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태황 호텔에 들어선 은석과 황희준이 프런트로 걸어가는데 전에 봤던 여직원이 은석을 향해 뛰어나왔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로.”
직원이 먼저 나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황희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올라가십시오.”
직원이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황희준도 어색하게 꾸벅였다.
차 안에서와 달리 아무 말이 없자, 은석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도착 음이 울리자 남자 직원이 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은석 헌터님, 또 뵙습니다.”
남자 직원의 인사에 황희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대체 저희 누구랑 밥 먹는 건가요?”
은석은 대답 대신 픽 웃고 말았다.
도착한 곳은 저번에 윤꽃샘과 만났던 그 방이었다. 들어가니 이번에는 그녀 외에 젊은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고객님 오셨습니까? 하하!”
윤꽃샘이 은석을 고객님이라고 부르며 껄껄 웃었다. 그녀와 달리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표정하게 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보 탐색.’
[안공진, 30세, 윤꽃샘의 비서실장]
[‘회장님과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지?’]
자리에 앉기 전 윤꽃샘이 먼저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가 믿고 맡기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 나의 옛 비서실장이자 하데스 길드의 실장인 안공진.”
안공진이 은석에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안공진입니다.”
윤꽃샘의 말을 듣고 있던 황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를 한껏 낮춰 은석에게 물었다.
“형님, 혹시 하데스 길드라고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처음 들어보는 길드인데요. 혹시 존재하지도 않는 길드 계약으로 형님에게 사기 치려는 게 아닐까요?”
“있는 길드야. 걱정할 필요 없어.”
은석의 말에도 황희준의 눈에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 대장, 김은석 헌터.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지.”
윤꽃샘의 소개에 안공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겠네요. 영혼을 튼 사이니까.”
역시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은석과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 윤꽃샘.
“대장과 함께 온 헌터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네, 네. 저는 황희준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난 이런 사람입니다.”
윤꽃샘이 건네는 명함을 확인한 황희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은석을 바라봤다.
“태황 그룹, 회장님요?”
은석이 대답하기 전에 윤꽃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인사도 적당히 끝난 것 같으니 자리에 앉읍시다. 늙은이는 오래 서 있으면 힘들어.”
안공진이 윤꽃샘의 의자를 당겨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위한 세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희준이 은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형님, 도대체 여기가 어떤 자리인가요? 난데없이 태황 그룹 회장님이라니요.”
속삭이듯 말했지만 방 안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윤꽃샘이 큰 소리로 웃으며 황희준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직 우리 헌터님은 모르시나 봅니다. 여기 김은석 헌터님이 길드를 설립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모인 거고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황희준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려 달라는 눈빛으로 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한마디씩 내뱉었다.
“형님이, 길드를 만드신다고요?”
“그래, 하데스 길드가 내 꺼야.”
그의 대답을 들은 황희준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말문이 막힌 듯 눈만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길드를 만든다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냐?”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형님이라면 충분히 길드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다만…….”
“다만?”
“조금, 아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길드 설립도 설립이지만, 태황 그룹과 함께라니…….”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황희준. 그 모습에 은석과 윤꽃샘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때, 안공진 실장이 은석의 앞으로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길드 등록증입니다. 이제 하데스 길드는 대한민국의 정식 길드입니다.”
파일을 펼치니 설립을 위해 준비했던 서류와 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길드 설립에 필요한 조건이 까다롭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과 이야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등록을 마치셨다니…….”
윤꽃샘이 안공진 실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 안 실장이 아주 유능해. 어마어마한 인재를 대장에게 양보하는 거야.”
은석이 그녀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캬……. 내가 던전에서 저 미소에 홀딱 반해 여기까지 온 거지.”
황희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안공진 실장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일단 등록만 마친 상태입니다. 현재 임시 주소를 올려놓은 상태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길드 건물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노트북을 펼쳐 PPT 파일을 열었다.
“제가 하데스 길드의 건물로 사용할 만한 몇 군데를 봐 두었습니다.”
화면에 나타난 건물 사진을 보며 설명을 시작하려는 안공진.
은석이 그의 말을 막았다.
“길드 건물로 하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설립도 도와드리지 못했는데 건물 정도는 제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은석의 말에 안 실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건물을 구하셨다고요?”
“아니요. 봐 두기만 했습니다. 안 실장님께서 계약을 해 주셔야 합니다.”
“주소를 아십니까?”
은석이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한 후 안 실장에게 보여 줬다. 황희준도 고개를 들이밀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에에? 형님. 저 건물이 맞습니까?”
“김은석 헌터님, 주소를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닌가요?”
안 실장과 황희준이 동시에 경악하듯 말을 뱉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윤꽃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길래 반응이 이렇지?”
안 실장이 노트북에서 은석이 말한 건물을 검색한 후 윤꽃샘을 향해 돌렸다.
사진 속 건물은 사람 손을 오랫동안 타지 않은 듯 넝쿨이 지저분하게 휘감고 있는, 5층짜리 폐건물이었다.
“낡아서 그런 건가?”
“아닙니다. 회장님. 이곳은 한국 3대 흉가로 불리는 곳입니다.”
“3대 흉가?”
“네, 오래전부터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는 곳입니다.”
“오호. 귀신이라고?”
“이곳에 사업을 하던 사람은 모두 도산하거나 사장과 직원이 자살 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습니다.”
“여기……. 너튜브 흉가 체험으로 꽤 유명한 곳이에요.”
황희준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BJ들이 들어가서 하룻밤도 못 견디고 나오는 곳이라, 3대 흉가 중에서도 최고로 무섭다고 말하는 곳이고요.”
들을수록 점점 심각해 보이는 건물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윤꽃샘의 표정은 밝아졌다. 건너편에서 그녀를 보던 은석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안 실장은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듯 말을 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길드에서 저런 흉가를 구입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그래서 건물의 위치나 규모에 비해 아주 저렴하지 않나요?”
“김은석 헌터님, 혹시 저희가 자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저런 건물을 살펴보고 계셨습니까?”
아직 안 실장은 윤꽃샘이 길드를 설립하라고 준 돈이 은석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몰랐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윤꽃샘이 입을 열었다.
“흠. 대장 말대로 위치는 좋아. 풍수를 볼 줄 모르는 내가 봐도 주변 지형도 멋지고.”
“그렇지요?”
은석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회장님! 저긴 귀신이 나오기로…….”
윤꽃샘이 손을 들어 안 실장의 말을 막았다.
“그거라면 대장이 알아서 할 거야. 그렇지, 대장?”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5층짜리 건물에 주차장도 넓고 주변 풍경도 좋고. 조금만 고치면 꽤 멋진 길드 건물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안 실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김은석 헌터님. 지금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대장이 알아서 할 거라니까. 안 실장은 저 건물 주인 찾아서 계약해.”
그룹의 회장다운 윤꽃샘의 단호한 결정.
안 실장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이내 꾹 다물었다. 은석이 그녀를 보며 슬쩍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슈가 될 만한 건물입니다.”
은석의 말에 안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이슈라고요?”
“길드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신입 길드가 한국 3대 흉가로 유명한 저 폐가를 길드 건물로 사용한다. 꽤 괜찮은 기삿거리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흥미롭다고 생각되는지 안 실장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석의 옆에 앉은 황희준도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다.
“제목 멋진데요. 형님. 그거 제가 쓰면 안 될까요?”
윤꽃샘이 황희준에게 물었다.
“쓰다니? 헌터님의 전직은 기자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황희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요. 제가 사이트를 하나 운영하는데, 거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올리고 있거든요.”
“오! 멋진 일을 하는군요. 어떤 사이트죠?”
윤꽃샘의 칭찬에 양 볼이 발그레해진 황희준.
“‘저승에서 온 헌터’라는…….”
윤꽃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뼉을 짝 쳤다.
“그 사이트가 헌터님이 운영하는 겁니까? 나도 자주 보고 있는 곳인데, 대장이 데려온 사람이라 역시 범상치가 않군요.”
그녀의 칭찬에 황희준이 으쓱한 듯 턱을 슬그머니 치켜들었다.
“전에 내가 말한 기사는?”
“아. 그거는 지금 자료 보강 중입니다. 기획 기사로 터트릴 예정이라, 더 확실하게 준비하려고요.”
황희준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런데 형님, 건물 기사는 언제 올리면 될까요?”
탁-
갑자기 노트북을 닫으며 안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건물 소유주를 찾아보겠습니다. 계약을 완료하면 두 분께 문자를 보내겠습니다.”
윤꽃샘에게 인사를 한 후 빠르게 사라지는 안 실장.
“행동력 최고네요.”
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납득만 한다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추진력이 있지. 깍쟁이처럼 보여도 우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저런 인재를 곁에 두지 않으시고…….”
윤꽃샘이 껄껄 웃었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하데스 길드의 주인이 아닌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건데 제대로 해야지.”
윤꽃샘이 직원을 부르자, 그들만을 위한 점심이 차려졌다.
* * *
다음 날, 안 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벌써 계약을 하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계약은 완료했고 그 흉가는 이제 하데스 길드의 건물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얼마에 팔던가요?”
“흉가라고 소문나서 주변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계약했습니다.”
무테안경을 추켜세우는 안 실장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안 실장님.”
“곧 기사가 올라가는 건가요?”
“네, 희준이가 기사는 모두 작성했고 계약했다는 문자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잠시 휴대폰 너머로 안 실장의 숨소리만 들렸다.
“……이게 과연 이슈가 될까요?”
은석이 낮게 웃었다.
“저도 모릅니다. 해 보면 알겠지요. 어차피 건물 리모델링은 해야 하는 거고, 이왕이면 관객까지 있으면 더 좋은 거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