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은석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힐러의 치료가 헌터님과 맞지 않나 봅니다. 제가 가서 도움이 될 만한 치료 포션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어서려는 은석의 다리를 조민우가 다시 잡았다.
“이봐! 자꾸 어딜 가는 거야! 내 옆에 앉아 있어.”
“헌터님, 던전 안에서 제가 가면 어딜 가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가실래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은석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민우가 마지못해 잡은 손을 놓았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조금 전부터 근처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던 백재현이 은석을 불렀다.
“저 새끼, 왜 저럽니까? 싸울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지금 뻘쭘해서 쇼하는 거 맞죠?”
조민우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백재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하…. 그건 그렇고 김은석 헌터님, 저희 한울 길드와 다니는 소감은 어떠십니까?”
은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모스맨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키이키익-!
모스맨은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날개로 바람을 일으켰다.
헌터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흡혈박쥐의 무리가 모스맨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직 치료를 끝내지 못한 헌터들이 많았다.
백재현은 다치지 않았거나, 상처를 입었더라도 전투가 가능한 헌터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열을 갖췄다.
슈아악-
모스맨의 날갯짓에 희뿌연 가루가 흩날렸다.
앞쪽에 서 있던 헌터의 눈에 가루가 들어가자, “으악! 내 눈! 내 눈!”
순간 찌릿한 통증이 몰려오더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모스맨의 가루는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게 했다.
“안 보여!”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자 당황한 헌터의 등에 모스맨이 긴 침을 푹 박아 넣었다.
그대로 헌터의 피를 한 번에 쭉 뽑아 마셨다.
흡혈박쥐와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와 흡입력에 헌터들이 경악했다.
“미친…….”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의 피가 빨려 말라 버린 헌터의 시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한울 길드 헌터들의 분노가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미라로 변해 버린 헌터를 보며 망설이던 용병들도 한울을 따라 달려 나갔다.
마법사가 바람을 일으켜 날아오는 가루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모스맨의 강한 날갯짓은 계속되었고 가루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 날개부터 잘라야겠군.”
은석이 다온에게 잡혀 있는 헌터의 곁으로 다가갔다.
“너 쉴드 능력 있지?”
자신의 특성을 알고 있는 은석에게 놀란 망자.
“그건 어떻게……. 네, 있습니다만 그건 왜.”
“나랑 잠시 계약 좀 하자. 모스맨 죽인 다음에는 풀어 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고.”
“네? 무슨 계약을…….”
[망자 최가(家)에게 일시적인 귀속령을 제안합니다.]
“네?”
“그냥 알았다고만 하면 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망자.
“내가 널 소멸시키면 편하게 귀속령으로 만들 수도 있어. 이건 네게 선택권을 주는 거다.”
망설이던 망자가 빠르게 대답했다.
[망자 최가(家)가 일시적인 귀속령이 되었습니다.]
다온의 손에서 빠져나온 남자의 온몸에 빛이 났다.
살아 있을 때와 비슷해 보였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놀란 듯 보였다.
“내 앞에 서서 쉴드를 사용해. 그냥 날아오는 가루만 좀 막아 주면 돼.”
변한 자신의 모습 때문인지 망자의 눈빛이 조금 전과 달라졌다.
“알겠습니다.”
은석이 해머에게 명령했다.
“해머.”
“네, 대장.”
“내가 모스맨과 싸울 동안 흡혈박쥐는 네가 맡아라.”
“알겠습니다.”
해머가 대답과 동시에 빠르게 사라졌다.
은석이 남자를 돌아봤다.
“우리도 시작해 볼까?”
남자가 은석의 앞에 서서 외쳤다.
“쉴드.”
남자를 중심으로 투명한 막이 방패처럼 펼쳐졌다.
은석과 남자가 모스맨을 향해 뛰어갔다.
귀검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은석을 발견한 모스맨.
더 빠르게 날개를 펄럭이며 가루를 날렸다.
하지만 가루는 은석에게 닿기도 전에 보호막에 막혀 양쪽으로 갈라지며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에 당황한 모스맨이 더욱더 강하게 날갯짓을 했다.
“으으……. 갑자기 왜 이렇게 가루가 많아진 거야.”
바람을 일으켜 흡혈박쥐와 싸우는 헌터들을 보호하던 마법사가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엄청난 가루가 주변을 희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더는 힘들겠다고 판단한 헌터들이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직 해머만이 연기 속에서 흡혈박쥐를 터트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문제는 그 가루 때문에 모스맨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무작정 걸어가다가는 놈의 긴 침에 배를 뚫릴 수도 있었다.
은석이 눈을 찌푸리며 앞을 살폈다.
“저기, 헌터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
“은신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은신?”
“은신을 사용하면 몸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척도 없앨 수 있습니다. 모스맨은 가루 속에서도 우리의 위치를 알고 있을 테니.”
은석이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역시 내가 귀신 보는 눈이 있어. 시작해.”
남자가 앞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하이드.”
은석과 남자의 모습이 연기 속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모스맨의 측면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짙은 가루 속에 서서 날갯짓을 하는 모스맨이 보였다.
기척까지 없앨 수 있다는 남자의 말대로 모스맨이 은석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이다. 모기 새끼야.”
은석이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라 순식간에 한쪽 날개를 그어 내렸다.
서걱-
귀검에 베인 날개 한쪽이 바닥에 떨어져 푸드덕거렸다.
-끼에엑!
갑자기 날개가 잘려 고통이 밀려온 모스맨이 괴성을 내질렀다.
순간 공기 중의 모스맨 가루가 은석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남자가 미처 은석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으악!”
은석이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뛰어가 주변을 쉴드로 감쌌다.
빠르게 눈을 깜빡여 눈물을 흘렸지만 눈동자는 가루의 독성 때문에 붉게 변하고 있었다.
눈 안에 자갈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순간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재생 능력 덕분에 시력은 잃지 않아 희미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었다.
한쪽 날개가 잘린 모스맨이 은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놈의 등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은석을 노리는 긴 침이 위협적이었다.
“대장! 위험합니다!”
허리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은석을 보며 해머가 소리쳤다.
남자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모스맨을 보며 벌벌 떨고만 있었다.
빠르게 일어나 귀검을 꽉 쥔 은석.
모스맨의 침은 곧장 은석을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하압!”
몸을 빙글 돌려 침을 피한 후 그대로 귀검을 내려쳤다.
-끼에에엑!
잘린 침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남은 날개로 잘린 침을 감싸 안으며 웅크린 모스맨.
은석의 눈에 고개 숙인 나방의 머리가 보였다.
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목덜미를 향해 검을 꽂았다.
꾸르룩-
숨이 끊어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모스맨이 비틀거리더니 옆으로 푹 꼬꾸라졌다.
휘이잉-
순간 마법사가 쏟아 내는 바람이 불어와 떠다니던 가루를 날려 버렸다.
희뿌연 가루가 사라진 헌터들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은석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모스맨의 한쪽 어깨를 발로 밟고 서 있었다.
검을 들어 그대로 목을 잘랐다.
나방과 흡사한 머리가 헌터들 쪽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던전 보스 모스맨을 처치하였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알림이 울리자 은석은 귀검을 아공간에 넣었다.
심장을 꺼내기에 편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모스맨의 심장은 등 날개 사이에 있지.’
단검을 들어 날개 사이를 정확하게 찔러 그어 내렸다.
단검에 잘린 등이 양쪽으로 쩍 벌어졌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심장에 혈액이 돌고 있었다.
단검으로 심장을 반으로 갈랐다. 그 안에서 모스맨의 마나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찾았다.’
마나석을 꺼내 들고 일어선 은석의 앞에 백재현이 서 있었다.
“김은석 헌터님, 도대체…….”
백재현은 지난번 던전을 통해 그의 능력이 헌터 등록증에 적힌 것 이상일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혼자서 모스맨의 목을 자르고, 초보자라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심장의 마나석까지 쉽게 꺼냈다.
백재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실력자다. 꼭 잡아야 한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백재현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팀장님, 던전 클리어된 것 같은데 안 나가십니까?”
* * *
낮은 E-랭크의 면접용 던전이었지만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던전 밖에서 대기 중이던 스태프와 응급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흔치 않은 던전 면접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기자들은 면접 결과 대신 사망 기사를 빠르게 올리고 있었다.
조민우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멍하게 서 있었다.
등을 구부리고 목을 한껏 앞으로 내민 채 얼빠진 표정이었다.
응급 요원이 그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다온아, 이리 와.”
은석이 조민우의 정수리에 서 있던 다온을 불렀다.
다온의 양손에는 망자가 된 헌터들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신나는 듯 깔깔거리며 망자들을 흔들어 댔다.
“던전을 나왔으니까 약속대로 망자들을 놓아줘.”
은석의 말에 다온의 모습이 포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검붉어지면서 이빨과 손톱이 더욱 길게 자라났다.
그 모습에 잡혀 있던 망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 순간, 은석의 몸에서 서리와 같은 차가운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한낱 악귀 따위가,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은석의 서슬 퍼런 일갈.
“지금 당장 너를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 텐데.”
옆에 서 있던 해머가 무기를 치켜들며 다온을 노려봤다.
위엄 서린 은석의 모습에 다온이 순식간에 예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긴 손톱이 사라지며 망자들도 드디어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망자들은 뱃멀미하듯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했다.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다온이 은석의 눈치를 보며 울먹였다.
“히잉……. 난 이제 어떡해. 잡을 게 없단 말이야.”
은석은 징징거리는 다온을 무시하고 저승차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망자들이 은석을 뒤따랐다.
대부분의 망자가 저승차사와 함께 이승으로 사라진 후, 은석은 자신을 도와준 망자를 쳐다봤다.
“귀속 해제.”
은석이 남자에게 묶어 놓은 귀속을 해제하자, 다시 죽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남자가 아쉽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싸우고 싶어? 원한다면 내 곁에서 평생 싸울 수 있는데. 제대로 귀속해 줄까?”
“아닙니다. 죽고 난 다음에도 몬스터와 싸워 봤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남자의 말에 은석이 해머를 돌아봤다.
“아쉽네. 해머 네 부하가 생길 수도 있었는데.”
해머가 빙그레 웃었다.
“죽어서도 좋은 일 했으니까 저승에서 심판받을 때 적극 어필하고.”
은석이 돌아서려고 하자, 남자가 급하게 그를 잡았다.
“저기, 헌터님.”
“부탁할 거라도 있어? 미리 말하지만, 가족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해 달라 이런 부탁은 안 받는다.”
“저는 몬스터에게 가족들을 모두 잃고, 혼자입니다.”
남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도 혼자야. 저기 해머도 혼자고.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별거 아니라는 은석의 말에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능력을 헌터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죽은 몸이고 저승에 가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망자 최가(家)가 스킬 전달을 원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됐어. 도와줬으니 그걸로 충분해.”
“뛰어난 능력은 아닙니다. 앞으로 싸우시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셨으면 합니다.”
남자가 은석의 손을 꽉 맞잡았다.
[망자 최가(家)가 스킬 전달을 원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남자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를 마주 보던 은석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잘 쓸게.”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