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시 일어난 해머가 팔귀의 등 뒤에서 망치를 내려쳤다. 왼쪽 어깨뼈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를 놓이지 않고 은석이 뛰어가 비틀거리는 팔귀의 왼쪽 어깨를 그어 내렸다.
“으아악! 네 이놈!”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팔귀가 벌벌 떨면서 몸부림쳤다.
“너, 넌 도대체 누구냐?”
은석이 헌터들을 힐끗 돌아봤다.
은석의 전투에 놀란 헌터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거 마무리는 어떻게 하지. 팔귀를 소멸시켜 갑자기 사라지게 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때, 은석이 차고 있는 팔찌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널 부르라는 신호냐.’
잠시 고민하던 은석이 팔찌를 찬 팔을 흔들었다.
“나와라. 청안.”
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지옥 제1감옥 수문장 청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습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력이 소진될 수 있습니다]
강한 빛에 헌터들의 시야가 새하얘져 순간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지 못하게 된 순간.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은석과 팔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팔귀의 잘린 팔을 집어삼키면서.
그 모습에 은석이 어이가 없어 소리를 질렀다.
“야! 돼지. 뭐 하는 거야?”
은석의 외침에 청안이 씨익 웃었다.
화아악-
순식간에 엄청나게 커지며 뚱뚱한 고양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한 청안.
등에서 거대한 날개가 솟아올랐고 푸르고 검은 긴 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쿠아악!”
수문장 청안이 포효했다. 청안의 본래 모습에 은석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청안이 괴로워하고 있는 팔귀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꾸엑.”
팔귀를 삼킨 청안이 곧 헛구역질을 했다.
팔귀의 썩은 영을 제외하고 성유준과 그가 먹은 한울 길드 헌터들의 영혼을 뱉어냈다.
마지막으로 터져서 없어진 얼굴을 제외한 성유준의 육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안이 고양이에서 괴수로 변하던 그때, 은석은 몸에서 엄청난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생력이 소진될 수 있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갑자기 많은 생력이 빠져나간 은석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동시에 머릿속에 메시지가 들렸다.
[도적 팔귀를 처치하였습니다]
[귀력이 증가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으…….”
정신이 들기 시작한 은석.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겨우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던전 안이었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지? 도적 팔귀를 처치했다는 알람이 울렸던 거 같은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은석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냐. 인간.”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청안이 보였다. 거대한 괴수가 아닌 돼지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팔귀를 집어삼키는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던데.”
“저승 헌터로 선택받았다길래 기대했었는데. 쯧쯧. 역시 잡귀들한테 인기 있는 생력 따위로 위대한 이 몸을 버틸 수는 없구나. 약하구나, 약해.”
청안은 지옥 아홉 감옥을 지키는 수문장 중 하나였다.
이들이 이승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계약을 맺은 자의 생기가 필요했다.
예상하지 못한 생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은석이 순간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네가 먹은 팔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던전을 나간 후에 저승에 던져 주고 오면 된다.”
“그렇군. 도적 팔귀를 잡았으니 팔찌는 염라대왕께 돌려 드리면 되는 거지? 아니면 저승차사에게 줄까?”
은석의 말에 청안이 벌떡 일어났다.
“인간, 왜 돌려준다는 것이냐. 염라대왕이 잘 지내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은석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아직 위대한 청안 님을 품을 능력도 없고. 알고 보니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을 예정이더라고.”
청안이 일어나려는 은석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엄청난 무게였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로 보이지만 어쨌든 지옥 감옥을 지키는 괴수.
“비켜 주시죠. 위대한 청안 님.”
“인간, 너는 정말로 팔찌를 다시 염라대왕에게 돌려줄 것이냐?”
“그렇다니까. 도적 팔귀도 잡았고. 왜 지옥에 가기 싫어?”
청안의 푸르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방황하고 있었다.
“쿠웩!”
청안이 대답 대신 구역질을 했다. 둥근 물체 하나를 은석 앞에 토해 놓았다.
“갑자기 왜 토악질을 하는 거야?”
청안이 입을 쓱 닦으며 은석을 올려다봤다.
“흠. 이걸 네게 선물로 주겠다. 결코 뇌물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이걸 받고 팔찌를 염라대왕에게 돌려주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 봤으면 한다.”
은석이 청안이 토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도적 팔귀의 재생력]
“팔귀의 재생력?”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이 순식간에 손안으로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아……. 찝찝한데. 악귀의 힘이잖아.”
은석이 손바닥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청안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이미 먹어 악귀의 기운을 없앴으니, 지금은 순수한 재생 능력의 결정체일 뿐이다.”
은석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만 내려가지. 무거운데.”
청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바라봤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괴수 주제에.’
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 조금만 더 있어 보지. 하지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저승에 돌려줄 테니 알아서 해라.”
“냐오옹.”
청안이 은석의 무릎에 얼굴을 비벼 댔다.
청안의 걱정과 달리 은석은 팔찌를 염라대왕에게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들먹거리는 게 신경을 긁기는 했지만, 악귀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내가 없는 사이 집을 지키기에 아주 좋겠단 말이지.’
아직 은석과 거리가 멀어지면 소환 해제되는 귀속령과 달리, 청안은 은석이 살아 있는 한 이승과 저승 어디에 있든 문제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석이 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은석을 가장 먼저 발견한 황희준이 눈물을 글썽이며 뛰어왔다.
자신에게 안기려는 황희준을 은석이 손을 뻗어 막았다.
“형님, 정말 걱정했습니다.”
황희준의 뒤를 이어 헌터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 괜찮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이승원 팀장이 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건 우리가 해야 할 질문입니다.”
한울 길드의 백재현이 성큼성큼 다가와 은석을 와락 껴안았다. 그의 포옹에 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맙습니다. 우리 동료들을 잡아먹은 괴물 놈을 없애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모두 상처가 많네요. 제가 쓰러져 있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은석이 도적 팔귀를 죽인 직후, 낯설고 두려운 존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성성이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백재현을 제외한 한울 길드는 전멸한 상태였기에 영웅 길드의 헌터와 용병만으로 벅찬 싸움이었다.
하지만 은석이 깨어나기 직전, 그들은 무사히 던전을 클리어했다.
“형님,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요. 던전 브레이크까지 고작 한 시간 남겨 두고 클리어했다는 거 아닙니까.”
백재현 팀장과 한울 길드원이 팔귀에게 공격당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황희준이 성성이와 싸운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형님이 주신 단검으로 성성이들을 솨악솨악 베는데…….”
현장에 도착하자 황희준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현장은 처참했다. 도적 팔귀는 헌터들의 시신을 찢고 씹다가 버렸다.
영웅 길드가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은석은 해머를 소환해 팔귀에게 먹히지 않은 헌터의 영혼을 찾아다녔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헌터들은 근처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저승에 갈 수 없다. 결국, 이 안에서 소멸할 거니까 빨리 일어나라.”
은석의 말에 순순히 그를 따라나서는 영혼이 있었지만, 공격성을 보이는 영혼도 있었다.
“아, 귀찮네. 이거. 청안아!”
청안이 나타나 헌터들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며 마무리되었다.
은석이 헌터들과 함께 던전을 나왔다. 입구에는 응급차와 마정석을 캐기 위한 채굴팀이 대기 중이었다.
던전을 나온 은석의 손에 이승원 팀장의 개인 짐꾼이 잡혀 있었다.
이승원이 놀라 은석과 짐꾼을 번갈아 쳐다봤다.
“김은석 헌터님, 왜 제 짐꾼을…….”
중년의 남자는 굵은 넝쿨로 묶여 있었다.
자신의 짐꾼이 묶여 있는 것도 놀랐지만 그것보다 이승원이 경악한 것은 짐꾼의 얼굴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의 짐꾼으로 일했던 남자였다. 말수는 적었지만, 불편함 없이 일을 잘 처리해서 사냥 외에도 대부분의 일을 맡겼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묶여 있는 남자의 얼굴은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헌터님! 설마 이분의 입을 찢은 겁니까!”
이승원 팀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들은 모른다. 이승원의 개인 짐꾼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도적 팔귀의 부하, 굼이 빙의된 자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던전 안에서 쇼크가 오셨는지 자해를 하고 계시더군요. 큰일 나기 전에 제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묶어 놓은 거고요.”
“킥킥킥, 바보. 저 말을 믿다니.”
어느새 날아와 은석의 어깨에 앉아 있던 다온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내가 잘 지키고 있었으니까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해. 그런데 저 아저씨가 굼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던전 안에서 은석은 잠깐잠깐 악귀의 기운을 느꼈었다.
모두 잠을 청하는 사이, 은석은 영웅 길드의 헌터와 짐꾼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때 이승원의 개인 짐꾼의 얼굴에 난 상처가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장면을 본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상태창.
[김동철, 58세, E급 각성자, 짐꾼]
그리고,
[최하급 악귀, 굼, 도적 팔귀의 수하].
굼은 주로 병든 자에게 기생하며 살았다.
아픈 사람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기생하기 편했다. 그렇지만 일반 사람, 특히 움직임이 많은 사람의 빙의는 달랐다.
끊임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은석이 본 것은 굼의 찢어진 눈과 입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영웅 길드에서도 사상자가 많았지만, 한울 길드는 백재현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사망자가 많은 만큼 던전 앞에 수많은 응급차가 서 있었다.
“최 차사님 오셨습니까?”
그리고 망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저승차사들도 있었다.
“고생했다. 던전 안에서 죽은 망자들은 어디 있느냐.”
은석이 청안을 소환했다.
청안이 삼킨 망자들을 뱉어 냈다.
저승차사들이 다가와 망자 인도 절차를 빠르게 진행했다.
청안이 짐꾼에게 다가가 그의 발목을 깨물자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청안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짐꾼의 얼굴에서 찢어진 상처가 사라졌다.
청안이 저승차사들과 함께 저승으로 들어가자, 은석의 팔찌에서 푸른 무늬가 사라졌다.
“이분도 병원으로.”
굼이 빠져나가 정신을 잃은 이승원의 짐꾼을 응급차로 옮겼다.
“저기…….”
돌아보자 김세은이 서 있었다.
“네?”
“감사해요. 덕분에 무사히 던전을 나왔어요.”
김세은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은석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울 길드는 전멸했는데요. 영웅 길드만 살았다고……. 김세은 헌터님은 보기랑 다르게 이기적인 분이시군요.”
은석의 대답에 놀란 김세은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저기, 이봐요!”
은석이 피식 웃으며 김세은을 뒤로하고 걸어 나왔다.
미리 나와 있던 황희준이 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님, 여깁니다.”
“성성이 죽이고 마나석은 좀 빼냈어?”
조수석에 앉은 은석이 황희준에게 물었다.
“마나석은요.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번 던전은 기본급뿐이겠어요. 고생은 엄청나게 했는데 말이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네. 마나석 좀 뽑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