은 한정이 아니며 부서지거나 파괴되면 자동으로 내 코어 던전으로 회수할 거고, 빌리는 녀석의 무기는 처음 빌릴 때 무조건 풀 옵션으로 장난 없이…….]
정말 정직한 판매 사원인 것처럼 성좌 종말자의 분신은 유성원과의 거래에 대해 모든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하려고 애를 썼다.
탄약 문제라든가, 기체들이 사용하는 마정석 소모량까지 아주 깔끔하게 공개하자 유성원은 이 계약이 나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SS급 화력을 가진 부하를, 이만큼 싸게 부릴 수 있는 기회는 없겠지.]
“으으음… 그렇기는 하네요. 으으음…….”
[A/S 문제도 걱정 말게. 그리고 전투하다가 부서지는 것도 애초에 고용 비용에 들어가 있으니까 부담 없이 쓰고~ 다만 탄약은 처음에 준 세트 말고 추가로 필요할 시 별도 구매해야 하네.]
“으으음…….”
확실히 성좌 종말자의 말대로 이리저리 계산을 해 보고 혜택까지 살펴본 결과 종말기장 2~3기 정도는 너끈히 운영해도 큰 부담이 없는 마정석 금액이었다.
SS급 헌터 3명을 추가한다? 그럼 이미 세계의 헌터 밸런스도 무너지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강력한 발언권도 쥘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정의와 명분이 중요해도 강력한 힘 앞에선 결국 헛소리일 뿐, 충분히 허용할 만한 비용이니 강력한 유혹이 드는 유성원이었다.
“…하나 거절할게요.”
[뭐? 대체! 대체 뭐가 문젠가? 아니, 내가 분명 계약 조건도 다 알려 줬는데?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고 좋은 거래 아닌가? 아니면 내 걸작인 ‘종말기장’들이 어디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뇨. 다 좋긴 한데… 역시 전 ‘우주’의 멸망에 손을 보탤 수 없는 입장이라서요.”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자네는 그저 성좌인 나와 ‘거래’를 한 것뿐일세. 자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을 지금 거래해서 마정석을 바친다고 한들, 그 거대한 업적을 이룰 강물에 물 한 방울 보태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런데도 말인가?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사명이! 그리고 자네 이름으로 남을 전설이! 쉬워지는데?]
빛 덩어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통통 튀어 오르면서 유성원의 말에 반박했고, 유성원은 충분히 그 진실에 공감했다.
어차피 일개 인간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는 규모의 일. 우주의 종말이라는 스케일에 겁먹을 필요가 없는 게, 어차피 이 정도 스케일의 일은 ‘성좌’님들끼리의 일이고 하늘 너머에 계신 그들끼리의 경쟁일 테니 죄책감을 느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서로 필요해서 하는 정당한 거래였다.
하지만 유성원은 그래도 거부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안 될 것 같아요. 성좌님 말씀처럼 먼 미래의 일이고, 정말 아주 작은 보탬이겠지만 그래도… 결국 이 ‘우주’를 멸망시키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이 ‘별’에서만 안 할 뿐 다른 ‘별’에서도 지금처럼 마정석을 얻는 사업을 하실 거고 말이죠.”
[…그래서 거부한다는 건가?]
“예. 아예 그런 걸 전혀 몰랐다면 모를까… ‘기사 된 자로서 아무리 이 실망스러운 세계라 할지라도 멸망에 손을 보태는 건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걸 원할 것 같아요.”
[그렇군. 알았다. 교섭은 결렬이다.]
철컹! 철컹! 철컹!
그 순간, 유성원의 주위로 강철의 벽이 튀어나와서 그를 감쌌다.
머리 위까지 강철로 덮이면서 완전히 박스 안에 갇힌 것처럼 된 그는 모든 시야가 차단되었는데, 상자가 붕 뜬 듯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으아아아! 이거 뭐야?”
쿠우웅!
그리고 잠시 후 강력한 충격과 함께 그를 싼 박스가 우그러졌고, 그 틈 사이로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철의 상자에서 나온 유성원은 밖의 전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그가 도착한 곳은 황량한 벌판. 그리고 눈앞에는 수많은 골렘과 이때껏 보아 온 종말기장과 종말기병들이 하늘에 떠 있는 게 보였다.
엄청난 숫자의 기체와 골렘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깔린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무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일 터였고, 유성원의 눈앞에 뜬 빛 덩어리는 그 의미를 선언했다.
[제안을 거부했으면 결국 자웅을 겨뤄야 하는 법이지만~ 나는 이익과 손해를 철저히 가르는 편이지. 고작 인간 상대로 전력을 다하는 것도 ‘성좌’의 체면이 서지 않고 또~ 널 잡는 데 예상 이상의 지출이 생기면 오히려 하나 마나 한 싸움이겠지.]
“근데 이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딱 저기까지가 내 손해와 이익의 분기점이다. 그동안 저 별에서 얻은 수익과 비용만큼, 그리고 널 쓰러뜨리고 너희의 ‘별’에서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마정석 비용과 시간까지 계산해서 배치한 거지.]
“아하~!”
[고로 저걸 다 해치우면 그 뒤부터는 난 손해점이 되기 때문에 너의 승리이고, 나는 여지없이 너희의 ‘별’에서 물러나지.]
“그것참 알기 쉬운 소리라서 좋네요. 기사단! 전부 집결!”
참으로 알기 쉽고 단순한 조건에 유성원은 기사들을 전원 불러냈다.
그러자 ‘기사단의 성소’ 포탈이 열리고, 천검군 기사와 부를 수 있는 병사들 전원, 성좌 66천마의 대장군 전원, 아칼론, 가울프, 섬멸, 크록베인 넷, 용봉왕의 근위대장들과 도살왕의 사도들까지 모두 나와 유성원의 뒤에 군세로 자리 잡았다.
드디어 코어 던전에서 처음으로 성좌의 군대와 전쟁다운 전쟁을 하게 된 유성원이었다.
“천검군 전원 집결했습니다, 폐하.”
[천군대장군 휘하 사령 군단 모두 집결했습니다.]
“그… 근위대장들 대기 중인 인원 모두 도착했습니다.”
[우리도 준비되었네, 계약자여.]
“어, 다들… 와 줘서 고맙다. 그리고 너희 식대로 말하면… 여긴 아마 ‘기사’에게 가슴이 뛰는 전쟁터일 것이다. 우리의 적은 ‘성좌 종말자’. 마정석을 모아 이 ‘우주’에 종말을 불러오려는 자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알 것이다. ‘별’의 기록으로 남아 나와 함께한 제군들의 역사도, 긍지도 사라진다는 것이니 말이다.”
마치 사전에 준비한 대본을 읽는 것처럼 능숙하게 말을 하는 유성원. 지금 자신들이 사는 ‘우주’와 ‘별’의 기록의 유산인 ‘기사’들에겐 스스로를 지키는 싸움이자, 미래를 지키는 싸움이라는 것.
최고의 전장이요,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결의를 담을 수 있는 전장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여기서 반드시 이길 것이다. 눈앞의 저 골렘과 깡통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이 우리가 이기는 조건이다! 다들 알았지? 절대 지지 마라! 알았나!”
와아아아아아아아!
군대는 하나가 된 듯 함성을 내질렀고, 유성원은 한동안 제대로 같이 싸우지 못했던 황금의 용, 엘드라엔을 불러 그녀의 등에 올라탔다.
“읏챠. 하하, 자주 부르지 못해서 미안해. 요새 영~ 타고 싸울 일이 없어서 말이지.”
[별로 서운하진 않았다. 아무튼 이번엔 확실히 전쟁을 할 모양새인 걸 보니 꽤 수입이 두둑하겠구나.]
“상대가 상대이니 말이죠. 그럼 가 볼까요? 전군… 돌진!”
유성원의 신호와 함께 모여 있던 그의 기사단은 골렘과 종말기장들이 있는 전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도 그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기다려 준 ‘성좌 종말자’는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수하들인 기체들에게 신호를 보내었고, 골렘들과 종말기장, 종말기병 또한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유성원의 군대에 사격과 공격을 개시했다.
“하아아앗!”
‘별’의 수호자인 유성원과 ‘별’을 멸망시키는 세력, 성좌 종말자의 결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