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뒤돌아보니 황희준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희준아, 지금 이 앞은 온통 지뢰밭이다.”
“네? 지뢰밭이요? 정말입니까, 형님?”
“그렇다니까.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일단 너는 꼼짝하지 말고 서 있어.”
“알겠습니다. 형님.”
황희준이 마지막으로 들어오고 시간이 흐른 후, 게이트는 딱딱하게 변했다.
이제 던전 클리어나 실패를 해야 다시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은석이 딱딱하게 변한 게이트 쪽으로 황희준을 밀었다. 혹시 모를 공격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해 그의 주변에 보호막도 쳐 두었다.
쉴드라는 단어를 들은 황희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그 정도로 위험합니까?”
“그래, 여기서 벗어나면 나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으니까.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서 있어.”
그의 경고에 황희준은 벽 쪽으로 더욱 바싹 붙어 섰다.
양팔을 딱 붙인 채 꼼짝 않고 서 있는 걸 확인하고 은석은 구덩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꽤 깊네.”
고개를 숙여 안을 내려다보았지만 암안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이었다.
휘우융-
비릿한 피 냄새를 머금은 소름 끼치는 바람이 아래에서 불어 올라왔다.
“꼭 들어오라고 부르는 소리 같군.”
은석이 승형을 불러냈다.
“저 아래로 병사 한 명 보내 봐.”
“알겠습니다. 16호가 몸이 작고 날래서 기습에 능합니다.”
소환된 16호 병사가 구멍의 벽을 타고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잠시 후, 정신 감응을 통해 은석을 불렀다.
‘대장님!’
‘그 아래에 뭐가 있어?’
‘여기에 큰 나무가 있습니다. 가지마다 말라비틀어져 죽은 몬스터 사체가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아악!’
보고를 하던 16호 병사의 갑작스러운 비명이 들렸고, 순간 그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소환.”
은석의 재소환 명령에 다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16호.
“휴우……. 한 번 더 죽는 줄 알았습니다.”
16호 병사가 가슴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격당한 거야?”
“네, 나뭇가지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제 몸을 뚫어 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은석은 다시 어두운 구멍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무가 살아서 공격한다…….”
던전 정보창에서 본 블러드 트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 영양분을 흡수하는 건가. 그럼 던전핵은 구덩이 속 나무 중에 있겠군.’
은석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푸른 화염.”
이글거리는 푸른색의 불덩어리 하나가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은석은 그것을 조금 전 16호가 내려갔다 온 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었다.
끼에엑-!!
본능적으로 귀를 막을 만큼 날카로운 괴음이 던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사이 소환한 팀 고스트가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구덩이 주변에 섰다.
“대장, 저게 뭡니까?”
“블러드 트리. 생명력을 빨아먹는 나무다.”
이글거리는 불꽃에 타고 있는 나무가 괴로운 듯 나뭇가지를 하늘로 뻗어 내며 흔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꽂혀 있던 몬스터의 사체가 높은 온도 때문에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흠, 뭔가 좀 괴기스럽습니다.”
창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때였다.
구덩이 안에서 괴음을 지르던 블러드 트리가 최후의 발악인 듯 그들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사체가 사라진 나뭇가지들이 늘어나 구덩이 밖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대장, 나뭇가지가 늘어납니다.”
“잘라 내.”
후두둑-
은석의 명령에 승형이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불이 붙어 있던 가지들이 바닥에서 떨어지자, 그대로 타 사라졌다.
“나무가 구덩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건 확인됐고.”
은석이 팀 고스트에게 명령했다.
“내가 화염을 던져 넣을 테니까 솟아 나오는 것들을 바로 잘라 버려.”
“네, 알겠습니다.”
은석은 양손에 푸른 화염 덩어리를 만들고는 던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구덩이마다 불덩어리를 던져 넣었다.
안으로 떨어진 불은 나무를 태우며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와, 꼭 캠프파이어 하는 것 같네.”
수십 개의 구덩이에서 푸르스름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황희준은 벽에 기대어 홀로 던전 안 불멍을 즐기는 중이었다.
어느새 던전 가장 안쪽에 도착한 은석.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덩이가 나타났다.
블러드 트리 역시 이전 것과 전혀 달랐다. 구덩이 밖으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이 마치 나무뿌리처럼 땅속에 박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불룩한 것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몬스터의 사체였다.
기괴한 나무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로 물러서는 은석의 곁으로 창왕과 승형이 도착했다.
“이놈이 던전 보스다. 죽여.”
그의 명령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 나가는 창왕과 승형. 곧이어 도착한 다른 팀원들도 블러드 트리를 향해 뛰어갔다.
땅에 박혀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움직이더니, 그들이 아닌 은석을 향해 빠르게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죽은 놈들은 빨아 먹을 게 없다는 걸 아는 모양이네.”
싸우는 자들 중 유일하게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자는 은석뿐. 그가 아공간에서 귀검을 꺼내 들며 푸른 화염을 입혔다.
화악-!
이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푸른 불꽃.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뭇가지를 순식간에 잘라 버린 은석은 그대로 구덩이 안으로 뛰어 내려가 나무의 몸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퍼억-
한 번에 잘리지 않을 만큼 굵은 나무였다. 몸통에 박힌 귀검을 빼내자 마치 사람처럼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은석을 따라 구덩이 아래로 내려온 해머가 반쯤 잘린 몸통을 향해 망치를 치켜들었다.
슬쩍 몸을 옆으로 비켜서자,
콰앙-
나무의 갈라진 부분을 강하게 쳤다.
찌이익-
부러지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
동시에 블러드 트리가 내지르는 괴음. 옆으로 쓰러지다가 멈춘 나무를 향해 해머가 다시 한번 더 망치를 휘둘렀다.
거대한 나무가 잠시 흔들리더니 비명을 지르며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덩이를 빠져나온 은석은 남아 있는 나무의 밑동에 불덩어리를 던져 넣었다.
나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붉은 피가 푸른 화염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 있군.”
불에 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나무 몸통 바닥에 붉은색의 던전핵이 반짝였다.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승형의 병사 하나가 구덩이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던전핵을 가지고 나왔다.
은석이 핵을 받아 들고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대장, 이번에는 마정석을 채굴하지 않으십니까?”
“생각보다 개미들이 마정석 채굴에 적합하지 않더라고. 가져오는 마정석의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럼 지금 저희가 캘까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각성자 협회에서도 가져가는 게 있어야지. 앞선 두 던전에서 채굴한 게 많이 없을 거야.”
“그런데 대장. 여기는 산속에 위치한 곳이라 사람들이 오기에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요?”
은석이 해머를 힐끗 쳐다봤다.
“공짜로 던전 전체의 마정석을 얻는데 그 정도 수고는 해야 되지 않겠어?”
황희준의 눈에 구덩이에서 피어오른 불꽃 사이로 걸어오는 은석이 보였다.
“형님!”
황희준이 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보호막을 없앤 후, 은석은 한 손으로 던전핵을 부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검은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니 바깥은 새벽이었다.
“와, 형님. 던전 3개를 진짜 순식간에 클리어했습니다.”
“이제 시작이니까 더 속도를 내야지.”
그의 말에 황희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더요?”
“빨리 100회를 채워서 상위 던전에 들어가야지.”
“역시 형님의 추진력! 제가 최선을 다해 입찰을 받아 놓겠습니다.”
은석이 이현을 불러냈다. 황희준이 그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휴, 이 새벽에 산길을 걷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황희준의 차를 세워 둔 곳에 도착한 후, 이현은 다시 마법진을 그렸다.
“희준이 집부터 가자. 네가 도착할 만한 장소 알려 줘.”
황희준이 휴대폰을 꺼내 아파트 위치와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단지 내 구석진 곳을 보여 주었다.
이현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깊은 산속에서 순식간에 황희준의 아파트 안에 도착한 그들.
“캬! 정말 멋진 스킬입니다. 대단하십니다. 헌터님.”
이현의 팬이 된 것 같은 황희준이 그를 향해 감탄사를 끊임없이 뱉어 냈다.
“쉬어라. 간다.”
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희준은 어둠 속에서 홀로 양 엄지를 들고 서 있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 * *
집에 도착한 은석은 샤워 후 조용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헌터를 시작하면서부터 식탁 위에는 늘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던전 레이드를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그를 위해 만들어 두는 샌드위치였다.
은석이 좋아하는 치즈를 가득 넣은 샌드위치를 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냉장고를 열어 콜라 한 캔을 꺼내는데, 어느새 다가온 청안이 냉장고 옆으로 뛰어 올라왔다.
“좋으냐?”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은석은 청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좋냐고 물은 것이다.”
은석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청안은 은석의 대답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앞발을 들어 수염을 쓱 문질렀다.
“그래도 이 집 인간들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바치는 존재는 나다.”
“그 인간들 중에 나는 빼 줘.”
샌드위치 접시와 콜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던 은석이 돌아섰다.
“그런데 너, 여기 왜 왔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지? 요새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청안은 못 들은 척 거실 소파 위로 올라가 등을 보이며 누워 버렸다.
방으로 들어온 은석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휴대폰 전원을 켰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김은석
프로젝트명: 저승 헌터
클래스: 힐러(F등급)
히든클래스: 네크로맨서(저승형 Lv57)
[특성]
귀안(승계)
생력(승계)
귀력: 5700/5700
[스킬]
정보탐색: Lv4
정신감응: Lv1
팔귀의 재생력
방어력: 환(幻)
쉴드/하이드
푸른 화염
[귀속령]
+고스트형
+몬스터형
+인간형
“낮은 등급의 던전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레벨이 많이 오르지 않았네. 아니면 내 레벨이 높아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상태창을 확인하는 사이 휴대폰에 전원이 들어왔고 늘 그렇듯 쉴 새 없이 알람이 울려 댔다.
쓸데없는 길드 관련자들과 낯선 번호로 온 문자들은 확인하지도 않고 삭제해 버렸다.
안공진 실장으로부터 온 문자를 켜자, 수십 장의 사진이 뜨기 시작했다.
리모델링 중인 하데스 길드 건물의 진행 상황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벌써 이만큼 진행된 거야? 안 실장님 대단하시네.”
은석이 부탁한 것들은 이미 공사를 완료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그가 말하지도 않은 두꺼운 철문을 새로 달아 출입 금지라는 팻말까지 붙여 두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쓰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지워 버렸다.
‘내일 현장에 가 보는 게 낫겠지?’
은석은 혹시 원귀가 다시 나타났을까 염려해 하데스 건물에 보내 두었던 병사를 불렀다.
‘네, 대장님.’
‘얼쩡거리는 원귀나 악귀는 없어?’
‘저번의 일이 소문났는지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대장님.’
‘왜?’
‘이걸 보고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말해.’
‘건물 양쪽에 커다란 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어제부터 그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조금 이상합니다.’
병사의 이야기를 듣던 은석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내일 내가 갈 테니까. 나무 근처에는 얼씬하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남은 콜라 한 모금을 마시고 은석은 침대에 누웠다.
‘상태가 안 좋아서 큰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꽤 실력 있는 나무 치료사를 부른 모양이야. 여러모로 참 고맙네. 안 실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