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봐! 당신 탱커야? 힘이 좋아 보이는데 우리와 함께하지.”
조민우가 용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덩치가 좋은 헌터에게 말을 걸었다.
그 모습에 백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민우 헌터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조민우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헌터들을 둘러봤다.
“내가 예지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몬스터의 출현을 예지할 동안 날 지켜 줄 헌터를 직접 구한다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뻔뻔한 조민우의 행동에 은석은 어이가 없었다.
“망나니인 줄은 알았는데. 완전 인간 말종이구만.’
한때였지만 조민우를 최고의 헌터로 떠받들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헌터님,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혼자 살겠다고.”
백재현의 고함에 조민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곁에 서 있던 헌터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보다 못한 은석이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왜들 이러십니까. 지금 비상사태 아닙니까. 던전 경험이 많고 노련한 조민우 헌터님이 참으십시오. 사람이 죽었지 않습니까. 팀장님의 입장도 이해해 주셔야지요.”
조민우가 큰 소리로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은석 동생 때문에 참는 거야. 내가 누군 줄 알아? 한발 앞서 몬스터의 출현을 예언하는 마법사야!”
“그럼요. 헌터님이 계셔야 저희가 어디서 몬스터가 오는 줄 알고 대비를 할 수 있지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조민우가 백재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형님, 잠시만요. 좀 전에 피가 튀었나 봅니다. 제가 닦아 드리겠습니다.”
“어디? 에이, 재수 없게 죽은 놈의 피가 왜 튀어.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은석이 조민우의 등 뒤에 서서 강화복을 닦는 척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석우를 강화복 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은석의 옆에서 뱅뱅 돌던 다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리로 옮겨.”
“꺄아아!”
다온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포르르 날아 조민우의 정수리에 자리를 잡고 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아, 더 이상의 공격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선 이곳에서 쉬었다가 다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백재현은 죽은 헌터의 시신을 큰 나무 옆으로 옮겼다.
나무에 검은 띠를 감아 위치를 표시했다. 돌아갈 때 잊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후 은석은 조용히 시신을 놓아 둔 곳으로 갔다.
하얀 천이 덮여 있는 시신이 보였고, 그 옆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죽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 망자가 서 있었다.
“혼란스럽지?”
망자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은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제, 제가 보이시나요?”
“보여. 내가 좀 특별하거든.”
망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은석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할 오열이었다.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면 슬프지.”
“흐흑…….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
은석은 울고 있는 망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헌터들이 이동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들어. 던전이 클리어될 때 우리와 같이 못 나가면 영원히 이 안에 갇히게 될 거야.”
“시신은 나갈 때 수습한다고 하던데……. 그때 같이 나가면 되지 않나요?”
“던전에서 시신을 수습해서 나가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을 것 같아?”
은석의 말이 맞았다. 망자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저는, 이런 곳에 갇혀 있기 싫습니다.”
“그럼 날 따라와. 내가 던전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망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자신이 잡아야 할 동아줄은 은석뿐이었다.
죽은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망자는 망설임 없이 일어나 은석을 따라갔다.
“다온아, 이리 와 봐.”
은석이 멀리서 다온을 불렀다. 다온은 조민우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돌고 있었다.
“나 불렀어? 잘 잡고 있었는데. 왜? 더 붙잡을 게 있어?”
다온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물속에서 봤던 악귀의 모습에 가까웠다. 긴 손톱과 짐승 같은 이빨이 조금씩 드러났다.
“저기 서 있는 남자의 영혼 보이지?”
“어, 피 빨려 죽은 남자지?”
“그래, 앞으로 저 남자처럼 죽은 사람들이 생겨날 거야. 그럼 네가 빠르게 그 망자들을 붙잡고 있어. 할 수 있겠지?”
“어! 어! 나 잘할 수 있어. 잘 잡고 있을게.”
“던전을 나가면 저승에 보내 줘야 하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잡고 있어.”
파앗-
다온의 팔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늘어난 팔을 그대로 뻗어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망자를 낚아채 움켜쥐었다.
“케케켁,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더욱 포악하게 변한 다온의 모습에 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아귀에 잡힌 망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은석이 애처로운 모습의 망자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저래 보여도 영혼을 잡아먹는 악귀는 아닙니다. 긴장을 풀고 몸을 맡기십시오. 승차감이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겁니다.”
망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온이 망자를 한 손에 들고 다시 조민우의 정수리로 날아갔다.
석우의 시작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 강에서 사람들이 빠져 죽지 않기를, 죽은 내 아이의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석우에게 간절함을 비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다온은 기다렸다.
안타깝게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내가 잡고 있어야 한다. 물귀신에게 영혼이 먹히기 전에 보호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온의 의지는 분노와 집착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간절함을 담은 석우가 아닌 악귀로 변해 버렸다.
흡혈박쥐에게 물려 죽은 헌터는 조민우보다 키가 컸다. 조민우의 등에 그보다 큰 남자가 어정쩡하게 붙어 있는 이상한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혼자 보기 아깝네.’
악귀와 영혼 하나가 붙은 조민우가 몸이 찌뿌둥한 듯 팔을 한껏 뻗었다.
그 모습에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출발!”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걷던 조민우가 소리쳤다.
“흡혈박쥐다!”
헌터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능력 몰라? 곧 흡혈박쥐가 날아올 거다. 싸울 준비해!”
쉬익-
조민우의 말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투 준비!”
모두 무기를 뽑아 들었다. 백재현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살폈다.
조민우는 그 틈을 타 커다란 바위 뒤로 숨어들었다.
쉬익-
다시 한번 더 빠르게 하강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들리는 비명.
흡혈박쥐가 헌터들의 얼굴을 할퀴고 다시 날아올랐다.
공격하고 사라지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짧은 공격 후 흐르는 정적.
“쯧쯧, 내 말이 맞지? 예언자 조민우가 미리 예언했는데도 왜 빨리 준비를 하지 않고.”
숨어 있던 조민우가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왔다.
백재현이 그를 못마땅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몇 명의 헌터가 조민우에게 다가가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하십시오. 다시 흡혈박쥐가 날아올 수 있습니다.”
조민우가 백재현을 보며 비꼬듯 입꼬리를 올렸다.
키이키익-
그때, 낯선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 동작을 멈추고 소리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모스맨인가.’
은석이 해머를 소환했다.
키이키익-
“흡혈박쥐 소리는 아닌데, 뭐지?”
소리는 숲속에서 들려왔다.
조민우가 천리안으로 놈의 정체를 본 모양인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모스맨이다!”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2미터가 넘는 키에 상반신은 나방과 흡사했다.
하지만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걸어오던 모스맨이 멈춰서 갑자기 괴성을 지르자, 숲속에 숨어 있던 흡혈박쥐 떼가 헌터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격!”
하늘에서 공격하는 몬스터는 싸우기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용병으로 착실하게 던전 경험을 쌓아 온 자들이었다.
서로 연계하여 피해를 최소화해 흡혈박쥐 떼를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촤앗-
은석 역시 귀검을 휘둘러 흡혈박쥐를 갈랐다. 헌터들의 목에 붙은 박쥐를 손으로 잡아떼 터트렸다.
“죽이는 족족 모두 귀속시켜!”
은석의 명령에 흡혈박쥐의 검은 영이 피어올라 박쥐의 형태를 갖췄다.
은석의 귀속령이 된 흡혈박쥐가 살아 있는 것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거무스름한 연기가 흡혈박쥐 옆에 붙어 있는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검은 연기가 붙어 있던 박쥐들이 죽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악! 저게 뭐야? 저, 저 검은 연기는 뭐야?”
“지금 저것들이 박쥐를 죽이고 있는 거야?”
검은 연기가 날아다니며 흡혈박쥐들을 죽이는 모습에 헌터들이 경악했다.
은석은 주변을 둘러보며 조민우를 찾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은석에게는 다온과 망자들이 보였다.
조민우는 은신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를 사용해 바위틈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고생해서 사 준 아티팩트를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구나. 민우야.’
가장 위협적인 모스맨은 끝까지 공격해 오지 않고 물러났다.
살아남은 흡혈박쥐들은 모스맨을 따라 숲으로 사라졌다.
“소환 해제.”
은석이 명령을 내리자, 공중에 떠 있던 수많은 검은 연기가 일시에 흩어졌다.
“혹시 여기 사령술사가 있는 거 아니야?”
“네크로맨서? 스켈레톤이 안 보이잖아.”
“그런가…….”
일단 싸움은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지만, 다수의 사망자 발생은 어쩔 수가 없었다.
“캬캬캭, 다 내가 잡을 거야.”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다온의 손에 잡혀 있는 망자의 수도 늘어났다.
조민우를 둘러싸고 수많은 망자가 켜켜이 쌓여 있는 꼴이 되었다.
“아……. 왜 이러지.”
조민우가 불편한 듯 눈을 비벼 댔다.
“왜 그러십니까? 헌터님.”
“컨디션이 너무 안 좋네. 머리도 아프고 몸이 너무 무거워. 게다가 갑자기 눈앞이 침침해지는 게, 앞도 잘 안 보이는 것 같고.”
조민우가 망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분명 최상의 컨디션이었는데, 왜 이렇지.”
조민우는 갑자기 변한 자신의 몸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헌터님? 힐러를 데리고 올까요?”
은석이 힐러를 부르러 가려고 하자, 조민우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어디 가려고? 여기 있어.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순간 조민우에게서 다온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상태는 은석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귀를 조민우에게 붙였다. 강한 분노가 담긴 악귀일수록 인간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다온이 잡아채는 망자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조민우는 점점 더 기가 눌릴 것이다.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이렇게 빨리 영향을 받으면 재미없잖아.’
은석이 한울 길드의 힐러를 불러왔다.
“이분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요. 어디 다치신 곳도 없고. 아픈 거 맞아요?”
힐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치료를 멈췄다.
조민우는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은석이 조민우의 옆에 앉았다.
“헌터님, 여전히 눈앞에 막이 씐 것처럼 불편하십니까?”
“은석 동생,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는데. 왜 이렇게, 기분도 나쁘고……. 몸도, 이상하고…….”
조민우의 말이 점점 더 느려지고 어눌해졌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달리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을 끊임없이 힐끗거렸다.
힐러가 그런 조민우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은석의 눈에 조민우의 표정을 따라 하는 다온이 보였다.
다온은 익살스럽게 표현하려고 얼굴을 찡그렸지만 기괴하고 흉측하기만 했다.
은석은 큰 소리로 웃고 싶었지만,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