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뭐야… 이거…….”
아그작! 쩝쩝! 냠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허공에 먹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무언가’가 있긴 있는데, 보이진 않았지만 그 거대한 존재감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성좌의 화신을 직접 만난 유성원은 그것이 성좌 도살왕의 존재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긴장하며 경계했다.
“젠장! 대리… 한번 제대로 부르셨군. 어떤 흉계를 꾸밀지 몰랐는데…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어.”
“허허허, 오리지널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군요.”
“칭찬 아니거든! 젠장!”
우적… 우적… 우적… 꿀꺽!
거대한 괴물이 포식하는 소리와 함께 이 목사의 오리지널로 만들어진 통구이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리고 드디어 나올 게 나오리라는 걸 예감한 유성원은 극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성좌도 아니고, 수많은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악마들을 이끌고 다니는 성좌 도살왕은 필시 포악하고 무서운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지지직… 지지지지직… 시역 야사목 이 지까막지마… 를나 망실 지키시 고않, 런이 을물제… 다하륭훌! 이 서에별 은찾 재인……!]
“뭔가… 나온다!”
지지직거리는 비음과 함께 들려오는 기묘한 말소리.
무슨 말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이 목사를 칭찬하는 듯한 기쁜 감정은 느껴졌다.
그리고 허공에 붉은 균열이 생성되어 열리면서 거기선 붉은 별로 선을 이루며 만들어진, 90도로 틀어서 보면 막 그린 O-<-< 이런 형태의 낙서 인간 같은 게 나왔다.
[…….]
“화신(化神)인가?”
[다맞… 여귀마까.]
“무, 무슨 말이야.”
[‘성좌 도살왕’은 당신을 ‘까마귀’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답답했는지 성좌 도살왕의 화신은 유성원의 상태창으로 직접 대화를 건넸다.
하나, 그 말 또한 기괴한 내용으로 유성원은 도저히 알아먹질 못해서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별로 된 인간’은 유성원의 앞에 서서 정식으로 인사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니, 왜 내가 까마귀입니까?”
[‘성좌 도살왕’이 ‘시체를 파먹고 살며 불길한 소리로 울지 않느냐.’라고 답하면서 ‘까마귀’답다고 말합니다.]
“그것참 기가 막힌 논리네요. 그래서 아무튼… 저 이 목사를 잡수시고 나오셨으니, 대신 결투하시렵니까?”
[‘성좌 도살왕’은 ‘결투는 대등한 대상끼리 자웅을 거루는 것이다.’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너는 이 별을 걸고 나의 시험을 겪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대충 성좌 66천마와 비슷한 반응이었기에 유성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겪어 본 일이었고, 자신의 사명을 아는 유성원은 과연 성좌 도살왕의 시험이 무엇일지 긴장한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차피 코어 던전에서 시험이니 싸움이니 할 것이 자명했으니, 오히려 이 목사를 제물로 바치고 그 과정을 스킵했으니 좋은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성좌 도살왕’은 ‘시험이면서 거래이기도 하다.’라며 ‘이 지구라는 별의 인간 1억 명을 바쳐라.’라고 말합니다.]
“뭐?”
[‘성좌 도살왕’은 ‘그러면 자신은 깔끔하게 이 별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까마귀인 너의 사명을 직접 도와주겠다.’라고 말합니다.]
“…1억 명을?”
[‘성좌 도살왕’은 ‘이미 자신과 거래하지 않았는가?’라며 ‘약 60억 인간들 중 60분의 1만 바치고 이 정도면 남는 장사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유성원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성좌 도살왕의 요구는 너무나 메리트가 있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1억 명만 희생하면 ‘성좌’ 하나가 이 ‘별’을 포기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서 도움을 준다니 상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와 해 나가야 할 일의 규모를 보면 갈등이 안 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으으음… 잠시만요. 잠시만요.”
[‘성좌 도살왕’은 당신에게 편하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으으으음~ 으으으음~”
하지만 어쩌면 이 제안 자체가 시험이고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이 제안의 의도와 해답은 무엇인가? 1억의 인간을 희생할 각오? 아니면 그것을 거부할 용기? 하지만 성좌 도살왕은 이때까지 사도들을 이끌고 인간들을 잡아먹은 만큼 진심일 수 있었다.
‘1억 명이라곤 했는데, 기한을 두진 않았잖아. 그러면 전 세계에서 사형수만 모아서 갖다 바쳐도 되는 거 아닌가?’
사형 집행관에게 트라우마를 심을 필요 없이, 성좌 도살왕이나 저 이 목사 같은 인간에게 넘기다든지, 아니면 스캐빈저나 마피아를 잡아서 갖다 바친다든지 하면 1억 명 정도는 충분히 수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만약 10억 명이었다면 무고한 이들도 희생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테지만, 이건 썩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하지만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될 거고… 으으음… 아니, 이건 계산할 문제가 아닌가?’
[‘성좌 도살왕’은 ‘까마귀인 네가 뭘 그렇게 고민하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차피 필멸의 세상은 언제 어디서나 먹고 먹히는 관계 아니냐고 말합니다.]
‘…까마귀라.’
아주 어릴 적 시설에 있을 때 시쳇밥을 좀 먹긴 했지만, 결국 거기서 나와 아카데미아에 취직했고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갑작스러운 각성과 이 ‘별’이 내린 사명에 의해 싸우고 또 싸우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 걸 다 포함해서 자신을 시체를 먹고 사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아무튼 그 호칭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잠시 생각을 더 한 유성원은 결단을 내렸다.
“거절하죠.”
[‘성좌 도살왕’이 의아해합니다. 이만한 제안이 어디 있냐면서 당혹스러워합니다.]
“제안이 나쁜 것도 아니고, 성좌 도살왕 님의 의견에 공감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긴 하지만…….”
[…만지하?]
당혹스러운지 상태창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다시 그 기묘한 화법으로 입을 연 성좌 도살왕이었다.
“그래도 ‘그걸’ 부정하기 위해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 걸 알아서 말이죠.”
유성원의 대답에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박숙자였다.
서로 같은 처지인 줄 알았는데, 유성원은 결국 차이가 생겼다는 걸 방금 느끼게 된 것이다.
똑같은 시궁창 밑바닥 출신으로서 세상에 비관적이었지만, 한쪽은 그래도 인간이 베푼 선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려운 행동 하나, 작은 선의 덕분에 비뚤어진 제 노선도 틀어졌으니…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는 거죠.”
자신이 이 망할 사회를 혐오하고, 나서기 싫어하는 쓰레기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안다.
하나 그런 쓰레기도 양심의 조각이 하나라도 있다면 작은 선의로 인해 길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어르신이 증명했다.
그렇기에 유성원은 굳이 효율적인 길을 택하지 않고 ‘성좌 도살왕’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었다.
어려운 길로 가더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성좌 도살왕’은 교섭이 결렬된 것을 아쉬워합니다. 그러면 결국 서로 싸우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고 하며 ‘제물’로 바쳐진 힘만큼 당신을 ‘힘’으로 시험하겠다고 합니다.]
‘…드디어 오는 건가? 화신과의 직접 전투가!’
꿀꺽.
유성원은 긴장하면서 성좌 도살왕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O-<-<를 90도로 돌려 놓은 듯한, 별로 선을 대신해서 대충 그린 듯한 모습을 한 그는 그대로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거대한 포크와 나이프가 쥐어졌다.
크기만 키워 놓았을 뿐 아무리 봐도 양식집에서 나올 법한 흔한 물건이었지만, 성좌의 무기인 만큼 절대 방심해선 안 되었다.
[내… 구무… 접직… 것 든만… 다‘다는먹다’…….]
‘알아들으라고 천천히 이야기하셨나…….’
‘성좌 도살왕’은 직접 싸우는 만큼 이번엔 상태창을 빌리지 않고 직접 말했다.
해석하자면 ‘내 무구, 직접 만든 것. ‘다 먹는다’다.’라고 자신의 무구를 소개한 것이리라.
흉흉한 이름과 함께 양손으로 든 두 무구를 내미는 것을 보며 그것이 심상치 않은 무구임을 눈치챈 유성원도 ‘패황 기사 유천의 검’을 들어 맞설 준비를 했다.
[럼그… 다간.]
“후우우…….”
콰아앙!
붉은 잔상을 남기며 찌르기와 베기를 동시에 해 오는 성좌 도살왕의 화신. 엄청난 속도에 놀라면서도 유천의 검으로 어떻게든 막은 유성원이 곧바로 대응하며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역시 성좌의 화신이라 그런지 모든 스테이터스는 SS급을 넘어서는 건 당연하다는 듯 유성원이 감당하기 힘든 힘과 민첩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싸우는 방법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짐승 같은 타입이라 다행인가?’
[GRRRRRRRRRRAAAAAA!]
포효 소리와 함께 몰아치는 맹격. 속도와 힘은 우월하지만 다행히도 그 손속은 정직해서 막거나 충격을 비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라면 저 무기. 포크와 나이프 형태의 저 무기들이 무서운 것이었다.
한 번 강력한 공격을 잘못 흘려 내서 갑옷으로 같이 커버하려는 순간, 포크에서 붉은빛이 일렁이더니 유성원의 금빛 신수의 갑옷에 그대로 이빨 자국이 난 채로 먹혀 들어갔다.
“역시… 신조 병기인 것 같더라. 젠장, 갑옷만 먹혀서 다행이네.”
[다맞. ‘다는먹다’는 는라‘다는먹’ 의념개 장무, 면으닿… 다힌먹!]
“네네! 닿으면 먹힌다지만… 이건 못 먹잖아요!”
[건그… 의별… 라이명생… 이량용허 뿐거큰!]
“아! 많이 못 먹는다는 거군요!”
콰아아앙!
천만다행하게도 패황 기사 유천의 검은 저 ‘다 먹는다’에 닿아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것은 처리 속도의 문제일 뿐 시간만 들이면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성좌 도살왕이었다.
정말로 성좌 용봉왕과의 싸움에서 패황 기사 유천의 검을 가져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며 노도와 같은 성좌 도살왕의 공세를 받아 내지만, 승부는 쉽게 나지 않고 전투의 시간은 계속해서 길어져 갔다.
그리고 싸움은 해가 지고서도 계속되었으며, 전투의 여파로 인해 땅이 깨지고 갈라진 흔적과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면서 서서히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다들 자신들의 성좌와 직접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 여기까지 비상한 유성원의 정체를 보려고 온 이들도 있었다.
또한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 안에 있던 사도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인지 모두들 코어 던전을 나와서 이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 그렇게 수많은 관객 속에서 유성원과 성좌 도살왕의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진행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