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뛰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쓰고 집을 나섰다.
새벽이었지만 출근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는데, 황희준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님, 던전 레이드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그가 보내준 링크를 클릭했다.
[태황 그룹 윤꽃샘 회장의 하데스 길드, 화려하게 데뷔하다.]
[이틀 동안 3개의 던전을 클리어한 하데스 길드.]
[윤꽃샘의 선택을 받은 슈퍼 루키, 김은석은 누구인가?]
등급이 낮은 던전이라 해도 신입 길드가 이틀 동안 3개의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것은 이슈가 되기에 차고 넘쳤다.
지금껏 그런 길드와 헌터는 없었을뿐더러 거기에 하데스는 태황 그룹의 회장이 직접 만든 길드였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대중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야깃거리였다.
‘뭐, 다 비슷비슷한 말뿐이네.’
기사 몇 개를 휘리릭 넘겨보던 은석은 검색창을 껐다.
‘벌써부터 이렇게 놀라면 곤란한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조깅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 버튼을 눌렸다.
그때.
띠링-
또다시 문자 도착음이 들렸다.
이상균이었다.
은석은 확인하지도 않고 휴대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은석이 그의 문자를 씹던 그 시간, 이상균은 초조하게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발……. 문자 확인 좀 해라, 이 새끼야!!’
하루에도 몇 번씩 은석에게 연락했던 이상균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절실했다.
새벽부터 문자를 보낸 이유는 정종렬 때문이었다. 은석이 하데스 길드에 가입했다는 기사를 본 정종렬이 불같이 화를 냈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예전의 김은석처럼 은석 역시 계속 자신들의 돈줄 용병으로 일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데스 길드 헌터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음에도 정종렬은 자신이 은석의 고용주라도 된 듯 당장 은석을 잡아 자기 앞에 무릎 꿇리라며 고함을 질러 댔다.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거실.
이상균은 휴대폰 불빛만 노려보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대고 있었다.
‘실장 새끼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프다 하고 병가를 쓸까?’
이상균은 은석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대신 정종렬에게 둘러댈 핑곗거리를 찾기에 바빴다.
* * *
가볍게 뛰고 온 은석은 식구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집을 나서기 전, 안공진 실장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네, 헌터님.”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벌써 길드 공사 현장에 간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안 실장님. 혹시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는 하데스 길드에 있습니다.”
은석의 예상이 맞았다.
“많이 바쁘시군요.”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길드에 한번 가 볼까 하는데, 공사 중이라 아무래도 방해가 되겠지요?”
느닷없이 찾아간다는 은석의 말에 안 실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로 오시려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 다른 건 아니고 나무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지난밤, 병사가 말한 나무의 낯선 기운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저승 구멍도 살펴봐야 했다.
아무도 없는 밤에 편하게 다녀올까 생각도 했었지만, 비공식적이어도 하데스 길드는 은석의 것이니, 혼자 큰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안 실장을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군요. 저는 오늘 오후 3시까지 여기에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은석이 전화를 끊고 이현을 불러냈다.
“대장,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이현이 지팡이를 꺼내 마법진을 그릴 준비를 했다.
“뭐 하고 있었어?”
목적지가 아닌 다른 질문을 하는 은석.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현은 귀속령이 된 후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이중우의 몸에 빙의된 채 그렸던 그림과 달리 저승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현은 그림 그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싱글거리며 대답하는 이현을 잠시 바라보던 은석이 물었다.
“이중우 작가와 어떻게 연락을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당황해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이현에게 은석이 다시 말했다.
“그냥 물어보는 거야. 잘못했다고 다그치는 게 아니라.”
“네?”
땅만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이중우 화가한테 혼령을 볼 수도, 들리지도 않게 조치를 했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아주 잠깐씩 들리더라고.”
이현은 은석의 귀속령이다.
그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이현이 하는 행동은 은석이 집중하지 않더라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묻는 거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빙의된 느낌은 아니었어. 그렇다고 상대방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은석의 말에 이현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다 나온 듯 물감이 묻어 있는 손가락을 들어 옆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미안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한 조치가 잘못된 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묻는 거다.”
“연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연필?”
“네……. 다시 화실로 돌아왔을 때 구석에 떨어져 있는 이중우 작가님의 드로잉 펜을 발견했습니다.”
살아 있는 자의 물건이 저승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현은 그의 물건을 이용해 이중우와 꿈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었다.
“워낙 작은 물건이고……. 작가님이 잘 주무시지 않으셔서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못했습니다.”
이현의 말에 은석이 피식 웃음을 뱉었다.
“그래, 잠을 자야 조상님이 로또 번호를 알려 주는데 말이야.”
이현은 부모님 몰래 장난치다 들킨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려가면 당장 파괴하겠습니다.”
“이중우 작가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드로잉 펜을 없애라 할 줄 알았는데 은석은 다른 질문을 했다.
“작가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아, 그동안 제가 그렸던 그림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중우에게 이미 엄청난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던전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새로운 그릴 것이 떠올랐고 그것을 이중우와 나누고 싶었던 것이었다.
“던전?”
“네, 독두꺼비 던전의 늪과 블러드 트리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그걸 그려 봤는데, 알려 드리고 싶어서…….”
이현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하데스 길드 근처로 가자.”
“네?”
“마법진 그려. 가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갑자기 목적지를 말하는 은석. 이현은 허겁지겁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하데스 길드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한 은석과 이현.
이현을 소환 해제한 후 공사가 한창인 길드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주차장 한쪽에서 작업 인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안 실장이 보였다.
아공간을 열어 던전 안에서 딴 과일이 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언뜻 보면 미니 사과처럼 보이는 그것은 회복 기능이 꽤 좋은 던전 과일이었다.
“안 실장님!”
은석이 큰 소리로 안 실장을 불렀다.
빙그레 웃으며 서 있는 은석을 본 안 실장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 조금 전에 통화를 했었고, 시간도 많이 지나지 않았다.
“벌써, 도착했다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은석을 쳐다보기만 하는 안 실장을 옆에 서 있던 작업 인부가 툭 쳤다.
그에게 잠시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한 뒤, 안 실장은 은석을 향해 뛰어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 실장님.”
“김은석 헌터님! 근처에서 전화하신 거였습니까?”
고개를 빼고 은석의 뒤를 살피는 안 실장.
“혹시 차를 몰고 오셨습니까? 길이 좁아서 주차하기 힘드실 건데.”
“아닙니다. 버스 타고 왔습니다.”
“네? 버스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안 실장의 얼굴에 바구니를 들이밀었다.
“피로 회복에 아주 좋은 던전 과일입니다. 고생하시는데, 인부 어르신들과 나눠 드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바구니를 받아 든 안 실장이 직원 한 명을 불러서 건넸다. 그가 작업 중인 인부 사이를 돌아다니며 과일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곧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그사이 은석은 하데스 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봤던 예전의 그 건물이 맞나요? 정말 엄청나게 변했는데요.”
악귀와 원귀들이 득실거리고 음기 가득했던 흉가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바로 환골탈태라고 하나 봅니다. 안 실장님.”
은석의 계속되는 칭찬에 안 실장의 턱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흠흠. 사무실을 먼저 둘러보시겠습니까?”
그와 함께 다니면 해야 할 일을 못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저 혼자 조용히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일 보십시오.”
은석의 거절에 안 실장은 늘 그렇듯 두 번 물어보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작업 인부들에게 걸어갔다.
그의 모습에 은석은 미소를 지으며 건물 쪽으로 돌아섰다. 각층마다 세워 둔 병사들이 은석을 보자 빠르게 아래로 내려왔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원귀는 없지?”
“오늘 새벽, 근처에 몇 놈이 얼쩡거리기는 했습니다만 저희가 소멸시켰습니다.”
“저승 구멍을 찾아오는 망자들은 있었고?”
“네, 많을 때는 하루에 둘 이상의 망자들이 저승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사들의 보고를 들으며 은석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엄청나네.”
안 실장이 보낸 사진에서보다 더 두꺼운 철문이었다. 은석이 발로 철문을 두어 번 걷어찼다.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겠는데.”
기합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서 있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곧 공사가 끝날 테니 그때까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잘 살펴.”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병사들은 대답과 동시에 자신의 위치로 빠르게 돌아갔다.
은석은 다시 철문을 살펴봤다. 자신의 요구대로 마력 도어 락이 달려 있었다. 도어 락을 건드리자, 경쾌한 알림음과 설정하라는 멘트가 들렸다.
은석이 씨익 웃었다. 철문에 달린 것은 옛집에 달린 것보다 업그레이드된 도어 락이었다. 손가락을 센서 위에 올려놓은 후 마력을 흘려 넣었다.
[마력을 감지하였습니다. 실패 시 적용되는 페널티를 선택해 주십시오.]
“당연히…….”
스크린에 나타나는 3번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 절단이지.”
마력 도어 락 세팅을 마친 후 지하실로 내려갔다. 위태롭게 쌓여 있던 물건들이 모두 깔끔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아무것도 없는 지하실 한쪽 바닥에 반짝이는 노란색이 눈에 띄었다.
다가가서 보니 저승으로 가는 구멍 주변에 둥글게 붙여 놓은 테이프였다.
“이 구멍이 뭔지나 알고 이렇게 붙여 놓은 거야?”
안 실장의 행동에 은석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이것이 저승으로 가는 구멍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시멘트로 막아 버릴 수도 있었다.
은석 역시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노란색 경고 테이프로 깜찍하게 테두리까지 쳐 놓다니.
“지하실에 철문을 달아 놓는 이유가 이거라는 걸 알았다는 건데…….”
윤꽃샘이 칭찬할 만한 센스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승 구멍 반대편에 새로 생긴 계단이 보였다.
“저기가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인가?”
계단을 올라가자 그의 예상대로 은석의 사무실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화이트로 칠해 놓은 사무실 안에는 책상과 소파 하나씩 놓여 있었다.
블라인드를 올리자 한쪽 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었고, 바로 앞에 여전히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가 서 있었다.
카포텐의 도서관 구석방도 좋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무실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이제 사무실 문 도어 락을 설정해 보실까?”
은석이 양손을 비비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3번 페널티를 누르려다 마음을 바꿔 1번 버튼을 눌렀다. 1번은 문을 열려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 휴대폰으로 전송해 주는 기능이었다.
“지박령.”
은석이 귀속된 지박령을 소환했다.
“넌 이제부터 여기를 지켜라.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고. 아니다, 침입하려는 놈들은 누구든 꽉 붙잡고 있어.”
“네!”
“그리고 잡은 다음에는 바로 날 불러. 알았지?”
“알겠습니다.”
은석의 명령에 지박령의 다리가 바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비석처럼 보였다.
“귀신과 인간 모두 잡아 두는 전용 도어 락까지 달았으니 여긴 됐고, 나무 구경이나 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