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래서, 현기주의 정체는 알아냈고?’
‘네, 현기주는 각성 전에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였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병원은 폐쇄적인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 간호사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 *
간호사들에 대한 복지와 임금이 후했던 현기주.
모두 병원을 개원할 때 입사한 간호사들이었다. 그중에 단 한 명, 최 간호사라는 사람만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안 나오시더라고요. 현 선생님도 별말씀 안 하셨어요. 퇴사 처리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죠.”
유성찬은 수소문 끝에 최 간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자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늘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후배 주승이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딱 한 번만이에요.”
사람들이 찾지 않는 변두리의 오래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유성찬.
딸랑-
문에 달린 녹슨 벨이 울리자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모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를 향해 걸어왔다.
“유성찬 헌터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간호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죽은 후배분이 불쌍해서 나온 거예요. 그쪽 때문이 아니라.”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양손으로 감싸 쥐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기주는 꽤 유능한 의사였어요. 지금 그를 천상의 힐러라고 칭송한다죠? 의사일 때도 비슷했어요.”
여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성찬은 잠자코 그녀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병원에 두고 나온 게 있었어요. 새벽이었지만 그날부터 휴가라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어요.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현기주가 거기에 있었나요?”
“네, 물건을 찾고 병원을 나오려는데, 수술실에 불이 켜져 있더라고요. 그걸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유성찬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뭘 보신 거죠?”
“현기주가, 여자를 죽이고 있는 장면요.”
“네?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고요!?”
현기주, 그는 아름다운 것에 살의를 느끼는 살인마였다.
낮에는 사람 좋은 성형외과 의사.
밤에는 수술대 위에서 수많은 여자를 난도질해 죽이는 연쇄 살인범.
“그런데, 제가 본 건 현기주가 살인하는 장면만은 아니었어요.”
“혹시 다른 사람도 있었나요?”
“아니요. 사람은 현기주뿐이었지만…….”
최 간호사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게 있었어요. 현기주의 몸 안에.”
여자가 선글라스 너머로 놀란 표정의 유성찬을 힐끗 살폈다.
“믿지 않으시겠죠. 당연해요. 저도 처음에는 보고도 못 믿었으니까요.”
유성찬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 후배의 죽음은 무척 이상했습니다. 최 간호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평일 낮, 변두리의 낡은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최 간호사는 상체를 숙여 유성찬 가까이 다가왔다.
마스크를 썼지만 입을 가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기주의 몸 안에 악마가 들어 있어요. 현기주가 분명 김헌이라고 부르는 걸 똑똑히 들었거든요. 둘 다 살인을 즐기고 있었어요.”
악마라는 최 간호사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최 간호사가 마스크 한쪽을 벗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사람을 이렇게 만들죠. 그날 무시하고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최 간호사의 입술이 없었다.
잇몸과 이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유성찬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이 미친 새끼가…….”
다시 마스크를 쓰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예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어요. 악마는 저를 죽이라고 했지만 현기주는 제가 아름답지 않아서 죽이기 싫다고 했어요. 대신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도록 이렇게 만들었고요.”
마실 수 없는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재건 수술을 받으면 안 되나요?”
“수술 받으면 지금보다는 낫겠죠. 그런데 겁이 나서요. 병원에 가서 수술대에 누워 있으면 왠지 현기주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섭더라고요.”
최 간호사는 결국 헤어질 때까지 한 모금의 커피도 마시지 못했다.
* * *
‘현기주는 각성 전부터 연쇄 살인마였다 이 말이지?’
‘맞습니다.’
‘악귀 김헌과 육체를 공유한 덕분에 그렇게 더러운 힐을 썼다 이거네.’
‘각성은 빙의된 후인지, 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각성한 후일 거야.’
‘어떻게 아십니까?’
‘악귀는 마력에 끌리거든. 김헌은 현기주의 치료를 통해 용병들의 몸 안에 들어가 정기를 흡수해서 점점 강해졌어. 그리고 현기주는 그 환각 독 덕분에 아름다운 여자 헌터들을 더 쉽게 죽일 수 있었을 거고.’
‘그렇군요. 용병들을 대상으로 각자의 목적을 이루고 있었네요.’
‘그런 셈이지.’
그때, 현기주가 내려다보고 있는 헌터가 몸을 기괴하게 비틀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듯 컥컥거렸다.
현기주는 무언가를 먹는 듯 연신 침을 삼키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아니라 악귀 김헌의 행동이었다.
누워 있는 용병의 정기를 빼앗고 있는 놈의 모습을, 은석이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 제가 지금 나가서 놈을 죽여 버리겠습니다.’
창왕이 계속 소환을 해 달라고 은석에게 졸랐다.
‘안 돼.’
‘왜 안 됩니까? 충분히 죽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김헌은 악귀라고는 하나 원래 힘이 없는 놈이었다. 현기주 역시 전투 능력이 부족한 힐러.
은석이 마음만 먹으면 둘 다 한칼에 죽일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잖아. 현기주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그건…….’
‘거짓이든 뭐든, 현기주는 지금 칭송받는 힐러다. 그리고 이곳은 그의 레이드야. 현기주가 수많은 용병 중에 몇 명을 몰래 죽이는 것과는 달라.’
창왕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보자. 어차피 생존 퀘스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 저놈이 더 급할 거다.’
던전에 들어온 후 현기주는 아직 한 번의 살인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주술사! 이제 나갈 거야! 그만 들락거리고 안으로 들어와.”
용병의 정기를 빨아 먹는 동안 수없이 튀어나오기를 반복했던 김헌.
만족스러운 듯 쩝쩝 소리와 함께 현기주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숨은 건 완벽하네.’
정보탐색으로 살폈지만, 악귀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현기주가 신경질적으로 천막을 열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욱 헌터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기를 빼앗긴 용병에게 다가갔다.
창왕의 말처럼 얼굴이 검게 변했고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우리 힐러님, 내일 아침에 더 화나시게 만들어 볼까.”
은석이 중독된 용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 * *
닷새 동안의 생존 퀘스트.
3일째 아침이 밝았다.
용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도착한 현기주. 살인 금단 증상에 분노가 극에 달한 듯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현기주 헌터님.”
그와 달리 용병들의 컨디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졌다.
이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을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눈을 치켜뜨며 걸어오던 현기주가 윤지은을 대놓고 노려봤다.
이번 레이드의 살해 대상으로 점찍어 놓은 윤지은.
그의 계획대로라면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야 했다.
그 대신 정욱 헌터의 얼굴에 상처가 늘어났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은석을 쳐다보는 현기주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보탐색.’
[‘김은석을 죽이고 싶어. 오늘 밤, 아니 내일 밤에 죽일까? 윤지은 따위 필요 없어. 김은석이면 완벽해’]
그의 미친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현기주가 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황희준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형님, 지금 현기주 헌터가 싸움 걸고 있는 게 맞죠? 왜 형님을 저렇게 꼬나보죠? 확 마!”
“내가 좀 잘생겼잖아. 질투 나는 모양이지.”
“아, 형님.”
그의 대답이 어이없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던 황희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욱 헌터가 용병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은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어제 다친 분들이 많습니다. 삼각 코뿔소가 다시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 경계는 늦추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갈 준비를 마친 용병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왜 쉬는 겁니까? 아무리 버티기만 하면 되는 생존 퀘스트라지만 사냥을 해야 수익이 있을 거 아닙니까?”
마나석뿐만 아니라 가죽과 뼈, 고기까지. 버릴 것 하나 없는 삼각 코뿔소였다.
길드를 따라온 것이라면 이런 휴식을 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잡은 만큼 본인이 모두 가져갈 수 있는 던전.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는 것이 이득이었다.
“헌터님들의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어제 치료받고 쉬는 다른 헌터님들도…….”
“저희는 다 나았습니다.”
뒤쪽에 서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제 현기주 헌터님께 치료받고 아주 쌩쌩합니다.”
와아-!
앞으로 나서는 용병을 보며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역시 천상의 힐러라며 손뼉 치는 이도 있었다.
단 한 명, 현기주의 얼굴만 점점 창백해졌다.
‘뭐? 치료가 다 되었다고? 어제는 더 강하게 중독시켰는데.’
당혹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헌터님 덕분에 몬스터 따위 수십 마리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용병.
그는 어제 악귀 김헌에게 정기를 빼앗긴 자였다.
현기주의 인상이 마구 구겨졌다.
분위기에 휩쓸린 용병들은 빨리 사냥을 하러 가자며 아우성쳤다.
“그만!!!”
갑자기 현기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라고! 이 거지 같은 새끼들아!!”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들이 알고 있던 현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황한 표정의 정욱 헌터가 현기주와 용병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현, 현기주 헌터님은 치료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몹시 피곤하신 상태입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현기주는 아무 말도 없이 주먹만 부들거렸다.
“그래서 오늘은 사냥 없이 쉬자고 하신 겁니다…….”
정욱 헌터가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맞아. 힘드셨을 거야. 삼각 코뿔소가 쉬운 놈은 아니라 한두 명 다친 게 아니니…….”
“그래, 우리가 너무 우리 생각만 했네. 아무리 S급이라도 휴식은 해야지.”
“헌터님! 저희가 죄송합니다. 오늘은 쉬십시오.”
현기주는 대답 없이 그의 숙소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정욱 헌터가 다급하게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는 뭘 해야 하지?”
“삼각 코뿔소 나와서 돈 좀 만지나 했더니만, 이게 뭐야. 하루를 통으로 날려 버리잖아.”
사라진 현기주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형님, 저는 나가기 전에 고기를 더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무룩해진 황희준이 말했다.
지난밤 단검을 날카롭게 갈아 놓은 황희준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저도요, 오빠. 저도 고기를 더 먹고 싶어요.”
이제는 당연한 듯 황희준과 함께 은석을 따라다니는 윤지은.
“먹고 싶으면 둘이 가서 잡아먹어. 나는 좀 잘란다.”
은석이 기지개를 켜며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 * *
“이번 던전은 왜 이런 거야. 어? 대답해 봐.”
정욱 헌터가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네놈이 윤지은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정말, 정말 없었습니다. 계속 찾아봤지만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빌어먹을 저 용병들은 왜 멀쩡한 걸까? 어!?”
정욱 헌터가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으아악! 빌어먹을!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현기주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정욱 헌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엎으려 있던 정욱 헌터의 다리가 바깥으로 휙 돌아갔다. 그는 엄청난 고통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네놈이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건 다 내 덕이라는 거 알지?”
“네, 네…….”
“그러니까 잘하란 말이야. 시간이 얼마 없어. 내가 빈손으로 던전을 나간 적이 있어?”
“없, 습니다.”
“난 오늘 김은석을 죽이고 싶어.”
예상하지 못한 현기주의 말에 정욱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윤지은이, 아니라요?”
“그래,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김은석이 가지고 있어. 아름다움과 강함. 그러니까 그 남자만 있으면 충분해.”
이미 삼각 코뿔소와 싸우는 은석을 본 정욱 헌터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는 독특한 소환수를 부리는 네크로맨서였다.
‘김은석을 죽이겠다고?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예전 정욱은 던전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었다.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은 현기주의 힐 덕분이었다.
만약에 그가 마음을 바꾸면 정욱은 다시 평생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늘 그래 왔듯이 정욱을 괴롭히는 것으로 현기주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곧 비정상적으로 휘어진 다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