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형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형님이 드실 고기를 따로 챙겨 놓았습니다.”
모닥불 주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일찌감치 다 먹은 용병들은 잠을 자기 위해 흩어진 후였다.
은석은 황희준의 옆에 앉았다.
“형님 말대로 정말 이 고기의 맛은 최고입니다. 이제 한우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입 주변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씩 웃으며 은석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맛있지?”
“진짜 맛있습니다. 딱 소주 한 잔만 있으면 금상첨화겠습니다.”
“현기주는 저녁 먹었어?”
“현기주 헌터는 따로 준비된 천막 안에서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님, 현기주 헌터가 힐을 넣는 거 보셨습니까? 정말 소문대로 굉장하던가요?”
황희준은 천상의 힐러가 치료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눈을 반짝이며 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문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긴 엄청나더군.”
그의 대답에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은석이 잘 구워진 삼각 코뿔소의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5년 동안 헌터 생활을 하면서 딱 한 번 먹어 본 것이 전부일 만큼 귀한 고기였다.
그런데도 어떤 맛인지 뚜렷하게 기억할 만큼 맛있었다. 오랜만에 씹어 보는 삼각 코뿔소의 고기는 역시 최고였다.
“형님, 언제 또 공격당할지 모르는데 다들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나요?”
던전 경험이 거의 없는 황희준은 여유롭게 먹고 자는 용병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삼각 코뿔소가 나오는 던전은 보통 생존 퀘스트가 많아. 그리고 이놈들 수도 그렇게 많지 않고.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몬스터일 수도 있어.”
“아, 그렇군요.”
은석은 다시 눈을 감고 고기 맛에 집중했다.
“제가 형님의 임무를 받고 많은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말이죠.”
황희준의 말이 이어지자 은석은 음미를 포기하고 눈을 떴다.
“뭐라고 하던데?”
“현기주 헌터에 대한 존경심이 상상 이상이더군요.”
“존경심?”
“네, 용병을 신경 써 주는 헌터는 현기주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형님,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뭔데?”
황희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현기주 헌터는 레이드에서 한 번이라도 다쳐서 치료받은 헌터는 다시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쳤다고? 죽은 것도 아닌데?”
“그렇답니다. 이상하죠? 그래서 저도 자세히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비서가 나타나는 바람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푹 늘어뜨렸다.
은석이 황희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정도면 충분해. 고생했다.”
은석의 칭찬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황희준이 준비해 온 콜라를 내밀었다.
“형님을 위해 제가 준비했습니다.”
피식 웃으며 황희준이 건네는 콜라를 받아 마셨다.
은석의 눈에 근처에 앉아 그들을 힐끗힐끗 곁눈질하고 있는 윤지은이 보였다.
그녀는 다른 용병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저녁을 먹고 있었다.
[윤지은, 22세, C급 탱커]
‘저 여자가 윤지은…….’
현기주가 생각하던 용병이 저 여자임을 알게 된 은석이 황희준에게 말했다.
“희준아, 저기 혼자 먹고 있는 저 사람 오라고 해. 같이 먹자고.”
은석이 가리키는 사람을 본 황희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자신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그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형님! 저 싸가지를 왜 부르십니까?”
“가서 데리고 와. 고기도 많이 못 가져간 것 같은데 나눠 먹으면 좋잖아.”
마지못해 툴툴거리며 일어선 황희준이 윤지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다가오는 황희준을 바라보던 윤지은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지만, 이내 벌떡 일어나 은석의 곁으로 쏜살같이 걸어와 앉았다.
“안 그래도 배가 안 차서 힘들었는데, 저 고기 좀 더 주세요.”
윤지은은 인사도 없이 앉자마자 고기를 더 달라며 접시를 내밀었다.
은석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의 접시 위에 있는 고기 대부분을 그녀에게 건넸다.
맛있다며 고기를 입 안에 쓸어 넣고 있는 윤지은을 보는 황희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형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구운 고기를 저런 싸가지에게 주시다니.’
황희준이 눈을 부릅뜨며 대놓고 싫은 티를 냈지만 고기 먹는 데 정신이 팔린 윤지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동영상을 통해 은석을 알게 된 윤지은. 게이트 앞에서 그를 만났을 때 마치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 들었었다.
스스로 나름 예쁘다고 자부했기에 자신감 있게 말을 걸었지만, 은석의 반응은 냉랭했다.
‘츤데레 스타일인가. 틱틱거리면서 이렇게 고기도 챙겨 주고.’
자신의 고기를 건네주는 은석을 바라보는 윤지은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쪽은…….”
“윤지은이에요.”
“윤지은 씨는 직업이 뭔가요?”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은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탱커예요.”
“네에? 탱커요?”
옆에서 구시렁거리고 있던 황희준이 놀라 큰 소리로 되물었다.
윤지은이 살짝 흘겨보고는 다시 은석을 바라봤다.
“역시 탱커니까 저렇게 많이 먹는 거였어.”
“아니, 이봐요. 내가 뭘 얼마나 많이 먹는다고.”
발끈하는 윤지은을 향해 빈 접시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그사이 은석은 다 마신 콜라 캔을 찌그러뜨렸다.
“보아하니 같이 움직이는 팀은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어디서 잘 겁니까?”
황희준이 들고 있던 접시를 빼앗고 휙 던지고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은석을 향해 돌아앉았다.
“어머! 지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거예요?”
귀여운 척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윤지은.
은석은 그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따로 잘 곳을 정해 두지 않았다면 저희와 함께 가시죠.”
“꺄! 애교도 못 본 척하는 역시 츤데레야. 박력 넘쳐.”
윤지은도 은석을 따라 폴짝 일어섰다.
그녀가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사이, 황희준이 은석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형님, 왜 저런 이상한 여자와 같이 움직이시는 겁니까?”
“예쁘잖아.”
짧은 대답이었으나 황희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투는 재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녀가 예쁜 것은 사실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윤지은.
“그건 그렇지만, 하. 형님도 결국 얼굴이었군요.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형님 역시 비주얼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으니……. 저만 못생겼을 뿐이고.”
입술을 삐쭉 내밀며 중얼거리는 황희준의 뒤통수를 툭 쳤다.
“투덜대지 말고 잠이나 자러 가자.”
현기주가 많은 용병 중에 정확히 그녀의 이름을 말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은석은 놈의 목적을 찾기 위해서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기로 했다.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니 세 명이 누울 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형님, 여기 누우십시오.”
황희준이 재빨리 침낭을 폈다.
“그럼 난 여기서 자야지.”
윤지은도 자신의 침낭을 꺼내 은석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윤지은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는 황희준.
“감히 형님의 오른쪽에 눕다니, 형님의 오른팔은 난데.”
이빨을 빠드득 깨무는 그를 보며 은석이 왼쪽 바닥을 탁탁 쳤다.
“빨리 깔고 잠이나 자, 인마. 눈에 힘 그만 주고.”
윤지은이 황희준을 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오늘 삼각 코뿔소 해체하느라고 고생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사냥이 시작될 테니 푹 쉬어라.”
황희준이 은석을 향해 휙 돌아누웠다.
“형님…….”
그의 말에 감격한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얼굴 돌리고.”
피곤했는지 황희준과 윤지은 둘 다 금방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용병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도 뒤척이는 소리도 사라졌다.
던전 안에는 풀벌레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적막감만 가득했다.
타탁-
그때, 작은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타탁-
누군가 숨죽여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은석이 감은 눈을 번쩍 떴다.
‘하이드.’
스킬을 발동시킨 후 소리에 집중했다. 발소리는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걸어가는 게 아니라 뭘 찾고 있는 거군.’
사사삭-
자신들이 누워 있는 덤불 사이를 헤집는 소리였다.
“윤지은 이 여자는 어디서 자는 거야?”
낮았지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 그때, 은석의 눈앞에 남자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혹시 황희준과 윤지은이 소리라도 낼까 둘을 빠르게 쳐다봤다.
다행히 남자는 덤불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안쪽 공간만 대충 살폈다.
‘정욱 헌터.’
윤지은을 찾고 있는 남자는 현기주의 비서였다.
이곳저곳을 뒤지던 정욱의 소리는 잠시 후 완전히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 황희준이 은석을 흔들어 깨웠다.
“형님, 일어나십시오. 곧 출발합니다.”
지난밤, 혹시 정욱 헌터가 다시 올까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거기에 땅바닥의 습기로 인해 온몸이 찌뿌둥했다.
“덕분에 잘 잤어요. 오빠.”
윤지은이 일어난 은석에게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오빠……?”
그녀의 말에 황희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빠지, 아빠야?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오빠라고 해야지. 그죠. 오빠아?”
말없이 생수만 들이켜며 생각했다.
‘아빠 쪽이 더 가까울걸?’
대답도 안 하고 집합 장소로 걸어가는 은석의 뒤를 따라 황희준과 윤지은이 끊임없이 투닥거리며 걸어갔다.
“빨리 모이십시오. 곧 출발합니다.”
앞에 선 정욱이 큰소리로 외쳤다.
‘얼굴이 왜 저래?’
어제와 달리 그의 왼뺨이 눈에 띄게 붉었다.
현기주 헌터가 나타나자, 용병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와 달리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들을 마주하자 재빨리 트레이드마크인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기주가 곁에 다가가자 정욱이 어깨를 움찔했다.
‘아, 윤지은을 못 찾아서 맞은 거군.’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은 은석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현기주 헌터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용병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현기주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여길……!”
그는 어제 현기주가 치료한 용병 중 하나였다.
“헌터님 덕분에 오늘 사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용병이 현기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제 치료받았던 용병들이 멀쩡히 그의 앞에 서서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현기주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아이고, 어떻게라니요. 천상의 힐러님께서 치료해 주신 덕분이지요. 몸이 던전에 들어올 때보다 더 가볍고 힘이 막 솟아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다른 용병들이 경외에 찬 탄성을 뱉었다.
“역시 현기주 헌터님은 국보급 힐러가 분명합니다.”
“그 정도예요?”
“기분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넘칩니다.”
현기주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표정을 본 은석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현기주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껏 고양된 용병들이 그의 감정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옆에 서 있는 정욱만이 현기주의 기분을 눈치채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황희준 역시 회복한 용병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님 말대로 진짜 엄청나신 분인가 봅니다.”
“그래, 아주 엄청나지.”
현기주와 이야기를 나누던 정욱이 다급하게 외쳤다.
“언덕을 넘어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삼각 코뿔소가 나올지 모르니 다들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마십시오.”
낮은 언덕 몇 개를 넘었다. 3시간쯤 걸었을까. 긴장감이 풀려 들고 있던 무기들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쿠쿵-
순간, 던전 전체가 울리는 진동에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쿠웅-
땅이 한 번 더 울리고 연이어 삼각 코뿔소의 괴성이 들렸다.
“어디야! 어디서 오는 거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울부짖는 소리와 땅의 울림이 어제와 달랐다.
“긴장해라. 한 마리 이상인 것 같다.”
은석이 황희준과 윤지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다!”
누군가의 외침에 일제히 오른쪽을 쳐다봤다.
어제보다 더 커 보이는 삼각 코뿔소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쪽에서도 온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또 한 마리의 삼각 코뿔소.
“두, 두 마리……!”
용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삼각 코뿔소의 위력은 경험했던 터라 어제보다 한 마리 더 늘어난 상황에 모두 기가 눌렸다.
양쪽에서 콧바람을 뿜어내며 달려오는 두 마리의 삼각 코뿔소.
양쪽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먼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뭐가 무섭냐! 천상의 힐러님이 우리 뒤에 계신다!”
어제 치료소에서 은석이 가장 먼저 치료해 준 그 용병이 칼을 치켜들며 함성을 내질렀다.
“걱정 말고 몬스터를 잡자! 현기주 헌터님이 계신다!”
용병이 왼쪽에서 달려오는 삼각 코뿔소를 향해 뛰어나갔다.
“이까짓 코뿔소 뿔 따위!”
있는 힘껏 장검을 휘둘렀다.
퍼억-
어금니에 정확하게 부딪친 장검이 두 동강 났다.
부러진 검신의 윗부분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삼각 코뿔소의 주둥이가 그대로 용병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억!”
피를 뿜어내며 바닥에 떨어진 용병을 삼각 코뿔소가 짓밟고 지나갔다.
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찢기고 눌린 용병의 처참한 시체만 남아 있었다.
‘하. 저 양반은 어제도 저렇게 나서서 다치더니 오늘도 저러다 결국 죽네. 천상의 힐러도 죽은 사람은 못 고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