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지쳐 보였던 남자의 얼굴에 화사한 빛이 돌았다.
남자는 만족한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던 저승차사를 따라갔다.
마지막 남은 망자까지 사라지자 다온이 소리를 지르며 은석에게 달려들었다.
“내 꺼! 내 꺼야! 왜 내 꺼를 다 주는 거야!”
“쉴드.”
팅-
은석을 감싸는 투명한 보호막에 다온이 튕겨 날아갔다.
“이야, 이거 좋은데.”
해머가 옆에서 손뼉을 쳤다.
다시 쏜살같이 날아온 다온이 은석의 근처를 맴돌며 징징거렸다.
“다온아, 네가 있을 곳을 정해 줄 테니까 잘 들어. 앞으로 한동안,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어! 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던전 안에서 네가 잡고 있던 조민우를 꽉 붙잡고 있어.”
“정말? 계속 잡고 있어도 되는 거야?”
“그래,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만이야. 만약에 그때도 지금처럼 말 안 들으면 알지?”
“알았어, 알았어. 이제 다온이는 말 잘 들을 거야. 그런데…….”
“그런데?”
다온이 은석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오래된 지박령 하나가 바닥에 붙어 스멀거리고 있었다.
“저런 것도 잡고 있어도 될까?”
은석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말 잘 듣는다고 약속했으니까 허락하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옮겨 다니지 말고 꼭 조민우만 잡고 있어야 한다. 알겠지?”
“꺄아아! 좋아! 좋아! 너무 좋아.”
다온이 손톱을 길게 뽑아내 지박령을 낚아챘다.
조민우의 정수리에 올라타 새로 잡은 지박령을 흔들어 댔다.
다온과 지박령에게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빗물처럼 뚝뚝 흘러 조민우의 어깨로 스며들고 있었다.
은석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조민우 곁으로 다가갔다.
“헌터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은석 동생, 이번 던전은 나와 잘 맞지 않은 것 같아. 우리 다음 레이드 때 다시 만나서 신나게 몬스터를 잡아 볼까? 아니면 지금 우리 집에 가서 한잔할까?”
“다음은 없습니다. 조민우 헌터님.”
백재현과 한울 길드 담당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조민우에게 정식으로 계약이 해지되었음을 알렸다.
서류를 받아 든 조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구두계약 상태였던 것은 아시죠? 저희 한울 길드는 조민우 헌터님과 더는 계약을 이어 갈 의사가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단, 저희 쪽에서 먼저 계약 해지를 했으니 가계약시 드린 계약금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민우가 발악하며 서류를 마구 찢었다.
“이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 미래를 보는 마법사, 몬스터를 예지하는 조민우야! 감히 너희가 먼저 계약을 파기해?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아!”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를 지르는 조민우와 그럴수록 더욱 신나 보이는 다온.
그사이 다온은 근처를 지나고 있던 하급 귀물 하나를 더 낚아챘다.
뾰족한 이빨이 가득한 입을 한껏 벌리며 웃고 있었다.
곧이어 조민우 머리의 오른쪽 부분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대장이 왜 저런 하급 악귀를 소멸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사용하시려고 했었군요. 역시 대장의 계획은 제가 감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해머가 은석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냥 쪼그만 돌멩이가 까부는 게 귀여워서 내버려 둔 건데.’
굳이 그에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 *
며칠 뒤 은석은 황희준을 통해서 알아낸 조민우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여기 어디쯤이라고 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은석의 앞에 자동차 한 대가 섰다.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운전자가 은석의 이름을 불렀다.
“김은석 헌터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한울 길드의 백재현 팀장이었다.
‘저놈을 왜 여기서 만나는 거야.’
던전을 나온 후 백재현의 목표는 은석의 스카우트였다.
전화를 받지도,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았지만 백재현은 끈질기게 연락했다.
“아이고, 우리가 진짜 인연인가 봅니다, 김은석 헌터님. 약속도 안 했는데 또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요.”
어떻게라도 은석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은 백재현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오면서 보니 뭘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떠나려는 은석을 백재현이 잡아 세웠다.
“혹시 백 팀장님은 이 동네에 사십니까?”
“이렇게 비싼 아파트에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조민우 헌터님을 만나고 가는 길입니다.”
“조민우 헌터님요?”
은석도 다온의 상태가 궁금해서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네, 계약 해지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변호사를 통해 고소를 하지 않나, 정신적인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나.”
백재현이 답답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적인 피해 보상이요?”
“나 원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저희와 던전을 다녀온 뒤로 악몽에 시달리고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은석은 큰소리로 웃고 싶었다.
‘조민우, 피해 보상을 들먹이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한 모양이네.’
“제가 스카우트했으니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해야죠. 어? 저 사람도 양반 되기는 글렀네요. 저기 오네요.”
백재현이 아파트 입구를 가리켰다.
조민우과 마주치기 싫었던 은석은 빠르게 백재현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탄 백재현이 조민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참 젠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확실히 던전을 나오고부터 좀 달라지긴 했어요.”
“달라졌어요? 어떻게요?”
은석이 본 조민우의 마지막 모습은 계약 파기에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이었다.
“버럭버럭하는 것도 엄청나게 심해지고……. 뭐랄까, 집착이 좀 심해졌다고 할까요?”
“집착요?”
“네, 고소 취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제가 마시던 컵을 자기 것이라며 가져가질 않나. 자기랑 같이 살자면서 못 가게 막질 않나.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배를 잡고 구르고 싶을 만큼 재미있었지만, 은석은 걱정하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조민우가 은석의 옆을 지나갔다.
“조민우 헌터 옆에서 화를 내는 여자가 부인입니다.”
그의 부인은, 5년 만에 만나는 최순정이었다.
“제가 조민우 헌터님을 스카우트하러 내려갔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요. 저 두 사람이 보육원 동기한테 그렇게 돈을 많이 뜯어냈대요. 그때 눈치채고 저 새끼를 스카우트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백재현이 끝없이 구시렁거렸다.
은석은 걸어가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조민우와 최순정이 갑자기 서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가벼운 말다툼은 곧 육박전으로 변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드는 게 보였다.
‘신나 보이네. 다온이.’
다온은 한 손으로 조민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최순정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있었다.
전에 보이지 않았던 다리도 생겨났다.
긴 발가락 사이에 그동안 잡은 잡귀들을 끼운 채였다.
악귀 다온과 잡귀의 원한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조민우와 최순정을 감싸고 있었다.
‘조금 더 놔둬도 되겠네.’
백재현이 은석의 등을 톡톡 쳤다.
“김은석 헌터님, 혹시 약속 있으신가요? 바쁘지 않으시면 어디 카페에 가서 차라도 한잔…….”
어렵게 만난 은석을 그냥 보내 줄 리가 없었다.
은석이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어, 누나.”
손으로 휴대폰을 막으며 백재현에게 조용히 말했다.
“잠시 전화 좀…….”
백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동차 잠금장치를 열었다.
밖으로 나온 은석이 통화하는 척하며 상점 쪽으로 걸어갔다.
“하이드.”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백미러로 은석을 지켜보던 백재현이 깜짝 놀라 자동차 밖으로 허겁지겁 나왔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은석은 보이지 않았다.
“와! 은신 스킬까지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길드로 데리고 와야겠어.”
다시 한번 더 결의를 다지는 백재현이었다.
* * *
“상태창.”
집으로 가는 길에 상태창을 열었다.
망자의 쉴드 능력 덕분에 보스 몬스터도 잡았다.
얼마나 레벨이 올랐을지 기대되었다.
[상태창]
이름: 김은석
프로젝트명: 저승 헌터
클래스: 힐러(F등급)
히든클래스: 네크로맨서(저승형 Lv 9)
[특성]
귀안(승계)
생력(승계)
귀력: 900/900
[스킬]
정보탐색: Lv 2
팔귀의 재생력
쉴드/하이드
[귀속령]
지박령: 일시적인 속박
해머(이문성)
“단숨에 레벨 5에서 레벨 9가 되었구나. 해머가 잡은 흡혈박쥐도 꽤 많았으니.”
죽은 헌터에게서 능력을 전이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 문자와 입금을 알리는 알람이 동시에 울렸다.
[김은석 헌터님, 한울 길드입니다. 마나석 정산 금액을 입금하였습니다.]
“보스 마나석이라 그런가, 확실히 저번 연합 던전보다는 수입이 괜찮긴 한데…….”
여전히 부족하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합 던전에서는 염라대왕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몬스터 마나석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이번에는 해머가 흡혈박쥐를 잡았지만 마나석을 꺼낼 황희준이 없어서 아쉬웠었다.
“역시 마나석은 주는 것보다 내가 다 먹는 게 좋지.”
은석이 황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받았다.
“안 그래도 지금 형님께 전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인스턴트 던전 용병 모집에 가입해 놓았습니다. 문자로 링크와 아이디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수고했다.”
“그런데 최근에 김호철이 구속되면서 인스턴트 던전 입찰이 주춤합니다.”
“그래, 몸을 사려야겠지.”
은석이 황희준에게 올리라고 시킨 김호철 컬렉션의 기사.
던전에서 같은 헌터를 죽이고 그들의 무기를 전시해 놓은 그의 엽기적인 행각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꽤 오랫동안 이슈가 되었고, 그 바람에 인스턴트 던전 레이드 모집도 조용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이상한 게 하나 올라와 있습니다.”
“이상한 거라니?”
“읽어 드리겠습니다.”
은석이 휴대폰의 음성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인스턴트 던전만 기다리는 찌질이들아, 미친 김호철 때문에 요즘 많이 힘들지? 일반 던전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불쌍하고 구린 네놈들을 위해 내가 좋은 정보 하나 던져 줄 테니 잘 받아먹어라. 이 글이 올라가는 시간부터 정확히 24시간 뒤, 라인동 사거리에서 고스트 던전이 열릴 것이다. 유령을 잡을 수 있는 놈들은 한번 잡아 봐. 기대할게.”
“고스트 던전이라고?”
“네, 형님. 그 고스트 던전이 내일 생긴다고 하는데요, 이거 진짜면 위험하지 않나요? 경찰에 알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던전.
사람들은 그것을 고스트 던전이라고 불렀다.
주로 싱크홀의 형태로 바닥에 커다란 구멍으로 나타났다.
순식간에 구멍 위의 건물, 사람 할 것 없이 집어삼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스트 던전 안에 빠진 사람들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언제 어디에 나타나는지, 그 안에 빠지면 어디로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다.
클리어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던전.
그래서 고스트 던전은 일반 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제가 신고할까요?”
“괜히 신고했다가 이목만 집중시키면 사람들이 더 모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지켜봐라. 혹시 또 다른 글이 올라오면 연락하고.”
“네, 알겠습니다. 형님.”
전화를 끊고 나니 이상균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각성자 협회도 찾아내지 못하는 던전을 알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고스트 던전이 생기는 것까지 예측할 놈이라면, 이상균이 말하는 그 녀석일까.
‘던전이 열릴 곳을 미리 안다니……. 마력 감지에 특화된 각성자일까?’
은석의 머릿속에 윤혁의 얼굴이 스쳐 갔다.
자신의 목을 잡은 것만으로 F급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그의 능력.
‘설마 윤혁, 그 미친 새끼는 아니겠지?’
윤혁에게 목을 잡혔을 때의 섬뜩한 느낌이 생생했다.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아 목을 쓱쓱 문질렀다.
녹음 파일을 켜고 황희준이 읽어 준 글을 다시 들었다.
‘누구한테 돈을 받고 올리는 느낌은 아니고……. 그냥 재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