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렇게 혼탁한 상황 속에서 어디 기댈 곳 하나 없는 대한민국은 엄밀히 말해 사상 초유의 위기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정부의 행정력과 협회 소속의 얼마 안 되는 헌터, 군의 힘으로 이 험난한 혼란을 바로잡아야 했다.
평소에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 심각해질 줄 알았지만, 이 나라는 신기하게도 위기가 찾아오면 숨겨 둔 힘을 개방하는 것처럼 모든 관료 및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 내는 신기한 종특을 가지고 있었다.
헌터 협회, 비상 대책 지휘 본부.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정부와 협회에서는 이전 토벌전 때처럼 합동 지휘 본부를 만들어서 현 사태 해결을 위해 전력으로 뛰어다니면서 긴밀한 공조를 이루고 있었다.
“민간인 대피는 어떻게 되고 있나? 꾸물거리는 놈들은 그냥 스캐빈저에게 가서 죽어 버려!”
“도로 확보 및 전산망 유지에 특히 힘써라. 정보망이 유일한 우리 재산이다!”
“국방부는 뭘 하고 있나? 무능한 똥별 새끼들, 일 안 하나?”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네오 신안 언더시티 폭격 작전 및 배 파괴 작전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협회장님은 지금 가장 심한 전투 구역으로 가서 중재 및 제압을 실행하는 중입니다! 또 전지아 양에게 자금 지원 및 남부 쪽 상황 개선을 맡겼고, 그리고…….”
“양당 의원 수뇌부들은 현재 각기 흩어져서 위기인 곳으로 향하거나 각자 호위 담당 헌터들을 보내서 시민들 대피를 돕고 대피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정말로 심각한 위기에 민심까지 난리가 날 상황이 되자, 일부 무능한 공무원이나 지레 겁먹은 의원들을 빼고는 마치 때가 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다들 움직여 대기 시작했다.
국방부도 일단 할 수 있는 한 국내 안전을 위해 외국 스캐빈저들과 마피아들이 못 들어오게 그들의 거점이 될 곳을 파괴하는 작전을 계획했으며 협회와 연동해서 작전을 실행해 나갔다.
“후우우~ 하지만 결국 모두 미봉책일 뿐, 사실은 길드들의 이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답이 없습니다.”
“S급은커녕 A급, B급만 해도 무서운 살인 병기이니…….”
괜히 아카데미아가 B급 이상부터 천(天) 클래스로 두고 특별 관리하는 게 아니었다.
SS급인 유성원 측이라든가 S급 다수들이 활약하는 정세가 대세라서 그렇지, 그들이 개입 안 하면 결국 A급, B급이 왕이다.
그나마 협회장이 S급 헌터여서 어찌어찌 해 나갈 수 있지만, 압도적인 무력 스타일이 아니라서 A급 다수나 B급 다수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면 해결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서울과 수도권에만 문제가 집중돼서 다행이긴 합니다.”
“그야 지방에는 청룡 길드의 유산 분쟁에 참여할 만한 길드가 없으니 그렇지!”
서열 싸움과 유산 분쟁도 체급이 받쳐 줘야 하는 법.
지방의 헌터 중에는 유일하게 S급 헌터인 전지아를 빼고는 강한 자가 없는 만큼 지방 길드는 청룡 길드의 유산 분쟁에 대부분 참여하지 않았다.
그나마 체급이 되는 길드는 참여해 봤다가 이미 깨갱해서 손 떼고 물러난 지 오래였다.
하나 수도권 주변으로만 국한한다고 해도 약 2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관련되어 상황은 심각했고, 여전히 국운을 좌우할 정도의 사태였다.
“후우우우~ 그래서? 유성원 그 친구에겐 연락 넣었나? 아니, 백가연 어르신이라도 좋네. 진짜로 죽을 지경이야.”
“유성원 헌터야 그… 늘 말하듯 무시하고 있습니다. ‘바빠. 전에 한마디 해 줬으니 됐잖아. 정말 큰일 터지면 끼어들게~’라면서 막 나가고 있고, 백가연 어르신도 ‘허허, 미안하네. 나도 아카데미아급으로 바빠서 말이야.’라면서 은근슬쩍 피하는 눈치입니다.”
“아카데미아급으로 바쁘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참 내~”
아직 아이언 포트리스에서 보호하는 아이들 중 각성자가 250명이나 나타났다는 소식을 모르는지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그렇게 위기 상황에서 열심히 바둥거리면서 드디어 진심을 발휘하는 정부와 협회였지만, 일이라는 건 늘 그렇듯 평소 얌전할 때가 아니라 사태가 터지고 난 다음에 막아 내는 건 언제나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가장 문제는 역시 길드의 헌터들이 부리는 난동을 억제하고 완벽히 제압할 힘이 없다는 거였다.
“하아아~ 그럼 결국은 지금과 같은 비상 체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저기, 외교부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일본 정부와 길드 연합에서 현 사태 해결을 위해 S급 헌터 및 팀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필요 없네. 우리 쪽에 SS급 헌터가 있는데 얼어 죽을 소리 말고 자기네나 잘 신경 쓰라고 전하게. 거기 악(惡) 성향 성좌가 쉬는 게 아닐 텐데?”
“하지만 정부 측에선 검토해 보라고 난리입니다. 그들이라도 끌어들이는 척을 해서 유성원 헌터를 움직이게 할 생각으로…….”
“미친 소리 좀 하지 말게. 그 황금 빠따에 대가리 터지고 싶은가? 작년에 신강남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었는지 벌써 잊었나?”
일본 측 헌터의 힘도 빌리고 유성원도 견제해 보자는 작전을 구상했지만, 그런 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수틀리면 그냥 신강남 때처럼 티탄의 말뚝을 휘두를 수 있는 유성원에게 그딴 짓을 했다가는 뒷감당이 무서웠다.
‘대한민국이 망하면요? 으음~ 배달 음식 못 시키고, 근육 예능 못 봐서 많이 아쉽겠죠. 미리 보던 거 다운로드라도 해 놔야 하나?’
‘놈에게 있어 국가의 가치는 딱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래서 무관심하지.’
그런 만큼 국제 역학 관계 같은 것도 계산하지 않을 친구라서 괜히 일본 헌터들을 불러서 뭔가 자극시키려 했다가는 오히려 폭발만 커질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그 망할 황금 용을 타고 가서 도쿄에 패황천검류라도 갈겨 버리면 그야말로 한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막는 게 최선이었다.
“중국 측과 러시아 측의 지원도 그럼…….”
“당연한 걸 묻지 말게!”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협회장의 말에 직원은 곧바로 자신의 일을 하러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무튼 대안이 없는 만큼 길드들의 분쟁과 서열 정리가 끝날 때까지는 당분간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협회장은 다시 불려 나갈 때를 대비해서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일만 빠르게 해결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또 잠시 뒤에 막 나가는 길드 놈들을 처리하려면 재충전은 필수였다.
***
일본 정부. 내각부, 방위성, 외무성 참여 비밀회의.
일본. 한국과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던전 사태가 처음 발생했을 당시 드디어 다시 군대를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자위대를 다시금 일본군으로 재편하고 헌터들을 별도의 특수부대로 재정립하여 마정석 채취 및 가공 회사까지 두어서 초기엔 헌터들의 통제에 성공했었다.
하나 시간이 지나고 성좌의 시대가 됨에 따라서 다시 한 번 더 분란이 시작, 직접 온갖 힘과 가호를 주는 성좌를 따라야 한다는 측과 그래도 정부가 먼저라는 측이 나눠져서 현재 일본은 협회 아래에 헌터 특무부대와 길드 체제가 양립하는 구성이었다.
그래서 이곳엔 총리 및 방위대신을 비롯해 헌터 관련으로는 헌터 특무부대 대장과 길드:신의 소리(神の声=God’s Voice) 길드장이 동시에 입회하고 있었다.
아무튼 오늘 회의 주제는… 아니, 근 반년 동안 언제나 모일 때마다 하는 이야기는 역시 한국 관련 화제뿐이었다.
“유성원 헌터가 전선 도시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북한 지역에 첫 요새화 작업을 성공했다고 합니다. 다만 국가 내부 문제에 관해선 여전히 참여하지 않는 입장이라서 길드 분쟁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음… 손 안 대고 코 푸는 걸 노리는 건가? 아무튼 청룡 길드의 유산을 두고 하는 싸움은 여러모로 유성원 헌터 측에 이익이군.”
“특무대장, 그 친구와 접선 계획은?”
“여전히 실패입니다. 일본해를 통해 북조선 지역으로 향한 다음 접선하는 걸 노렸지만, 그쪽 스캐빈저들에게 귀신같이 감지되어서 잡혀 버리는 바람에……. 모조리 그 식인귀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식인귀라 칭하는 것은 역시 성좌 도살왕의 수하들. 어떻게든 유성원과 접촉하기 위해 최고의 요원들과 헌터 대원들을 투입했음에도 결국 접선에 실패했고, 보낸 요원과 특무대원들은 모조리 도살왕의 밥이 되고 말았다.
“젠장, 어떻게든 접선을 해야 하는데… 고작 천억 엔을 받고서 일을 뛰는 놈이었다니…….”
“가벼운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맡아 줄 수 있는 임무를 생각하면 역으로 엄청 싼 편이긴 하죠. 문제는 의뢰를 하러 가지도, 만나지도 못한다는 점이지만요.”
“아마 한국 정부는 이대로 유성원 헌터가 전선 도시를 만들고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까지 클리어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될 말일세!”
쾅!
총리대신이 분노하면서 탁자를 후려쳤다.
지금 일본은 성좌 66천마(六六天魔)라는 거대한 악(惡) 성향 성좌와 동과 서로 나뉜 채로 수십 년째 전투 중이었는데, 그로 인한 물리적 피해는 물론 국가 역량 감소 또한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하나 이상 존재하는 악(惡) 성향 성좌와의 싸움으로 인한 평균 하향의 법칙에 의해 여전히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바로 옆의 한국이 그 악(惡) 성향 성좌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기 싫은 것이었다.
“절대 그것만은 안 돼! 성좌 도살왕이 사라지면 한국은 자연스럽게 북한 영토 지역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되고, 그 온건한 성좌 용봉왕과 한창 위기인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아져서 안전 지역이 만들어지네. 그러면 어떻게 되겠나?”
“일단 국제 기업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겠고, 투자들이 이어지겠죠.”
영토를 완전히 회복한 대한민국의 포텐셜도 나름 컸고, 일단 거대한 악(惡) 성향 성좌와의 전쟁에 시달림을 받지 않는 것부터가 압도적인 국가적 메리트였다.
“우리는 아직도 그 전쟁광, 성좌 66천마와 지겹게 싸우고 있는데 한국은 모든 국가적 역량을 국가 발전에 투입할 수 있게 되는 걸세! 마치 6.25 한국 전쟁 때 우리 일본이 살아난 것처럼 말이야!”
일본에 있는 악(惡) 성향 성좌 66천마가 좋아하는 것은 ‘전쟁’. 끝없는 전쟁이었다.
휘하 몬스터들은 모두 각종 전쟁 무기를 사용하는 사령(邪靈)들로, 일본 전역에 있는 모든 지적 생명체를 쓸어버리고 해외로 또 전쟁을 하러 진출하는 게 목적인 성좌였다.
“물론 우리도 힘든 시기이지만… 거기도 내부가 엉망이라서 그게 쉽게 되진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이미 네오 신안 언더시티부터 국제 마피아계의 혜성 같은 존재이잖습니까?”
“총리님의 말씀을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네! 이미 수많은 역사가 그런 사실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단순히 배가 아픈 걸 넘어서 국가 간의 파워 밸런스가 바뀌는 일은 민감한 문제였고, 거기에 자존심까지 들어가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사태가 된다.
그것도 그냥 자존심이 아니라 한 번 세계를 호령했던 대일본제국과 버블 경제 시기의 환상이 겹치니 거의 망상 레벨로 강박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유성원 헌터와의 접촉은 계속 시도해야 하는데… 아니면 부를 방법은 없나?”
“딱히 방법이 없는 걸로 압니다. 일단 계속 그 전선 도시에 박혀 있거나 아니면 주 기지인 아이언 포트리스에만 있어서 말이죠. 메일도 계속 보내고 있지만… 모조리 씹히고 있습니다.”
“후우~ 아무튼 막아야 하네. 막아야 해. 막아야 한다고……. 이대로 진짜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이 사라지면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야스쿠니에 잠드신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어지는데…….”
‘…그냥 우리가 66천마를 쓰러뜨리면 된다는 건 잊었나? 후우~’
그래, 해답은 멀지 않았다. 특무대장의 생각대로 그냥 유성원 측보다 더 빨리 66천마를 쓰러뜨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총리도 그렇고 방위대신도 그렇고 특무대장도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한히 몰려오는 사령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군에 엄청난 투자를 함에도 현상 유지가 한계였고, 무한히 몰려오는 사령의 부대를 상대하는 걸 넘어서서 한 번은 코어 던전에 승부수를 던지기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나마 이번에 한국 내 길드 간의 분쟁 때문에 정부와 협회가 바빠진 만큼, 갈수록 접선 가능성이 올라가고 있어서 조만간 연락이 닿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확실히 연락이 닿은 다음에 하게.”
“예! 다음 주쯤이면 분명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특무대장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고, 총리와 방위대신은 계속해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유성원 헌터와의 접촉. 동아시아 패권의 열쇠이자 일본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건으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었다.
그동안에는 방해가 커서 실패했지만, 이제 한국 정부와 협회에 맡겨진 과중한 업무로 인해 틈이 생겨서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