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스펙터다.”
쾅-
두꺼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놈은 2미터가 넘는 키에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스펙터 다섯 놈이 성안에 들어선 그들을 일제히 내려다봤다.
키하악-
키만큼이나 긴 얼굴에는 눈도 코도 없었다.
잔뜩 삐져나온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스펙터는 엄청난 원한을 가진 언데드.
놈이 뿜어내는 흉흉한 기운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 놈이 은석을 향해 긴 손톱을 휘둘렀다.
흐느적거리는 긴 팔은 예상과 달리 무척 빨랐다.
“윽!”
미처 피하지 못해 스친 은석의 어깨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를 비집고 나오는 신음은 어쩔 수 없었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해머와 망자가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는 티셔츠의 어깨 부분을 금세 피로 물들였다.
해머가 은석을 부축해 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
따라오던 망자가 찢어진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상처를 보고 놀랐다.
“상처가, 저절로 아물고 있다니.”
어느새 어깨를 타고 흐르던 피도 멈췄다.
고통스러워 보였던 은석의 표정도 점점 편안해져 갔다.
아문 상처를 본 해머와 망자가 놀란 듯 그를 쳐다봤다.
은석이 이미 사라진 상처를 손으로 슥 만져 보았다.
‘팔귀의 재생력 한번 끝내주네.’
끼아악-
구석에 모여 있는 그들을 향해 스펙터가 괴성을 내뱉었다.
“조심해!”
날아오는 긴 팔을 보며 은석이 외쳤다.
망자와 해머가 스펙터의 손톱을 피해 양쪽으로 흩어졌다. 다시 날아오는 스펙터의 팔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키도 크고 팔다리가 길어 둔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은석은 스펙터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 다른 점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긴 팔만 빠르게 휘두를 뿐, 하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개미, 나와라.”
은석이 고스트 던전에서 귀속시킨 은빛 개미 군단을 불러내자, 은빛이 아닌 칠흑같이 검은 개미들이 나타났다.
“공격해.”
은석의 명령에 일제히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달려 나갔다. 개미들이 스펙터의 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가 몸통을 공격하는 녀석도 보였다.
순식간에 다섯 스펙터의 몸에 까맣게 붙은 개미들.
하지만 놈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부족했다.
스펙터의 날카로운 손톱에 베여 사라지는 개미들이 늘어났다.
“소환 해제.”
스펙터의 몸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찢긴 게 보였다.
그 때문인지 조금 전보다 확실히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사이 상처가 완전히 아문 은석이 앞으로 나섰다.
양쪽에 서 있는 해머와 망자를 쳐다보며 외쳤다.
“내가 공격할 동안 날아오는 팔을 막아.”
은석이 스펙터를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쾅-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스펙터의 손을 해머가 쳐올렸다.
서걱!
은석이 질주하며 귀검으로 스펙터의 무릎을 단숨에 그어 버렸다.
크아악-
귀검의 서늘한 울림이 놈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괴성에 묻혀 버렸다.
무릎이 갈라진 스펙터가 바닥으로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푹!
기다리고 있던 망자의 긴 창이 놈의 기다란 머리통을 관통했다.
[스펙터가 소멸하였습니다.]
은석의 머릿속에 알림이 울렸다.
망자는 창에 꽂힌 스펙터의 머리가 연기로 변하는 것을 놀란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은석은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한 놈이 소멸하자, 나머지 스펙터의 공격이 더 빨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은석의 귀검이 더 빨랐다.
해머가 빠르게 내려오는 팔을 쳐 내면 은석이 다리를 베었다.
스펙터가 바닥으로 쓰러지면 망자가 창으로 놈을 소멸시켰다.
처음 싸워 보는 셋이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레이드를 뛴 팀처럼 합이 잘 맞았다.
소멸과 동시에 연기로 변해 사라져 버리는 스펙터.
“전부 귀속해.”
마지막 스펙터가 검은 연기로 변하고 있었다.
은석이 놈을 보며 귀속을 명했다.
하지만,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귀속할 수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주인이 있다고? 보스가 있는 던전이라도 귀속은 가능했었는데.”
다시 귀속을 명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귀속이 거부되었다.
“어쩔 수 없군. 보스를 잡아 보면 알게 되겠지.”
은석이 옆에 서 있는 해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짝-
해머가 웃으며 하이 파이브를 했다.
은석이 망자에게도 손바닥을 내밀었지만, 그는 정중히 고개만 숙였다.
“예의 바르시기는.”
[750/1,000]
없애야 할 망령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스펙터 한 놈당 50포인트. 나머지 250은 어떤 놈들이지.’
스펙터가 사라진 홀은 굉장히 넓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은석의 눈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올라가자. 보스는 펜트하우스를 좋아하거든.”
은석이 팔을 양쪽으로 뻗었다.
해머가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망자에게 눈짓했다.
양쪽에 서서 은석의 팔을 잡고 단숨에 성의 꼭대기까지 날아갔다.
“역시 계단보다는 귀리베이터야.”
해머와 망자의 도움으로 빠르게 올라온 탑의 꼭대기는 넓은 홀과 달리 무척 좁았다.
계단의 끝에는 낡은 나무문이 바람에 삐걱대고 있었다.
“흡! 이게 무슨 냄새지?”
탁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은석이 빠르게 코를 막고 검집으로 나무문을 천천히 밀었다.
후욱-
누런 연기가 열린 문 사이로 터져 나왔다.
연기는 순식간에 은석과 해머, 망자를 휘감았다.
* * *
“주승아……. 주승아, 미안하다. 형이 미안해.”
망자가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찧고 있었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울음을 토해 냈다.
“내가, 너를 조금 더 빨리 찾아갔어야 했는데. 흐흐흑. 정말 미안하다.”
망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괜찮습니다. 용사님.”
어디선가 나타난 여자의 하얀 손이 망자의 등을 토닥였다.
길고 검은 머리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망자의 앞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울고 있는 망자를 위로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괜찮습니다. 용사님. 잘못하신 것은 직접 갚으시면 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망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천사 같았다.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유난히 붉어 보이는 입술이 미소 지었다.
“그럼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제게 심장을 바치시면 모든 게 용서될 겁니다.”
망자는 홀린 듯 일어나 앉아 옷을 풀어 헤쳤다.
여자를 향해 맨살이 드러난 가슴을 내밀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주승이에게 용서받고 싶습니다.”
여자가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는 품에서 끝이 유난히 뾰족한 칼을 꺼내 치켜들었다.
망자는 눈을 감은 채 용서받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랄한다.”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여자가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냐!”
“칼이나 내리지.”
누런 연기를 밀어내며 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망자를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내가 저렇게 흉한 꼴을 할 뻔했겠어.”
조금 전, 방 안에서 연기가 밀려오자 은석은 빠르게 쉴드를 쳤다.
동시에 해머를 소환 해제로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망자에게 밀려드는 연기는 미처 막아 주질 못했다.
이미 죽은 자였지만 연기를 흡입하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은석은 일단 어떤 종류의 연기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쪽 구석에 서서 조용히 망자를 지켜봤다.
다행히 독은 아닌 듯 보였지만 망자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을 했다.
‘환각을 일으키는 연기인가.’
그때 망자의 곁으로 여자 하나가 다가왔다.
[던전 보스 힐다 카포텐, 하급 마녀, 환상술.]
[’오랜만에 신선한 심장을 먹을 수 있겠구나.’]
‘환상술이라…….’
여자는 망자를 위로하며 그에게 심장을 내어놓으라고 했다.
‘영혼이라 갈라 봤자 심장도 없는데, 놔둬 볼까.’
하지만 던전이 클리어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은석이 나섰다.
마녀가 연기 사이로 걸어 나오는 그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내 연기를 마시고도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냐고!”
“네 마법이 시원찮은가 보지. 더 열심히 수련하도록 해.”
은석이 귀검을 꺼내 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마녀가 뒤로 주춤 물러서더니, “내 명령을 들어라!”
은석을 향해 더 많은 연기를 보내기 위해 두 팔을 내밀며 소리 질렀다.
마녀는 은석을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걱-
누런 연기가 뿜어져 나오던 두 팔을 귀검으로 내려치자, 양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악!”
마녀가 잘린 양팔을 안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머.”
은석이 해머를 불러낸 뒤 빠르게 보호막을 씌워 주었다.
죽은 자에게도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연기였다.
“벽을 무너뜨려. 연기 빠져나가게.”
“네, 대장.”
해머가 한쪽 벽을 힘껏 쳐냈다.
허물어져 가는 탑 한쪽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탑 안 가득 채운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누런 연기가 사라지자, 가슴을 내밀며 울고 있는 망자가 보였다.
“이자는 왜…….”
“너도 나 아니었으면 이러고 있었을 거다. 나한테 감사해.”
은석이 망자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망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마녀의 뒤를 따라 들어간 방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인간의 심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휘유, 이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네가 다 죽인 거야?”
마녀는 구석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환상술에 중독되지 않았던 인간은 지금껏 없었다.
가족들의 심장을 바쳐 얻은 최고라 자부했던 흑마법이었다.
“나의 환상술은 최고야. 최곤데……. 왜, 이런 일이…….”
눈동자를 불안하게 움직이며 중얼거리는 마녀.
은석이 귀검을 들고 다가갔다.
그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마녀는 여전히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었다.
서걱!
그대로 마녀의 목을 잘랐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마녀의 목이 문밖으로 굴러 해머가 뚫어 놓은 벽 아래로 떨어졌다.
[던전의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귀검을 넣고 아공간에서 단검을 꺼냈다.
웅크린 채 바닥으로 쓰러진 마녀를 똑바로 눕혔다.
가슴을 가르자 아직 뛰고 있는 붉은 심장이 보였다.
심장을 꺼내 그 안에서 핏물보다 붉은빛을 띠는 마나석을 빼냈다.
그때, 붉은 마나석에서 회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수십의 검은 인영으로 바뀌더니 은석의 앞에서 서서히 인간의 형체를 갖춰 갔다.
살아 있었을 때의 모습으로 변한 혼령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성주 제임스 카포텐, 거상]
“누구야?”
성주를 따라 그의 뒤에 서 있던 다른 혼령들도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 성의 주인, 제임스 카포텐입니다.”
“그런데?”
“저와 식솔들은 마녀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심장을 먹혔고 그동안 그녀의 몸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은석의 눈에 카포텐이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카포텐? 힐다 카포텐과는 어떤 관계지?”
성주가 흠칫 놀랐다.
“어, 어떻게 마녀의 이름을…….”
“마녀가 네 가족이야?”
“그녀는, 흑마법에 심취한 저의 막내딸이었습니다. 마법의 완성을 위해 가족들의 목숨까지 바쳤지요.”
마녀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은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 이제 마녀가 죽었으니 모두 풀려난 거네?”
그 말에 성주의 뒤에 서 있는 혼령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덕분에 드디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녀의 구속에서 벗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혼령들을 향해 은석이 손을 흔들었다.
“축하해. 가야 할 귀신들은 얼른 가고. 던전이 클리어되어서 나도 빨라 나가 봐야 해.”
은석이 방을 나가기 위해 돌아섰다.
“용사님, 잠깐만…….”
성주가 그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왜? 저승 가는 길 몰라?”
“아닙니다. 저희를 구해 주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인사는 방금 했잖아. 큰절이라도 하려고?”
성주가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당 한구석에 허름하고 작은 나무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집을 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아래를 보던 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집도 절도 없는 놈으로 보이냐? 저런 마구간 같은 걸 왜 줘?”
성주는 설명 대신 묘한 웃음만 지었다.
“저곳은 이 카포텐 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리고…….”
방구석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반지를 가리켰다.
“저것이 열쇠입니다. 잊지 말고 가져가십시오.”
[성주 제임스 카포텐의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메시지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