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굳건한 믿음이라 해도 아주 작은 균열로 인해 빠르게 부서질 수 있었다.
천상의 힐러라고 칭송하던 용병들의 현기주.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에 대한 믿음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악귀 새끼야! 당장 들어가라고!”
악귀의 발악에 참지 못한 현기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목소리는 현기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악귀가 은석을 향해 애타게 검은 손을 내밀고 있던 터라, 현기주와 악귀의 음성이 겹쳐진 괴이한 목소리였다.
‘결국 악귀에게 몸을 빼앗기기 시작한 건가.’
현기주의 몸 전체에서 거무튀튀한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악귀를 끌어내기 위해 넣은 소량의 생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용병들의 눈에는 더 이상 악귀뿐만 아니라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서 있던 자들이 연기에 취해 쿨럭이며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느 때보다 강한 환각의 독.
그것은 이제 환각을 넘어서 사람의 목숨도 빼앗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용병들이 픽픽 쓰러졌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황한 자들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흩어지지 마십시오. 전부 제 뒤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은석의 말에 황희준이 재빨리 손을 들고 외쳤다.
“여기로, 여기로 오십시오.”
쓰러진 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용병들은 은석의 뒤편으로 도망쳤다.
“쉴드.”
은석이 그들 전부를 감쌀 수 있는 넓은 보호막을 쳤다.
오직 은석만 맨몸으로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현기주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형님! 형님은 왜 밖에 계십니까? 위험합니다!!”
보호막 안에서 황희준이 소리쳤다. 은석에게 환각에 대한 방어력이 있다는 것을 황희준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런 은석을 보며 현기주가 기괴한 웃음을 뱉었다.
“킥킥, 오만하구나. 감히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은석을 향해 손을 뻗어내자, 짙은 회색의 연기가 빠르게 날아가 그의 몸을 감쌌다.
“쿨럭.”
연기를 들이마신 은석이 기침을 내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형님! 형님!”
황희준이 보호막에 바싹 붙어 은석을 애타게 불렀다.
현기주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은 이제 필요 없다. 너만 죽이면 완벽해지는 거야.”
동시에 악귀의 말이 이어졌다.
“현기주! 저놈의 생력은 전부 나의 것이다. 내가 생력을 다 먹을 때까지 목숨을 끊지 마라.”
“명령하지 마! 이 더러운 주술사 놈아. 이제 네놈의 명령 따위 듣지 않을 것이다.”
악귀에게 몸을 빼앗기기 직전이라, 서로 몸을 차지하기 위해 악을 쓰며 괴성을 질러 댔다.
용병들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낯선 현기주의 모습에 얼어붙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오직 황희준만이 보호막을 부수기 위해 미친 듯이 두드려 대고 있었다.
그때, 윤지은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비켜 봐. 내가 부숴 볼 테니까.”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다시 있는 힘껏 달려온 윤지은이 어깨를 돌려 보호막을 강하게 쳤다.
쾅-
강한 충격에 순간 보호막 전체가 찌르르 울렸다. 쓰러져 있던 은석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미치겠네. 뭘 하는 거야. 쉴드를 넓게 펼쳐서 저렇게 공격하면 깨지는데. 아! 진짜 저것들이.’
그때, 악귀와 악다구니를 쓰던 현기주가 은석을 향해 다가왔다.
은석이 연신 기침을 뱉어 내며 힘겨운 목소리로 현기주를 보며 물었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당신은 최고의 힐러가 아닙니까?”
“최고의 힐러. 맞지, 난 최고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데 말이야……. 아름다운 얼굴이 죽음에 비틀릴 때, 정말 짜릿하단 말이야.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지.”
은석은 가슴이 답답한 척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이런 미친, 도대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겁니까!”
아름다운 은석이 괴롭게 죽어 가는 모습에 취한 현기주가 그동안 자신이 죽인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보호막 뒤쪽에 수많은 용병이 서 있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부터 사람을 죽였고,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에 대해 즐거운 듯 떠벌렸다.
“내가 널 선택한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현기주가 쿨럭거리는 은석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넌 정말 아름다워. 게다가 강하기까지 하지. 그동안 찾아왔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놈이야. 지금까지의 살인은 모두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현기주의 가슴에서 갑자기 악귀 김헌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생력! 생력을 먹어야 해. 현기주! 내 생력!”
악귀가 은석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현기주가 왼팔로 놈을 막았다.
“이제 네놈은 필요 없어!”
동시에 벨트에 꽂아 둔 단검을 꺼냈다.
웅크리고 있는 은석을 밀어 똑바로 눕혔다. 칼을 들고 그의 목에 꽂으려는 순간.
덥석-
누워 있던 은석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살인 자백, 잘 들었습니다. 현기주 헌터님.”
“뭐야? 중독됐을 텐데 어떻게!?”
멀쩡한 은석을 보고 당황한 현기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은석은 대답 대신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뚝-
현기주의 오른쪽 손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짧고 강하게 들렸다.
“으아악!”
완벽하게 부러져 덜렁거리는 손목을 잡고 바닥에 뒹굴었다.
은석이 자리에서 일어서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주머니에서 작은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음성 녹음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였다.
“자, 자백은 여기 녹음이 다 되었고.”
뒤를 돌아 보호막 안에 있는 용병들을 쳐다봤다.
“증인은 차고 넘쳐나니, 완벽하네.”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고 바닥을 구르는 현기주를 냉랭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많이 아파? 고작 손목 하나 부러졌으면서 엄살은. 네놈한테 죽은 자들은 그것보다 수천 배는 더 아팠어. 이 새끼야.”
은석이 다리를 들어 현기주의 갈비뼈를 세게 찼다.
“커억.”
이어지는 강한 고통에 현기주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악귀 김헌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현기주의 몸은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놈을 보며 은석은 혀를 찼다.
“창왕, 나와.”
저승 훈련장에서 은석의 부름만 기다리던 창왕.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석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기주는 죽이면 안 돼. 악귀만 소멸시켜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같이 죽이면 안 됩니까? 저놈도 살인마가 아닙니까!”
“인간은 인간에게 벌을 받아야지. 악귀는 저승 소관이니 우리가 소멸시킬 수 있지만 말이야.”
창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현기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낌새를 느낀 악귀가 빠르게 몸 안으로 숨어 버렸다.
“어딜.”
현기주의 몸 안으로 손을 집어넣다가 빼낸 그의 손아귀에 악귀의 상투가 잡혀 있었다.
팔에 힘을 주자, 악귀 김헌의 투명한 몸이 현기주의 몸 안에서 쑥 빠져나왔다.
철썩- 철썩-
한 손으로 악귀의 상투를 그러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악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계속되는 따귀에 정신이 혼미해진 악귀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기 시작했지만, 창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은석만 들을 수 있는 따귀 소리가 계속되었다.
“후…….”
축 늘어진 악귀를 바닥에 내던지고 창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로 충분하겠어? 널 죽인 놈인데, 더 때려.”
창왕이 놀란 눈으로 은석을 쳐다봤다.
“제가 이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은석이 피식 웃었다.
“야, 아무리 피붙이 같은 동생이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말이야. 자기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죽어서까지 복수하겠다고 구천을 떠돌지 않아.”
은석의 말이 맞았다.
후배의 죽음을 파헤치던 중 그는 현기주와 김헌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알아. 네 복수만을 위해서 이승에 남은 게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너를 팀원으로 받아들인 거지.”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신을 차린 악귀가 바닥을 기어 도망가고 있었다.
창왕이 긴 창을 날려 악귀의 등에 꽂았다.
“크악!”
창에 꽂혀 버둥거리는 악귀를 한 발로 지그시 밟으며 창을 뽑아냈다.
그리고 다시 찌르기를 수십 번.
“어휴, 너무 잔인해. 급소만 피해서 찌르는 거 봐라.”
은석이 너스레를 떨며 손뼉을 쳤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똑바로 선 창왕이 창을 치켜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낫을 휘두르는 사신 같았다.
슥-
빠르게 휘두른 날에 악귀의 목이 떨어졌다.
[중급 악귀 김헌이 소멸하였습니다.]
악귀는 사라졌고 현기주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쉴드 해제.”
보호막을 없애자 황희준이 득달같이 달려와 은석을 안으려고 했다.
빠르게 손을 내밀어 황희준의 머리를 쓱 밀어냈다.
“너무하십니다. 형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혼자서 싸우시다니요.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당연히 못 믿지.’
라고 말하고 싶었다.
“위험하잖아. 현기주가 보통 각성자도 아니고.”
갑자기 황희준이 눈물을 글썽였다.
“형님, 저를 이렇게 아끼신다니……. 저는, 정말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윤지은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르렁-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삼각 코뿔소의 소리가 들려왔다.
언덕 위에서 용병을 내려다보며 흥분한 삼각 코뿔소가 앞발로 땅을 짓이기며 콧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형님! 삼각 코뿔소 색깔이 다릅니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놈을 보고 황희준이 외쳤다.
“백색의 삼각 코뿔소, 이 던전의 보스다.”
용병들은 던전 보스라는 말에 웅성거렸다.
“생존 퀘스트가 클리어될 때까지, 그동안 못한 사냥이나 하다가 나가시죠?”
은석이 씩 웃으며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용병들을 향해 말했다.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들 무기를 꺼내들고 삼각 코뿔소를 향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 * *
“김은석 헌터님, 정말 괜찮습니다. 저희가 이걸 가져간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저는 마나석으로 충분합니다. 이번 던전에서 아무 소득이 없지 않으십니까.”
“소득이 없다니요. 목숨 값이 가장 비싼 거지요.”
은석은 백색의 삼각 코뿔소의 마나석을 제외한 나머지를 용병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
목숨을 구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한사코 마다하는 그들과 잠깐 실랑이가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정말 제가 가져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져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구해 주신 보답을 해야 하는 건데요. 정말 고맙습니다.”
황희준이 은석에게 물었다.
“형님, 이놈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의 옆에는 혼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의 현기주가 서 있었다.
오랫동안 육체를 공유했던 악귀가 사라졌다.
본인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이미 꽤 많은 부분을 악귀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악귀의 환각 독에 오랫동안 중독된 상태라 현기주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협회와 경찰에는 연락했지?”
“네, 곧 도착할 겁니다.”
은석이 정욱을 불러 현기주를 넘겼다.
“경찰이 오면 그의 죄를 낱낱이 알려 주십시오. 이자의 처벌은 정욱 헌터님께 달렸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그에게 넘겨 주었다.
“이것은 현기주가 살인 자백을 하는 음성입니다. 증거로 제출하시고 혹시 증인이 필요하다면 저분들이 도와주실 겁니다.”
증인으로 나서겠다는 용병 몇 명이 비장한 눈빛을 하고 서 있었다.
정욱이 허공만 바라보며 멍청히 서 있는 현기주의 뒷덜미를 잡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한을 모두 풀어 주겠습니다.”
“그런데, 헌터님.”
정욱은 은석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현기주에게 살인할 사람을 찾아 줬으니 저도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지요.”
이전과 달리 혈색이 도는 자신의 다리를 툭툭 쳤다.
“김은석 헌터님 덕분에 다리도 완전히 고쳤고. 그동안 열심히 저축해 놔서 가족들 걱정도 덜었습니다.”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정욱이 은석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조사가 시작되면 많이 힘드실 겁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게는 던전 안이 지옥이었습니다.”
경찰차에 이어, 현기주의 살인 소식을 먼저 접한 발 빠른 기자들도 속속 도착해 질문을 퍼부었다.
은석은 황희준과 함께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 * *
S급 힐러가 희대의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각성자 협회에서 최대한 막고 있어서인지, 좀처럼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새벽, 은석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어폰으로 흘러 들려오는 천상의 힐러 현기주의 구속 속보.
다소 흥분한 듯한 아나운서가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인 피해자들도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에 도착한 은석이 TV를 켰다.
경찰에게 양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현기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영혼이 사라진 듯한 멍한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힘들겠군.’
현기주의 뒤에 모자를 푹 눌러쓴 정욱이 따라 나왔다.
‘정욱 헌터……. 현기주의 여죄를 모두 밝힐 수 있게 도와줬으니 정상 참작은 되겠지.’
띠링-
은석이 휴대폰을 켜 문자를 확인했다.
[최민주입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용기를 내 경찰서에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유성찬 헌터님의 일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저는…….]
‘창왕.’
‘네, 대장.’
‘최 간호사님이 곧 재건 수술을 받으신단다.’
창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장,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