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이빨을 꽉 깨물며 단검을 그러쥐었다.
삼각 코뿔소를 죽일 때 창을 찔러 넣었던 턱 아래에서 붉은 점이 깜빡였다.
푹-
과감하게 단검을 찔렀다.
그대로 붉은 선을 따라 턱 아래에서 배 쪽으로 그어 내렸다.
질기기로 유명하다는 삼각 코뿔소의 가죽이 마치 얇은 종이처럼 쉽게 잘려 나갔다.
“뭐, 뭐야! 저 새끼!”
황희준을 비웃던 용병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몸통 아랫부분의 가죽을 잘라 내자, 이번에는 꼬리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일직선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모양이었다.
배를 가를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선을 따라 천천히 그었다.
조금 전 자신 없어 머뭇거리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오직 삼각 코뿔소의 몸 위에 나타난 붉은 선에만 집중하는 황희준.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은석이 싱긋 웃었다.
꼬리에서 시작해 뿔까지 그어 내렸다. 그러자 옷이 벗겨지듯 삼각 코뿔소의 갈색 가죽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자신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쳐다봤다.
“고기 해체해야지. 구워 먹기 좋게 부위별로 자르고, 심장은 몸통 중앙에 있다.”
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죽이 벗겨진 삼각 코뿔소를 내려다보며 다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등 중앙에 칼을 찔러 넣고 아래로 그어 내렸다. 순식간에 지방과 근육이 갈라졌고 장기가 드러났다.
은석의 말대로 몸통 중심에 삼각 코뿔소의 거대한 심장이 있었다.
그 순간, 용병들의 눈이 모두 은석을 향했다.
처음에는 어눌해 보이기만 했던 황희준의 해체 실력에 놀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뒤에 서서 리드하고 있는 은석이 보였다.
심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지키는 저 검은 인영까지.
은석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이고, 허리야.”
어느새 삼각 코뿔소의 고기와 뼈의 해체까지 마친 황희준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고생했다. 잘하네.”
“헤헤. 형님 덕분입니다.”
커다란 뒷다리 하나를 들어 근처에 서 있던 용병에게 건넸다.
“드십시오. 삼각 코뿔소의 고기 맛이 어떤지는 들어 보셨지요?”
하지만 용병의 인상은 마구 구겨졌다.
그들에게 은석은 뒤늦게 나타나 몬스터를 가로챈 놈이었다. 거기에 해체에도 참여할 수 없게 했다.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깟 고깃덩어리 하나 먹고 떨어지라 이거냐!”
용병은 들고 있던 칼을 은석에게 들이댔다.
해머와 창왕의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자, 흠칫 놀라 위협하던 칼을 툭 떨어뜨렸다.
그런 어설픈 칼부림에 신경 쓸 리가 없는 은석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헌터님은 삼각 코뿔소 고기를 안 드셔 봤나 봅니다. 정말 맛있는데.”
그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용병이 다시 칼을 주워 내밀려는 순간.
“역시, 소문만큼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군요.”
계속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던 현기주가 나타나 용병의 칼을 잡고 아래로 쓱 내렸다.
천상의 힐러가 나타나자, 다들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자,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십시오. 김은석 헌터님이 나서 주신 덕분에 더 이상의 부상자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 내 이름을 알아?’
사람들을 보던 현기주가 은석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은석이 들고 있는 삼각 코뿔소의 뒷다리를 용병 대신 받아 들었다.
“정욱 헌터님, 이걸로 오늘 저녁에 고기 파티를 할까요?”
그의 비서 역할을 하는 정욱 헌터를 불러 고기를 건넸다.
지켜보던 용병 몇 명이 저녁 식사 준비를 돕겠다며 비서를 따라갔다.
현기주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은석을 바라봤다.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하신 분이군요.”
“저를 아시나요?”
“그럼요. 제가 김은석 헌터님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던전 입구에서 은석을 뚫어지게 쳐다봤던 현기주.
이전에 영상을 봤던 비서 덕분에 은석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었다.
“옆에 계신 분 성함이…….”
“황희준입니다.”
유명한 현기주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황희준이 긴장했다.
“몬스터 해체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요.”
“아, 네넵. 감사합니다. 그건 전부 우리 은석 형님께서…….”
황희준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무표정한 은석.
말을 마무리하지 않고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현기주가 재미있는 듯 웃음을 흘렸다.
“두 분처럼 대단한 헌터님들과 레이드를 뛰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
S급 헌터의 칭찬에 황희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은석이 손을 들어 황희준의 아래턱을 툭 쳤다.
“하하하, 곧 저녁이 준비될 테니, 식사하십시오.”
“현기주 헌터님은 같이 식사 안 하시나요?”
“저는 다친 분들을 치료해야 해서 나중에 하겠습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은석의 말에 현기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와주신다니….”
“저도 힐러입니다. 레벨은 현기주 헌터님에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지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현기주의 반응을 보니 아직 그의 특성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힐러셨군요. 소환수 비슷한 것이 나타나서 저는 네크로맨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닙니다. 부끄럽습니다만 F급밖에 되지 않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힐러니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레벨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함께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요.”
“그럼 형님, 저도…….”
함께 가려고 나서는 황희준을 막았다.
“희준아, 고생했다. 넌 가서 저녁 먹어. 그리고…….”
현기주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기주 헌터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어봐.”
황희준은 비밀 임무를 부여 받은 스파이가 된 듯 눈빛을 반짝이며 빠르게 사라졌다.
황희준과 헤어진 은석이 앞서 걸어가는 현기주를 따라갔다. 옆에 선 은석을 쳐다보는 현기주의 표정이 묘했다.
그와의 동행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보탐색.’
여전히 악귀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하게 숨어 있다고? 빙의된 게 맞기는 한 걸까.’
악귀 대신 이상한 그의 생각이 들렸다.
[‘저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헌터를 만나다니. 빨리 죽이고 싶다. 아니지, 이런 남자는 피날레로 해야지. 계획대로 윤지은을 먼저 죽이고 난 다음에……. 큭큭.’]
‘윤지은?’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은석에게 말을 걸던 여자였다.
‘이 새끼는 뭐지? 악귀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죽이고 싶어? 이거이거, 생각보다 복잡한 놈인데.’
현기주가 고개를 돌려 옆에서 걸어가는 은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역시 아름답다. 그냥 오늘 죽여 버릴까?’]
섬뜩한 생각과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석 역시 현기주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뭐라는 거야. 또라이 새끼.’
* * *
“헌터님, 저, 저 좀 치료해 주십시오!”
“다리, 다리에 감각이 없습니다. 제발 저 먼저…….”
임시로 천막을 세워서 만든 치료실 안에는 다친 용병들로 가득했다.
모두 현기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 같았다.
‘이거야 원, 전쟁 중인 야전 병원도 아니고.’
서로 먼저 치료를 받겠다고 손을 내미는 그들의 모습이 거북스러웠다.
은석은 입구에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현기주는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짓단을 잡은 용병의 손을 매몰차게 쳐 내기까지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례대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은석은 누워 있는 용병들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꽤 심하게 다쳤던 헌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어디 있지? 그 사람 먼저 치료해야 할 텐데?’
현기주는 용병들의 다친 상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제일 안쪽에 누워 있는 헌터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먼저 치료를 받는 용병은 왼쪽 팔에 베인 상처가 전부였다.
오히려 옆에 누워 있는 자의 상태가 더 위험해 보였다.
‘치료해 주는 기준이 없어?’
현기주가 손을 상처 위에 올렸다. 눈을 감자, 이내 힐이 나오는 듯 펼친 손바닥 전체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힐 색깔이 왜 저따위야.’
은석의 눈에 현기주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회색의 연기가 보였다.
그는 당연히 그것이 현기주의 힐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힐을 받으면 상처가 낫는 게 아니라 없던 병도 생기겠는데.’
덥석-
그때, 누군가 은석의 다리를 잡았다.
“제발, 저 좀…….”
용병은 엎드린 채 힘겹게 손을 뻗어내고 있었다.
이미 많은 피를 흘렸는지, 누워 있는 주변의 땅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은석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용병을 바로 뉘었다.
그가 찾고 있었던 용병이었다.
그는 곧 숨이 끊어질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은석이 고개를 돌려 현기주를 쳐다봤다.
그는 아직 가벼운 상처를 입은 첫 용병의 상처에 힐을 주입하고 있었다.
현기주의 손에서 나온 거무튀튀한 연기가 용병을 감싸고 있었다. 현기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좀 이상한데…….’
그 모습에 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숨을 헐떡이는 용병이 신음을 흘리자, 일단 은석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은석이 생력을 흘려 넣으니 이내 고통스러워 보였던 용병의 표정이 평온하게 변했다.
곧 상처도 아물고, 헐떡이던 숨소리가 마치 편안한 잠을 자는 것처럼 바뀌었다.
“저, 저도 치료해 주십시오.”
옆에서 은석의 치료를 지켜보던 용병이 소리쳤다.
어느새 은석을 보고 있던 현기주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으윽!”
현기주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챈 은석이 상처에서 손을 떼자마자 바닥으로 쓰러졌다.
현기주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김은석 헌터님, 왜 그러십니까?”
은석이 온몸을 웅크린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F급밖에 되지 않아서……. 힐을 너무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겨우 이것밖에 도와드리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일어서기 위해 바닥을 짚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난 은석이 현기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김은석 헌터님, 너무 힘들어 보이십니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앉으십시오.”
현기주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은석이 몸에서 생력을 뿜어냈다.
쑥-
순간, 현기주의 손안에서 거무튀튀한 손 하나가 쑥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은석이 다시 생력을 거두자, 빠르게 현기주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네놈이구나.’
은석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려는 현기주를 막았다.
“아닙니다. 다치신 헌터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분들부터 치료받으셔야지요. 저는 마력 고갈일 뿐이니 조금만 쉬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척하며 치료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이드.’
빠르게 몸을 숨기고 치료실 입구 천막이 펄럭이는 틈에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현기주의 치료를 지켜봤다.
은석이 없어서일까.
현기주가 뿜어내는 연기의 양이 몇 배로 늘어났다. 그 때문인지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동시에 치료를 마친 용병들은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잠들었다.
곧 현기주가 마지막 치료를 마쳤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기주가 만족한 듯 두 손을 맞잡고 비볐다.
“자, 모두 좋은 꿈들 꾸십시오.”
현기주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은석이 치료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치료실 안에는 조금 전 현기주의 손에서 나온 짙은 회색빛의 연기가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니 힐은 맞는 것 같고……. 그렇다면 힐 안에 악귀의 힘이 들어간 건가?”
은석은 하이드를 풀지 않은 채, 누워 있는 용병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으윽…….”
은석이 치료한 용병을 제외한 모두가 인상을 쓰며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S급 힐을 받은 사람들 표정이 왜 저래?”
하이드를 풀자, 치료실 안에 가득한 연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오며,
[환각 독이 감지됩니다. 해독을 시작하겠습니다.]
해독한다는 메시지가 들렸다.
‘이게 전부 환각을 일으키는 연기란 말이지?’
손을 휘휘 저어 용병 주변에 가득한 연기를 흩트렸다.
가까이 누워 있는 용병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생력을 조금 흘려 넣었다.
금세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잔뜩 찡그린 얼굴이 편안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도 사라졌다.
은석은 용병들에게 차례대로 생력을 조금씩 넣어 현기주의 힐을 모두 없애 버렸다.
이제 생력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진 덕분인지, 꽤 많은 자들을 치료해 줬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어느새 신음이 가득했던 치료실에 쌕쌕거리는 편안한 숨소리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