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형님!”
황희준이 대문을 열고 나오는 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
차 문을 연 은석의 눈에 뒷좌석에 눕혀져 있는 배낭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했다.
“저 가방은 뭐야?”
“아! 형님과 제가 사흘 동안 먹고 마실 것들입니다.”
“인스턴트 던전에 캠핑 가냐?”
황희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던전에서는 형님 덕분에 살아서 나왔지만……. 그 전에 배고파 죽을 뻔했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황희준은 고블린 주술사의 던전에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왔었다.
그는 레이드 경험이 없었다.
일반 던전의 경우, 길드 스태프들이 식사를 위한 기본적인 물품을 챙겨 주었다.
개인 짐꾼이 있는 헌터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따로 준비해 갔다.
길드에서 준비해 주기 때문에 용병들도 특별히 던전 안에서 먹을 것을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인스턴트 던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개인이 모든 준비를 해야 했다.
정식 던전이 아니니 그에 대한 준비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을 리가 없었다.
황희준 역시 일반 용병이 준비하는 것 정도로만 준비해 간 것이었다.
“많이 힘들었었나 보군.”
은석이 배낭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나석이라도 많이 챙겼으면 또 몰랐겠지만……. 수익도 없고 분위기도 뒤숭숭하니 배고프다는 말도 못 하겠고. 그래서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습니다.”
‘3일 다 채워서 던전에 있을 생각 없는데.’
준비한다고 바빴을 황희준에게 괜히 미안해 은석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 정말 형님과 저, 둘만 들어가는 겁니까?”
“왜? 죽을까 봐 겁나?”
“아닙니다. 형님이 계시는데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살짝 걱정이…….”
“전에 봤었지 않나? 거무튀튀한 연기가 휙휙 날아다니는 거.”
황희준은 그제야 기억나는 듯했다.
“그런데 형님, 그것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모습으로 싸우는 건가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래. 조만간 선명하게 보일 거야.”
“그렇군요. 기대되는데요.”
* * *
황희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폐역.
오랫동안 기차가 다니지 않은 역은 을씨년스러웠다.
산 하나를 두고 바깥은 번화가였지만 기차역 쪽은 버려진 구역 같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휴, 무슨 귀신의 집도 아니고 소름이 쫙쫙 돋습니다.”
은석이 시계를 봤다.
아직 7시가 되려면 20분 정도가 남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인스턴트 던전을 찾아내는 건지, 갈수록 궁금해지네.”
혼잣말을 하며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폐역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귀물들이 축축하고 어두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때, 귀물들의 시선이 폐역의 출입구를 향하기 시작했다.
‘저기군. 해머, 나와라.’
은석이 해머를 불러냈다.
“다른 헌터들은 없다. 오늘은 너와 나만 싸운다.”
해머가 큰 배낭을 멘 채 낑낑거리며 걸어오는 황희준을 가리켰다.
“저자는…….”
“희준이는 마나석 뽑아낼 거야. 빨리 훈련시켜야지. 그렇게 멋진 특성이 있는데 썩히면 쓰나.”
시계가 6시 50분을 가리켰다.
출입구 주변에 널브러진 낙엽과 쓰레기들이 바람에 밀려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게이트가 열린다.”
은석이 뒤로 물러섰다.
“대장, 그런데 저 망자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누구?”
“저번에 구렁이 잡을 때 이야기 나눴던 헌터 말입니다.”
해머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는 가디언 길드 사냥에서 만난 망자가 서 있었다.
“저 새끼, 그 이후로 계속 내 주변에서 얼쩡거려.”
해머가 무기를 치켜들었다.
“대장을 괴롭힙니까? 그렇다면 제가…….”
“괴롭히면 소멸시켜 버리지, 내가 가만히 놔뒀겠냐. 그냥 저렇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만 있더라고.”
윙-윙-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역 출입구에서 소용돌이가 시작되었다.
‘저, 저건…….’
게이트가 생성되는 것을 처음 본 망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그만 길드에 소속되었던 그는 인스턴트 던전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다.
거기에 바로 앞에서 게이트가 생기는 것까지 보게 되다니.
망자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장, 어떻게 할까요? 못 들어오게 막을까요?”
“내버려 둬. 따라 들어오면 한번 빡세게 굴리면 되지.”
은석이 씩 웃었다.
게이트 생성이 끝난 후 폐역은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 다시 적막감만 흘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안쪽이 보이지 않는 맑은 유리문 게이트였다.
“가자,”
은석과 황희준, 해머가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망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던전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인스턴트 던전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망자가 입장한 후 10분이 지나자, 게이트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용사여, 카포텐의 영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십시오]
은석의 머릿속에 던전 알람이 울렸다.
‘뭐야, 이 판타지스러운 대사는.’
동시에 그의 눈앞에 숫자 알림창이 떴다.
[0/1,000]
“몬스터 천 마리를 죽이는 게 조건인가?”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은석이 돌아보니 황희준과 해머, 망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입을 쩍 벌리고 던전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뭘 보는 거야?”
고개를 들어 던전 안을 쳐다본 은석 역시 눈을 커졌다.
그들의 눈앞에는 중세 시대풍의 거대한 성과 집들이 가득했다.
“형님, 이건 드라큘라나 반 헬싱 같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인데요.”
“귀신인 제가 봐도 좀 으스스합니다. 대장.”
“뭐가 무섭다고 그래. 멋지기만 하구만.”
은석이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대장, 집 안에 누군가 있습니다.”
해머의 말대로였다.
허물어져 가는 작은 집 안에서 검은 눈동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은석의 외침에 순간 귀가 째질 듯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그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희뿌연 덩어리 하나.
그것의 정체는 여자의 혼령이었다.
낡아서 너덜거리는 옷을 입었고 두 눈은 눈동자가 사라져 검고 깊었다.
날카롭게 솟아난 이빨이 다 보이도록 한껏 입을 벌린 채였다.
은석이 허리춤에 꽂아둔 귀검을 꺼내 들었다.
서걱-
날아오는 혼령을 향해 휘둘러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베었다.
잘린 부분부터 혼령의 몸이 연기로 변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에 놀란 혼령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은석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눈구멍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느낌이 쎄한데. 설마 몬스터는 없고 귀신만 죽이는 건 아니겠지?”
여자 혼령이 사라지자, 알림창의 숫자가 바뀌었다.
[1/1,000]
갑자기 날아오는 서양 여자 귀신의 모습에 기겁한 황희준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석이 단칼에 혼령을 죽이는 것을 보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잦아들지 않았다.
“형님……. 원래 던전에 귀신도 나오나요?”
은석이 어깨를 들썩였다.
“인스턴트 던전은 그런가 보네. 일반 던전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5년 동안 여러 길드와 레이드를 뛰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혼령이 나오는 던전은 없었다.
‘귀력이 올라 레벨 업 하는 건 좋은데, 마나석이 없잖아. 하…….’
놀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황희준을 쳐다봤다.
‘마나석 뽑아내는 연습을 시켜야 하는데.’
* * *
그사이, 성을 감싸고 있는 중세풍의 마을 뒤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서 보니 꽤 분위기 있어 보였던 그곳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황희준을 보며 은석이 말했다.
“귀신은 또 이런 데서 튀어나와 줘야 맛이지.”
“으아아……. 형님, 그럼 말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해부 스킬을 가지고 있는 의대 휴학생이 할 말이냐.”
“그래서 제가 휴학을 한 겁니다.”
“해부하는 게 무서워서?”
“아뇨, 죽은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서 찾아올까 봐요.”
황희준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해머가 큰 소리로 웃었다.
목을 한껏 집어넣고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이는 황희준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은석이 눈짓을 보내자, 그의 생각을 알아챈 해머가 황희준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퍽-
그대로 정신을 잃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은석이 그를 끌어 수풀 사이로 밀어 넣었다.
“마나석도 없을 것 같고, 괜히 벌벌 떨면서 다닐 필요가 있겠냐. 희준아. 잠시 쉬고 있어라.”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해 황희준의 몸 전체에 보호막을 펼친 뒤, “전갈.”
사막 전갈령까지 호위로 붙여 줬다.
“내가 다 죽이기는 할 텐데. 망령이 달라붙을 수도 있으니 네가 잘 막고 있어.”
은석과 해머는 마을 중심부로 들어섰다.
멋진 노을이라고 생각했던 하늘은 다시 보니 검붉은 핏물 같았다.
캬악-
키에에-
마을 곳곳에 숨어 있던 망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살아 있는 자의 향기. 아니,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진하고 달콤한 냄새였다.
은석의 생기에 흥분한 망령들이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거침없이 휘두르는 귀검에 수십의 망령들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해머 역시 날아오는 망령을 그대로 쳐 내 멀리 날려 버렸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망령을 베느라 은석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
귀검 역시 푸른 오라를 내뿜으며 서늘한 검 울림을 들려줬다.
“휴, 오랜만에 제대로 몸 좀 풀어 보는 것 같네. 해머, 어때?”
“몬스터 잡을 때보다 더 신납니다. 게임하는 것 같습니다. 대장.”
해머가 은석을 바라보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들의 곁으로 망자 헌터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바빠. 이따가 와.”
은석이 날아오는 망령을 베며 말했다.
“저, 저도 싸우고 싶습니다.”
“갑자기 왜?”
망자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지?”
망령 하나를 더 베며 은석이 물었다.
“그런데 어쩌나. 난 해머 하나로도 충분한데.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제발, 저도…….”
망자가 애원하자, 은석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망자 역시 이렇게까지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뼛속까지 헌터.
해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싸우는 거 한번 보고 제대로 계약할지 정하지. 어때?”
망자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은석이 망자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생력을 전달합니다.]
은석의 생력이 망자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뭔가요?”
은석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기운이 온몸을 휘저었다.
인스턴트 던전부터 은석의 생력까지. 망자는 처음 겪어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잠깐 동안만이야.”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망자의 곁으로 해머가 다가와 속삭였다.
“저희 대장님의 클래스가 힐러입니다. 좀 특별하시죠. 이제 저처럼 싸울 수 있을 테니 한번 움직여 보십시오.”
해머의 말을 듣고 있던 망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모습에 은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잘 싸우는지 한번 보자.”
망자가 창을 바닥에 세게 내려쳤다.
바닥이 움푹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망자는 그대로 망령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 역시 유능한 힐러야. 죽은 헌터도 싸울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그렇지?”
은석의 너스레에 해머가 웃음을 터트렸다.
[500/1,000]
은석과 A급 헌터 두 명이 나서자, 망령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정확하게 오백을 소멸시키니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폐허가 된 마을에 숨어 있던 망령들을 모두 제거한 것이었다.
“남은 오백은 저 성 안에 있다는 말이군.”
성은 멀리서 봐도 엄청난 크기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예상한 것 이상으로 더 거대했다.
거기에 핏물로 착각할 만큼 붉은 물이 성문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가 있을 것 같냐? 난 드라큘라.”
은석이 해머를 바라봤다.
“음, 분위기를 보니 저도 흡혈귀 같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성을 올려다보고 있는 망자를 쳐다봤다.
“어떤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상대를 예측해서는 안 됩니다. 싸움은 자고로 항상 긴장과…….”
은석이 급하게 손을 들어 망자의 말을 막았다.
“알았으니까 거기까지. 그럼 영혼까지 끌어모아 긴장하고 들어가 보실까.”
두꺼운 성문을 힘껏 밀었다.
쿠구궁-
성문은 오래 닫혀 있었던지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 바로 보이는 중앙 홀은 성의 규모만큼이나 크고 높았다.
“대장, 저게 인간은 아니겠죠?”
그곳에는 큰 키와 긴 팔다리, 날카로운 손톱과 등을 뚫고 나온 수많은 등뼈를 가진 괴이한 존재들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