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아이언 포트리스.
매일같이 요새에 있던 유성원은 오늘은 아이언 포트리스에서 볼일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청룡 길드의 유산으로 인한 길드 간 분쟁이 격화되면서 여러 곳에서 피해가 점점 커졌고, 그래서 또다시 유성원에게 질서를 잡아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정부와 협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굳이 내가 참여할 필요 있나? 일 잘하시던데요. 게다가 협약에도 써 놓은 거 보셨겠지만, 우리가 공짜로 일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전선 도시 사업 잘한다고 막 칭찬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좀…….”
“지금 상황이 심각합니다. 오죽하면 길드에서 아카데미아의 학생들까지 강제로 데려가서 PVP 싸움판이 만들어질 지경입니다. 이미 천(天) 클래스 애들은 실전에 투입되었고…….”
“천(天) 클래스야 B급 이상이니 사실상 현역 헌터보다 유능하죠. 지(地) 클래스도 경험이 부족할 뿐이고, 인(人) 클래스 애들은… 사실상 민간인이랑 다를 게 없으니 설마 동원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까진 안 했지만… 상황이 더 안 좋아지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협회 직원의 심각한 얼굴에 유성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질 수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된 거야?”
“승부가 확실히 안 나는 게 문제입니다. 고만고만한 A급, B급들이 자신들 목숨을 엄청 아끼고 있어서 말이죠. 한 명, 두 명 죽다가 상대가 갑자기 S급으로 승급하는 사태가 생기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어지니… 소모전만 하고 있습니다.”
“…그쯤 되면 청룡 길드 유산은 이미 의미 없는 거 아냐? 참 나~”
“아무튼 피해도 피해이지만, 국내 헌터들 숫자가 줄어드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렇게 열심히 비는 협회 직원이었지만, 반대로 유성원은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생전 제대로 일 안 하던 협회가 절벽에서 떨어지려 하니 용을 쓰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는 어설프게 나서서 도와줄 게 아니라, 미끼를 던져서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게 최선이었다.
“난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기회 말입니까?”
“3대 길드 가운데 국제 길드인 올림푸스밖에 안 남았겠다, 기존에 적폐들과 손잡았던 서울, 청룡이 망했으니 이제 순수 대한민국 길드의 중심은 없는 거잖아. 그 자리에 협회가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예?”
“전지아 양만 끌어들이면 협회장까지 해서 S급 2명. 그 정도면 지금 우리 말고는 대적할 수 있는 길드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지금이라도 협회 중심으로 한국 헌터계를 통일시킬 수 있지 않나? 나라면 그러겠다.”
유성원의 말에 협회 직원의 눈이 번뜩 떠졌다.
그 말대로 지금이 ‘협회’가 모든 길드들을 통제에 넣기 가장 좋은 때이기도 했다.
국방부에게도 헌터들을 협회에서 통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본의 특수군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미래 비전까지 제시하면 충분히 손잡아 볼 만한 일이었다.
“지… 진심이십니까?”
“아니, 내가 그쪽 입장이면 어떨까? 해서 생각해 본 거야. 내가 나서면 대한민국 헌터들을 다 내 밑에 둬야 직성이 풀릴 텐데,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유성원이 내뿜는 위압감, 거기에 그의 좌우와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위풍당당한 기사들을 보자 협회 직원은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전력상으로는 한국의 헌터계를 정벌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여우 잡으려다 호랑이 끌어들이지 말란 말도 있잖아. 그러니 다시 잘 생각해 보셔.”
“예, 예. 그, 그리고… 이번에 이곳에서 각성한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본래라면 아카데미아에서 교육을 시키거나 아니면 협회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굳이 말하지 않고 감추려 했지만, 아이언 포트리스 내에 들어오는 식량과 물자 담당과 또 새로이 각성한 아이들을 위한 헌터 장비와 실전용 교재를 들여오는 일로 인해 협회가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사실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물론 감춘 거에 대해 협회에서는 따질 입장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니들이 관리 안 해서 개X같이 된 보호 시설에서 학대당하던 걸 내가 구했고, 내가 청룡 길드장과 싸워서 얻은 ‘보수’로 ‘각성’하게 된 애들이다. 맨입으론 못 주지. 인당 얼마 줄래? 성좌 청룡의 힘을 받은 아이들이다. 포텐셜은 충분하지.”
“사, 사람을 어떻게 돈으로…….”
“내가 가질 거 아니라, 애들 줄 거야. 시설에서 학대당한 기억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애들이 그럼 나라에 무조건 충성하고, 질서니 정의니 하는 걸 쉽사리 믿을 수 있을까? 스캐빈저 지망생만 늘어나지. 아무튼 싸게는 못 주니까 그렇게 전해라.”
“히, 히익! 아, 알겠습니다.”
질서 유지 문제와 더불어 각성한 아이들에 대한 문제 모두 제대로 협상 한번 못하고 오늘도 그대로 쫓겨나는 협회 직원이었다.
그렇게 그가 사라진 뒤, 유성원은 그대로 축 늘어지더니 깊은 한숨을 쉬고는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야, 나 이거 도저히 못해 먹겠어.”
“잘하셨는데요? 폐하.”
“그냥 니들에 써 준 대본대로 말한 것뿐이잖아. 상대는 처음부터 쫄아 있어서 아무 반박도 못한 거고.”
“그렇게 계속하시면서 늘게 되는 겁니다.”
“겁박하는 스킬을 늘려서 뭐 하게? 게다가 애들 팔아넘기는 대사는 또 뭐야? 이건 진짜 선 넘은 것 같은데? 물론 진짜로 그럴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도 씁쓸하다고~”
그래, 자신도 그런 망할 보호 시설 출신인데 정신 나갔다고 아이들을 팔아치우겠는가?
물론 뒤에 애들에게 돈을 지급한다는 말을 넣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분으로밖에 안 보이고 자신이 꿀꺽할 것 같은 뉘앙스로 생각해도 상관없을 법한 문장이었다.
본심이 아니라고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유성원을 유청이 다독였다.
“하나 그 한마디로 아이들을 지킬 명분을 쌓았습니다. 그동안 속물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어필하셨으니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래, 그건 동의해.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보호 시설의 애들 관리를 똑바로 할 수밖에 없겠지.”
헌터끼리의 내전으로 헌터의 숫자가 줄면 자연스럽게 그 가치가 올라가고, 언제 어디서 누가 각성할지 모르니 시민에 대한 각종 대우와 정책이 달라질 것이다.
아니, 강제로라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높은 곳에서 거들먹거리는 분들이 누리는 권력과 부가 결국 사라질 테니 말이다.
“아무튼 지겨운 협회 직원과의 미팅도 해결했네. 그러면 다음 일정이… 음?”
[임시 관리자님,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뭐야, 갑자기? 새로운 손님이라니?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일본에서 온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본? 모니터로 비춰 봐.”
딱 일어나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유성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스팸 메일 같은 걸 잔뜩 받았기에 일본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일을 열어 보지도 않고 지워 버려서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는 그였다.
[후에에엥! 제발요~ 들어가게 해 주세요오~ 저 유성원 님 못 만나면 못 돌아간단 말이에요. 저 진짜 일본 헌터 특무대 소속이에요. 여기 신분증이요. 식인귀들 땜에 온갖 고생하면서 겨우겨우 왔단 말이에요. 후에엥!]
“여자애네? 게다가 꼴이 왜 저래?”
“완전 부랑자 꼴인데요?”
모니터에 비친 이는 작은 소녀로, 나이는 아영이와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겉모습이 완전 못 봐 줄 정도였다. 누더기가 된 정장에 망토 같은 것 하나만 걸쳤는데, 한 손에는 ID카드 같은 걸 든 채 울먹이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맥이 빠진 유성원은 어떻게 할까 묻기 위해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저거 어쩌지? 그냥 내가 직접 나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폐하. 상대가 누군지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기지 내부에 들이는 건 위험하니까요.”
“아, 그리고 나 혼자서 나갈게. 너희는 모두 성소에서 엿듣거나 아니면 기지 내부에서 카메라로 지켜봐.”
적절한 지시에 이견이 없는지 기사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위치로 움직였다.
그리고 유성원은 엉망이 된 그녀에게 줄 옷가지와 물과 빵을 비롯한 몇 가지 식료품을 가지고 기지 밖으로 나가 직접 그녀를 맞이했다.
실컷 징징대다가 힘이 빠진 건지 카메라 밑에 처량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유성원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하며 달려들었다.
“와 주셨군요. 후에엥, 저 완전히 무시당한 줄 알고…….”
“일단 이거 받아. 그리고 트레일러 한 대를 이 앞에 놓아 줄 테니 거기서 씻고 먹고 채비를 다 한 뒤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아, 예! 감사합니다.”
기지 내부로 들이지는 못하기에 트레일러까지 불러서 별도로 샤워 및 식사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렇게 잠시 후 유성원이 준 옷으로 갈아입은 수수께끼의 일본 여자는 그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으면서 곧바로 감사의 인사부터 하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저에게 이렇게 식사에 옷까지 마련해 주시다니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안쓰러워서 도와줬을 뿐이야. 자, 이제 다 됐으니까 일본에서 오신 양반, 어서 목적이랑 용건을 불어.”
“아, 아! 예! 저는 일본 헌터 특무부대에 소속된 A급 헌터, 하야세라고 합니다. 클래스는 죄송하지만 비밀이에요!”
“쿠, 쿨럭! 뭐? A급?”
순간, 냉담하게 무게 잡던 유성원의 모습은 당혹감으로 인해 완전히 깨져 버렸다.
갑자기 일본의 A급 헌터가 등판하다니? 그것도 아영이 나이대의 어린 소녀라는 거에 기가 막혔고, 왜 그런 거지꼴을 한 채 한국까지 온 건지, 온통 당혹스러운 일 천지였다.
“그 정도면 귀중한 인력일 텐데…….”
“그야 밑의 사람들이 다 실패했으니 A급까지 보내게 된 거죠, 뭐. 저까지 실패했으면 아마 S급까지 투입했을걸요? 한창 전쟁 중이신데…….”
“그래서, 자세한 목적은?”
“구질구질한 접두사, 접미사 다 빼고 말하자면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66천마를 잡는 데 도움 좀 주세요.’입니다! 아, 종이랑 펜 좀 쓸게요.”
아주 시원하게 본론을 말하는 하야세라는 소녀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종이 하나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66천마(六六天魔) 코어 던전 클리어:10조 엔>
<66천마(六六天魔)의 직속 사도, S급 몬스터:마리당 5천억 엔>
<서쪽 영토 수복에 현(県)당:100억 엔>
<기타 제반 사항:전투에서 얻는 마정석 및 전리품은 모두 전투 당사자의 것.>
“이, 일단 이게 기본 조건이고! 혹시 다수 처리 및 성과가 높을 경우 추가금 지급 같은 것도 협의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하시면 여자, 술을 비롯한 접대 자리도 완벽하게…….”
“안 해. 거절할게.”
“왜요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나요? 액수가 적나요? 아니면 원하시는 다른 조건 같은 게 있으신가요? 제가 가진 재량은 얼마 안 되지만, 어떻게든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희 진짜로 정말로 절박해서 그런데~ 어떻게 안 될까요? 아, 아니면 혹시 국가적 감정 때문이신가요?”
단호한 거절에 절박한 눈빛을 보내면서 빌어 보는 하야세였지만, 유성원은 다시금 왜 거절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아니. 그냥 할 틈이 없는 건데? 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되게 많아. 저 위에 전선 도시 짓는 일도 해야 하지, 여기 아이언 포트리스도 관리해야 하지. 국가적 감정? 애초에 난 저 망할 헬조선도 마음에 안 드는데… 일본을 싫어할 이유가 없는데?”
협회 보호 시설과 ‘군복무’ 시절을 거치고, 아카데미아에서 일하기까지 32년. 조국에 대한 애정 같은 건 티끌만큼도 없는 유성원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협회나 정부의 손길을 거부하고 그들을 엿 먹이는 데 온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아니, 잠깐만, 잠깐만… 으음…….”
“왜, 왜 그러세요?”
“맞아. 이 나라에게는 일본만 한 게 없지.”
그래, 세계 축구 순위 꼴등에서 첫 번째를 하더라도 꼴등이 일본이면 용서가 된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 관해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역사적 감정이라는 게 있었다.
또한 근현대사를 넘어 현재의 역사까지 훑어보면 다시는 ‘식민지’ 시절의 굴욕을 되살릴 수 없다며 이를 갈고, 뼈를 부수고, 피를 뿌리면서까지 일어설 수 있는 대한민국의 역린이자 자존심이며, 모든 욕망을 초월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