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니거든요. 우리 파돌이 이름은 은돌이가 데리고 온 파란 눈의 고양이의 줄임말이에요.”
황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은돌. 은돌은 또 어떤 고양이인가요? 못 본 것 같은데.”
진지한 황희준의 모습에 은석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옆에서 은석을 쿡쿡 찌르던 엄마 역시 어느새 같이 웃고 있었다.
“아, 시끄러워. 나만 빼고 이렇게 재미있을 거야?”
김은희가 방에서 나와 걸어오고 있었다.
“아, 미안. 너무 시끄러웠어? 조용히 할게. 다시 들어가서 자.”
“배고파. 밥 먹을래. 다친 데도 없다는데 누워 있을 필요 있어?”
어느 정도 진정은 됐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김은희였다. 김은영이 일어나 밥을 가득 담아 왔다.
“거봐. 내가 찰스가 좋다고 했잖아. 파독 광부? 푸흡!”
“이씨, 뭐야. 너까지 왜 웃어? 도대체 뭐가 웃긴데?”
김은영 혼자만 붉으락푸르락했다. 정작 원인 제공자인 황희준은 여전히 그 이유를 몰라 은석 쪽으로 몸을 기대어 조용히 물어봤다.
“형님, 혹시 은돌이 고양이가 아니라 아버님 성함이신가요?”
벌컥-
문이 열리고 은석의 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은희야! 은희는 괜찮은 거니?”
어느새 은석의 아버지까지 작은 식탁에 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조용히 식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김은희의 사건 때문에 더 시끌벅적했다.
“빨리 먹어. 방으로 들어가자.”
식사를 마친 황희준이 은석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형님 가족분들은 정말 유쾌하신 것 같습니다.”
“유쾌하긴, 시끄러운 거지.”
“아닙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저희 가족은 각자 일에 바빠서 만나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너 누나 있어?”
“아니요.”
“그럼 말을 말아라. 누나 둘,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팔자에도 없던 누나 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마음 한편으론 든든하면서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형님을 무척 아끼시는 것 같았는데요.”
“아끼긴 아끼지. 방법이 좀 괴팍해서 그렇지.”
은석의 투정도 부러운 듯 황희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외롭고 심심하다 싶으면 놀러 와. 나 대신 동생 노릇 좀 해라.”
“정말 다시 놀러 와도 됩니까?”
“물론이지. 몇 번 오다 보면 다시는 오고 싶지 않겠지만.”
은석이 책상 위에 올려 둔 클리어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꽤 꼼꼼하게 조사했네. 고생했겠는데.”
“대한민국 최고 헌터인데 이상하게 자료가 많이 없더라고요.”
“각성은 2년 전에 했다. 그런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6개월이 지난 후부터였고.”
“네, 말 그대로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했었죠. 당시에 상당히 충격이었어요.”
은석은 대답 없이 듣기만 했다.
“특별한 능력은 없는데 오직 마력만으로 몬스터를 죽이는 헌터. 뭐랄까…….”
“드래곤볼에 나오는 에네르기파처럼?”
황희준이 손뼉을 쳤다.
“맞습니다. 딱 그겁니다. 형님도 인상이 깊으셨나 봅니다.”
그 역시도 윤혁의 등장은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은석이 각성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미친 재능을 가지고 나타난 헌터.
윤혁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은석이 그에게 처음 느낀 것은 좌절감이었다.
그가 죽도록 노력해도 절대 다다를 수 없어 보였던 그의 능력.
‘그때 너무 허무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지.’
은석이 윤혁의 파일을 다시 읽었다.
“행적이 없는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형님, 이상한 점이 또 있습니다.”
“이상한 점?”
황희준이 클리어 파일 제일 뒷장을 펼쳤다. 희미한 글자가 복사된 종이가 들어 있었다. 잘게 찢어진 것을 꼼꼼하게 이어 붙인 것이었다.
“헌터 자격증?”
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황희준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윤혁의 첫 헌터 자격증입니다.”
“첫 헌터 자격증이라니?”
“2년 전 처음 각성하고 센터에서 받은 겁니다.”
종이에 적혀 있는 사진과 내용은 분명 윤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등급이…….”
복사된 종이를 눈앞까지 가져와 몇 번이고 다시 쳐다봤다.
“F급?”
그걸 찾았다는 것이 스스로도 뿌듯한지 황희준은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최고 헌터인 윤혁의 등급이 F급이랍니다.”
“지금 윤혁의 등급이 뭐였지?”
그러고 보니, 윤혁의 각성 등급에 대해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무한 마력이니, 마력 통이니 하는 별명만 들었을 뿐이었다.
“음.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니까 당연히 S등급으로 알려져 있죠.”
윤혁의 정확한 등급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었다. 그저 최고로 강하니 S등급이겠거니 하는 것뿐.
“형님, 불산 길드가 일본 쪽과 관련된 게 많은 건 아시죠?”
황희준이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윤혁은 가끔 일본 던전 공략을 도와주러 갑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가 던전 안에서 싸우는 걸 본 사람이 없어요.”
“그래?”
“한국에서도 가끔 그렇다고 합니다. 던전 공략에 이상한 점이 많다고 하는데, 윤혁이니까 다들 쉬쉬하는 거죠.”
자신의 팀과 던전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를 레이드 내내 본 사람은 드물었다.
“레이드 도중에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가끔은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과 나가는 걸 본 사람이 없을 때도 있다고 합니다.”
황희준의 말대로였다.
은석이 윤혁에게 죽던 날도 그는 던전에 윤혁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
“던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윤혁 전용차가 서 있는 걸 본 사람은 있는데 던전 안에서 그를 본 사람은 없다. 뭔가 구린내가 나지 않습니까? 형님?”
황희준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불산 길드에서는 종종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실종자가 접수된다는 사실!”
탐정이라도 된 듯 눈빛을 반짝였다.
“형님, 설마 윤혁도 현기주처럼 연쇄 살인마일까요? 흔적도 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걸까요?”
‘아니, 그놈보다 더 악랄한 놈이야.’
윤혁이 죽인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던 은석.
그에 대한 자료를 읽어 보니 이제야 던전에서 그가 했던 행동들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작은 분명 F등급이었을 거야. 6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엄청난 마력을 가진 슈퍼 루키가 되어 나타난 거지. 목숨을 빼앗아 마력을 흡수한 거라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걸까?’
은석은 저승과의 계약이라는 특별한 기회를 통해 달라졌다.
각성할 때의 등급이 전부인 다른 헌터들과 달리 그는 계속 성장했고, 앞으로 더 강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은석의 추론이 사실이라면 윤혁 역시 계속 강해질 터였다.
‘윤혁은 어떻게 마력을 흡수하게 되었을까. 혹시 F등급이었지만 처음부터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윤혁에 대해 알게 되면 그의 능력에 대한 실마리가 풀릴 거라 생각했었다.
‘더 복잡해졌군.’
심각한 표정의 은석을 보며 황희준은 슬그머니 백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은석이 고개를 들었다.
“가려고?”
“네, 맛있는 저녁도 먹었고 윤혁에 대한 보고도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파일을 덮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너 왜 안 물어?”
“네? 뭘요?”
“내가 던전에서 나오면 기삿거리 하나 준다고 했잖아.”
“아…….”
황희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이 알아서 챙겨 주시겠거니 하고 있었습니다.”
머쓱해하는 그의 모습에 은석이 픽 웃었다.
앉으라는 말을 한 후에 서랍 제일 아래 칸을 열어 돌돌 말아 둔 종이 몇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풀어 봐.”
그것은 예전 이상균과 정종렬에게 용병 자리를 구하기 위해 들이밀었던 통장과 일기 복사본이었다.
“이게 뭔가요? 형님?”
“5년 전에 각성해서 용병으로만 일하셨던 분이야. 워낙 낮은 등급이라 용병으로 일하기도 쉽지 않았지.”
은석이 종이의 끝을 딱 쳤다.
“그래서 각성자 협회의 이상균과 정종렬이 제안을 했었지. 용병으로 들어가는 레이드 한 건당 수수료를 주기로.”
“저도 이런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용병분들의 밥줄과 바로 연결되는 일이라 조사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서는 사람도 없지. 심증은 차고 넘치지만, 물증을 찾기가 어려우니 조사는 매번 흐지부지 끝나고.”
그들의 요구를 견디다 못한 용병들이 신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용병들의 수수료가 이상균과 정종렬의 배만 불렸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다 한통속이니 늘 형식적인 조사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은석은 낮은 등급이라는 이유로 허울뿐인 조사에 몇 번이나 불려갔었다.
“혹시 이 자료 주신 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인터뷰를 진행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은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셨어. 던전 안에서.”
잠시 입을 꾹 다무는 황희준.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이분을 알게 되셨고, 이런 증거를 가지고 계신 건가요?”
“용병으로 들어갔을 때 몇 번 만났었는데, 이름도 똑같고 해서 친해졌어.”
“아, 그렇군요.”
“내가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시더라고. 내가 자세한 부분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궁금한 점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은석보다 이상균과 정종렬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열심히 일했던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상납했던 그였다.
윤혁에게 살해당했던 불산 길드의 레이드.
‘탑클래스 길드에 넣어 준다고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평소의 두 배로 수수료를 입금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기사 쓰다가 의심되거나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알겠습니다. 전부터 쓰고 싶었던 기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황희준이 일어서서 허리 굽혀 인사했다.
“형님이 주셨던 기사 외에는 지라시 기사만 올린다고 욕만 먹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폭로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희준이 말을 더하려는 순간.
따르릉-
은석은 황희준에게 잠시 손짓하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대장!”
휴대폰 너머 쩌렁쩌렁한 윤꽃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이번에도 전화 안 받으면 집으로 찾아가려고 했네.”
“그렇습니까? 그동안 제가 조금 바빴었습니다.”
“그래, 잘 알지. 지금 인터넷에서 대장 이야기로 아주 난리더라고.”
은석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봐, 대장. 이 정도는 한 방에 정리해 줄 수 있어. 그냥 내버려 두면 이상한 말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대부분 이야기의 시작은 가디언 길드 공략 실패 영상이었고, 이제는 누나를 구하러 온 훈남 헌터 동생도 추가되었다.
연예인처럼 대중과 소통하는 헌터들이 많았다. 그런데 수많은 이슈에도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은석.
윤꽃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관심을 표하는 상대방이 계속 아무 반응이 없으면 나중에는 미움으로 바뀌어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
“저러다가 금방 지쳐서 그만둘 겁니다.”
“그렇지. 대중들의 호기심은 성냥개비와 같으니까. 하지만 수많은 성냥개비가 모이게 되면 화재를 일으킬 수도 있다네.”
20대의 육체였지만 은석은 40년 넘게 살아온 중년의 영혼이었다.
하지만 일흔이 넘은 태황 그룹 회장, 윤꽃샘에게는 그마저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길드 운영진이 아니겠나. 그래서 말이지, 내일 점심때 만나지.”
“내일요?”
“그래, 길드 설립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도 나눠야 하고 내가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는 말에 은석이 황희준을 쳐다봤다.
“잘됐습니다. 저도 한 사람 데려가겠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그 헌터?”
“그렇습니다.”
“전화하길 잘했군. 그럼 내일 1시에 봅시다. 대장.”
백팩을 메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황희준에게 말했다.
“내일 오후 1시에 태황 호텔 앞에서 보자.”
“태황 호텔요? 거기 엄청 비싼 곳 아닙니까? 거긴 왜…….”
“가 보면 알아.”
* * *
다음 날 대문을 열고 나가자, 늘 그렇듯 황희준이 대기하고 있었다.
“형님!”
“뭐냐? 호텔 앞에서 만나자니까.”
“에이, 그럴 수야 있나요. 제가 형님을 모시고 가야지요.”
태황 호텔로 가는 내내 궁금함을 참지 못한 황희준의 질문이 멈추지 않았다.
“혹시 형님 생일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제가 형님 생일도 모르고 있었네요.”
“생일 아니다.”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일이라면 제가 케이크라도 하나 사서…….”
싹싹한 면은 좋았지만 늘 혼자 멋대로 상상하는 게 문제였다.
“희준아, 내가 왜 생일에 너랑 호텔에 가겠냐. 운전이나 해라.”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조용히 가지.”
“넵,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