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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힐러는 네크로맨서-47화 (47/226)

47화

‘정욱 헌터가 현기주의 힐 덕분에 걷는단 말이지.’

자러 간다며 언덕을 오르던 은석은 현기주의 숙소 밖에 서 있었다.

정욱 헌터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는 현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를 찾아오겠군.’

은석은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절뚝이며 숙소를 나오는 정욱. 완전히 뒤틀렸던 다리의 고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빨을 바득 깨물었다.

‘내가 다리만 아니었어도……!’

정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걷게 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현기주에게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살아왔다.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걷는 걸 선택한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언젠가, 기필코 내 손으로 꼭 너를 죽일 것이다.’

그는 은석을 찾아 용병들 사이를 힘겹게 걸어 다녔다.

누군가 그에게 은석이 언덕 너머로 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삼각 코뿔소를 혼자서 죽이는 자다. 힐만 쓸 수 있는 현기주, 네놈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정욱의 눈에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은석이 보였다.

“저기, 김은석 헌터님?”

그가 조심스레 은석에게 말을 걸었다. 눈을 뜬 은석이 놀란 듯한 표정으로 정욱 헌터를 바라봤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은 쉰다고 한 거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저기, 현기주 헌터님께서 김은석 헌터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셔서요.”

“저를요? 왜요?”

“아, 그게……. 김은석 헌터님 덕분에 삼각 코뿔소도 잡았고…….”

“그거야. 당연히 잡은 놈이 임자니까.”

은석이 순순히 따라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를 말해야 하지…….’

정욱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은석의 눈에 정욱 헌터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는 현기주의 힐이 보였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걸어오시는 걸 보니까 다리를 다치신 것 같던데.”

갑작스러운 은석의 질문에 당황하는 정욱.

“아닙니다. 걸어오다가 살짝 발목을 삔 것뿐입니다.”

반쯤 누워 있던 은석이 몸을 일으켰다.

“저도 힐러입니다. 제가 고쳐 드릴 테니 앉아 보십시오.”

정욱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겨우 이런 것 가지고.”

“겨우라뇨. 인대 늘어난 거, 그냥 놔두면 계속 삡니다. 사양 마시고 앉으세요. 돈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계속되는 은석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삐었다고 가리키는 발목 위에 은석이 손을 올렸다.

화악-

그의 손에서 나온 환한 빛의 생력이 정욱의 발목으로 흘러 들어갔다.

“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힐이었다.

현기주 덕분에 걸을 수는 있었지만, 이상하게 늘 다리가 무겁고 아팠는데…….

정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석을 쳐다봤다.

“정욱 헌터님, 그동안 다리가 많이 불편하셨네요. 발목만 치료했는데 예전과 느낌이 전혀 다르죠?”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언제부터 걷지 못하셨습니까?”

느닷없는 은석의 질문에 정욱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껌뻑거렸다.

“그, 그걸 어떻게…….”

“힐러니까요. 이렇게 만져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거짓이었으나, 정욱은 믿는 눈치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오므렸다.

은석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거죠? 혹시 현기주 헌터의 힐 덕분인가요?”

그 사실은 현기주와 자신만 아는 것이기에 당황한 정욱은 침만 꿀꺽 삼켰다.

“다시 걷기는 했지만, 음. 그동안 고통이 심하셨을 것 같은데요.”

은석이 조금 더 생력을 넣자, 순간 다리를 휘감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정욱이 고개를 번쩍 들어 소리쳤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헌터님!!”

은석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헌터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죽이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정욱이 바닥에 엎으려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닙니다!”

다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늘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다리의 생생한 감각에 정욱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리 때문이었습니다.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도 있었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은석이 엎드려 있는 정욱의 양팔을 잡아 일으켰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제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은석의 말이 그에게 구원처럼 들려왔다. 눈물을 닦으며 현기주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길드에 들어온 현기주와 레이드에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추락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힘드셨겠습니다.”

“어느 날 현기주가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걷게 해 줄 테니 자기 일을 맡아 주겠냐면서.”

정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딸린 식구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평생 침대에 누워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욱 헌터님은 사람을 죽였나요?”

은석의 질문에 정욱이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현기주가 원하는 용병을 그에게 데려다줬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말하고 보니……. 제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던전에 들어올 때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왜 저에게 살려 달라고 하시는 건가요?”

은석의 생력을 받는 순간 정욱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현기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는 남자.

“정욱 헌터님, 그렇다면 혹시 현기주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서 밝히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동안 그놈이 죽인 용병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습니다. 언젠가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정욱은 그동안 현기주의 살인을 도왔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다. 드디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석이 울고 있는 정욱의 양쪽 발목을 잡았다.

오랫동안 그의 몸 안에서 맴돌고 있는 현기주의 힐을 없애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욱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다리의 감각을 느끼며 연신 은석에게 고개를 숙였다.

* * *

정욱이 숙소에서 나간 뒤, 현기주는 계속 방을 서성거렸다.

저승 시스템으로 던전 클리어 시간을 알 수 있는 은석과 달리, 다른 헌터들은 알 수 없는 상황.

내일 당장이라도 던전이 클리어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현기주는 마음이 급했다.

최대한 빨리 김은석을 죽여야 했다.

“어떻게 하지? 정욱이 김은석을 데려올 수 있을까?”

그 역시 삼각 코뿔소를 죽이는 은석을 보았다.

던전 안에 있는 용병이 전부 덤벼도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전부 중독시켜 버려?”

현기주의 혼잣말에 악귀 김헌이 그의 왼쪽 어깨 위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나는 찬성이다. 현기주. 질질 끌 필요 없이 한꺼번에 없애 버려. 나도 오랜만에 배불리 먹어 보고 싶구나.”

현기주는 대답 없이 손톱 끝만 씹어 댔다. 악귀 김헌이 그런 현기주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소심한 새끼. 빨리 정기를 섭취해야지 이놈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데.’

더 이상 육체 공유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악귀 김헌의 목표는 현기주의 몸을 온전히 차지하는 것이었다.

지옥을 탈출해 이승을 떠돌던 김헌의 코를 자극하던 피 냄새와 살인에 대한 강한 열망.

피의 흔적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 만난 자가 바로 현기주였다.

더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김헌의 유혹에 손을 잡은 그와 육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현기주가 살인의 무대로 이용한 곳이 바로 용병들과의 레이드.

어차피 던전에서 죽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레벨이 낮은 용병들의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현기주는 치료해 준다는 명목으로 용병들의 몸 안에 힐과 함께 김헌의 환각 독을 넣었다.

잠이 들면 어김없이 김헌이 그들의 꿈속에 나타나 정기를 빼앗았고, 현기주는 아름다운 용모의 용병들을 손쉽게 죽였다.

그렇게 서로의 욕구를 채워 왔지만 이제 김헌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S급 힐러, 현기주가 될 것이다. 이제 곧 이놈의 몸은 내 것이야.’

김은석을 데려오지 못할까 조바심 내는 현기주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 *

“아, 어제 먹은 삼각 코뿔소 고기 맛이 벌써 생각이 안 나네.”

“이봐. 그렇게 먹었으면서 무슨 생각이 안 난다는 거야.”

“원래 맛있는 것일수록 매일 먹어야 기억에 팍 박히는 거야. 기억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

던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전부 한자리에 모여 각자 준비해 온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던전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먹을 수 있겠지?”

“생존 퀘스트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지금 당장 레이드가 끝날 수도 있고.”

고기 맛이 생각 안 난다고 말하던 용병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정욱은 계속 은석의 옆에 앉아 있었다. 황희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석에게 귓속말했다.

“형님, 왜 현기주 헌터의 비서가 여기 있는 겁니까?”

하지만 은석은 대답이 없었고, 황희준은 괜히 머쓱해서 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의 눈에 멀리서 걸어오는 현기주가 보였다.

“형님, 현기주 헌터가 오는데요.”

기다렸다는 듯 은석과 정욱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현기주는 다가오지 않은 채 멀리 서서 정욱을 향해 오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일어서지 않고 다시 고개를 푹 숙여 그를 외면했다.

그 모습에 현기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그의 곁으로 걸어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정욱 헌터님, 우리 잠깐 볼까요?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건가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굳게 마음먹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자, 정욱은 저절로 어깨를 움찔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은석을 바라봤다.

은석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빵만 먹고 있었다.

제 할 일을 하라는 압박감이 전해졌다. 그 모습에 정욱은 다짐한 듯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안 보이십니까? 지금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현기주 헌터님의 비서로 일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갑작스러운 정욱의 선언에 주변 사람들이 놀라 쳐다봤다.

은석만 제외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정욱의 말에 현기주 역시 당황한 듯 금방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의 손에서 보이지 않는 짙은 연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그걸로 협박 못 할 텐데.’

은석이 현기주의 손을 보며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평소와 달리 정욱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소리를 지르지 않는 거야? 이걸 참고 있다고?’

그가 더 많은 연기를 정욱의 다리를 향해 내보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답답함에 현기주가 정욱을 잡으려는 순간.

은석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헌터님, 이렇게 오셨으니 저희와 같이 식사나 하시죠?”

잡은 손 안으로 약간의 생력을 집어넣었다.

“허억!”

몸 안에 생력이 들어오자, 현기주가 허리를 굽히며 신음을 내뱉었다.

“헌터님, 괜찮으십니까?”

근처에 앉아 있던 용병이 빠르게 일어나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 순간, 현기주가 고개를 휙 들었다.

“으악!”

그의 얼굴을 본 용병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용병이 본 것은 현기주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비집고 나온 악귀 김헌의 모습이었다.

은석의 생력을 제대로 맛본 악귀가 참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뭐야! 저게 뭐야? 현기주 맞아?”

“으악! 괴, 괴물!!”

근처에서 현기주의 얼굴을 본 용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기괴하게 변한 현기주의 모습에 용병들이 물러서자, 때를 기다린 정욱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것이 현기주의 진짜 모습입니다!! 저놈은 악마입니다. 현기주는 지금까지 던전 안에서 용병들을 죽여 온 살인마입니다!!”

현기주의 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괴성을 내지르는 악귀 김헌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건 현기주의 살인을 도운 악마입니다.”

믿기 힘든 정욱의 말에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현기주 헌터님은 저를 고쳐 주셨는데…….”

“아닙니다! 여러분을 치료해 주신 분은 저놈이 아니라 바로 김은석 헌터님이십니다!”

은석의 이름이 나오자,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이 본 은석은 시커먼 인영을 소환해 삼각 코뿔소를 공격하던 강력한 네크로맨서였기 때문이었다.

네크로맨서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을까. 죽은 시체를 일으키는 것이면 몰라도…….

“거짓말하지 마라! 천상의 힐러님이 살인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

정욱의 말을 믿지 못하는 용병이 고함을 쳤다. 멱살이라도 잡을 듯 다가오는 그를, 다른 용병이 막아 세웠다.

“아니, 잠깐만. 생각들 해 봐. 현기주 레이드에 들어갔다가 죽은 용병의 수가 다른 곳보다 많다는 건 다들 알잖아.”

“그래, 내 친구 한 놈도 던전 안에서 죽었어.”

“나도! 나도 알고 있어. 현기주 레이드에 들어간다고 좋아했었는데 나온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놈을 알아.”

“당연히 던전은 위험하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부 현기주가 죽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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