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은석이 지박령의 머리를 잡은 손을 밖으로 확 빼내자 어둠 속에서 쑥 빠져나온 가로등 귀신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상체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하체는 이미 어둠처럼 검고 긴 흔적만 남아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
지박령이 앙칼진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든지.”
은석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대는 지박령의 얼굴을 걷어찼다.
“아아악!”
“이건 김은석을 놀라게 해서 오줌을 지리게 만든 죄. 그것 때문에 괴롭힘도 당하고 많이 힘들었었지. 우리 은석이가.”
바닥에 처박힌 지박령을 지근지근 밟아 대기 시작했다.
“나,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걱정 마. 이제 한 놈씩 차례대로 소멸시켜 줄 테니까.”
파사삭…….
가로등 귀신이라고 불리던 지박령이 마침내 소멸하여 사라졌다.
희미한 빛을 내며 깜빡이던 가로등이 거짓말처럼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수리했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던 반복된 깜빡임이 드디어 멈춘 것이었다.
동시에 은석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최하급 귀물을 소멸시켰습니다]
[귀력이 상승하였습니다]
[소멸시킨 지박령을 귀속할 수 있습니다. 귀속을 명하시겠습니까?]
빠르게 올라가는 메시지 중 가장 마지막 문장이 눈에 띄었다.
‘지박령을 귀속할 수 있다고?’
잠시 고민하던 은석이 귀속을 명령했다.
“귀속.”
사라졌던 지박령이 은석 앞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가 가득한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라졌던 하체가 나타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은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박령.
[상대방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둘 수 있습니다]
지박령이었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은석의 첫 귀속령.
“소환 해제.”
그의 말에 귀속령이 빠르게 사라졌다.
은석이 상태창을 다시 살펴보려는 순간, 남자가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남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네, 제가 지나다가 발견했는데요. 여기가 어디냐 하면…….”
휴대폰을 끄고 남자를 가로등 아래 가장 환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상태창.”
구급차가 올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은석이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 김은석
프로젝트명: 저승 헌터
클래스: 힐러(F등급)
히든클래스: 네크로맨서(저승형 Lv2)
[특성]
귀안(승계)
생력(승계)
귀력: 200/200
[스킬]
정보탐색: Lv1
[귀속령]
지박령: 일시적인 속박
‘레벨이, 올랐잖아? 귀력도 100이나 증가했어. 레벨당 100씩 증가하는 건가.’
귀물을 소멸시키면 레벨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혹시 몬스터도 잡으면 레벨이 올라갈까?’
F급에만 머물렀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헌터. 은석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까 맞은 코가 아픈지 남자가 끙끙거리자 은석이 손가락을 남자의 코에 댔다.
[생력을 전달합니다]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이 남자에게 스며들었다.
아파서 인상을 쓰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깊은 잠을 자듯 편안하게 바뀌었다.
“이제 하급 귀물 따위에게 시달리지 않을 겁니다.”
* * *
“너무 늦었네.”
은석이 살그머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과 달리 가족 모두 거실에 앉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둘째 누나 김은영이 득달같이 달려와 은석의 등을 후려쳤다.
“아야.”
역시 아프다. 본인만 느끼지 못할 뿐 진짜 각성한 게 아닐까.
“야! 연락한 지가 언젠데 지금 기어들어 와.”
첫째 누나인 김은희가 팔짱을 끼며 은석을 향해 혀를 찼다.
“잘한다. 우리 다 늙어 죽으면 들어오지. 왜 벌써 들어와?”
거실로 들어온 은석의 등을 다시 때리려고 손을 치켜드는 김은영.
아버지가 김은영의 손을 잡았다.
“됐다. 별일 없이 들어왔으면 된 거지. 다들 들어가서 자거라. 늦었다.”
아버지의 말에 금세 기가 죽은 두 누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보자, 은석은 예전처럼 혼자가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앞으로 헌터를 하게 되면 집을 비우는 일도 잦을 것이고, 숨기는 것보다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하자.”
“안 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단호한 은석의 말에 모두 자리에 앉았다. 누나들이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누나들까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은석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낮은 등급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헌터로 활동해 보고 싶습니다.”
엄마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은석아, 아까 오전에는…….”
“걱정하실까 봐 그때는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다혈질인 김은영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그녀를 막았다.
“반대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왜 그러시는지 이유도 잘 알고 있고요. 이미 느끼셨겠지만 제가 죽었다 살아난 이후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 더는 예전처럼 길을 걷다 픽픽 쓰러질 만큼 허약하지 않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지기는 했지.”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보고 싶습니다. 더는 남의 눈치를 보고 허리를 낮추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은석에게 물었다.
“등급도 등급이지만, 네 클래스가 힐러라고 들었다.”
“그래서 해 볼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F등급의 전투계였다면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힐러는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존재입니다. 저처럼 낮은 등급이 몬스터와 직접 부딪칠 경우는 많이 없습니다.”
은석에게 처음 생긴 가족이었다.
헌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걱정이 한가득인데, 굳이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제가 늦은 이유는 각성자 협회에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각성자 협회?”
“네, 등급이 낮아 길드에는 가입을 못 합니다. 각성자 협회에 신입 헌터로 등록해 놓으면 각자에게 맞는 마력 등급에 따라 던전을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김은희가 옆에 앉아 있는 김은영의 팔을 툭 쳤다.
“야! 헌터 덕후. 맞아? 저런 게 있어?”
김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있어. 길드에 들어가지 못하는 헌터들을 용병으로 일하게 해 주는.”
“저는 제 위치를 잘 압니다. 절대 욕심을 부려 위험한 곳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프리랜서라 원하지 않으면 던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가족 모두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은석 또한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네 뜻은 알았으니 생각해 보도록 하자. 피곤할 테니 그만 들어가 쉬어라.”
방으로 들어온 은석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일단 말은 했으니 가족은 해결됐고, 이제 훈련을 해야겠군.’
은석이 일어나 창문 옆에 걸린 작은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훈련장.”
가고자 하는 곳의 이름을 부르며 그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쇠로 된 굵은 손잡이가 나타났다.
은석이 손잡이를 잡고 밀자, 두꺼운 철제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의 앞에 좁고 긴 통로가 나타났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좁은 길을 걷던 은석의 눈앞에 건조하고 붉은 공간이 펼쳐졌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걸어온 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훈련장이…… 흠, 지옥인가?”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지.”
“으악!”
당연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최성운 차사.
은석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깜짝이야. 뭐 하시는 겁니까?”
최 차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은석을 쳐다봤다.
“뭐 하긴. 널 가르치려고 왔지. 너는 여기를 훈련하러 온 것이 아니냐?”
“훈련하러 온 거는 맞는데요. 제가 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승에 살아 있는 자가 들어왔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은석이 서 있는 저승의 훈련장은 불에 타고 있는 듯 온통 붉었다.
훅 들이마신 공기가 뜨거워 마치 불가마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훈련장이 굉장하네요. 동네 사우나처럼 뜨뜻하고.”
은석의 말에 최 차사가 품에서 부채를 꺼내 한 번 휘둘렀다.
금방이라도 화염에 휩싸일 것 같은 붉은 하늘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뜨거웠던 콧속에 금세 얼음이 송골송골 맺혔고 갑자기 낮아진 온도 때문에 한기가 몰려왔다.
“이게 뭐죠?”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무엇보다 시간이 없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것들은 뭡니까? 사방이 얼음으로 가득한데 무(無)라뇨.”
최 차사가 다시 한번 더 부채를 휘두르자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경기장이 나타났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경기장에 놀란 은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저승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곳이다. 이곳은 특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니 더더욱 그러하고.”
훈련장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였다.
강렬한 햇살도 없지만 그렇다고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하늘도 아니었다.
훈련하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최 차사가 뒷짐을 지으며 천천히 은석의 주변을 걸었다.
“전에 봤을 때와 육체가 달라진 듯하구나. 나름 열심히 체력 훈련을 한 모양이군.”
은석이 가슴을 내밀었다. 그런 모습에 최 차사가 콧방귀를 끼었다.
“이제는 던전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서너 걸음 걷다 죽을 정도는 되겠구나.”
눈을 가늘게 뜨고 최 차사를 노려봤지만 최 차사는 은석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무예를 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예전에 던전을 오랫동안 다녔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싸웠지?”
“칼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검술을 할 줄 아는 것이냐.”
최 차사가 은석에게 목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어디 한번 휘둘러 보아라.”
5년을 던전에서 살아남은 은석이었다.
비록 검사는 아니었지만 경험으로 쌓은 실력은 나쁘지 않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네 검술 실력은 다섯 살 먹은 아이보다 못하구나.”
은석이 휘두르는 목검을 본 최 차사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이렇게 보여도 실전에서는…….”
“됐다. 내가 무예를 연마한 지 천 년이 넘는다. 검을 잡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은석의 손에서 목검이 사라졌다.
“가벼운 목검을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네 숨은 벌써 가빠진다. 먼저 기초 체력부터 시작하자.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달려라.”
은석이 최 차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해가 뜨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훈련만 하고 있을 수는…….”
최 차사가 콧방귀를 꼈다.
“그런 얄팍한 수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어리석구나. 저승의 시간이 찰나라는 것을 이미 알 텐데.”
오늘은 훈련장 적응도 할 겸 가볍게 혼자서 몸만 풀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꼼수가 통하지 않자 은석이 두 눈을 꽉 감았다.
감은 눈을 뜨자, 그의 앞에 끝없이 이어진 조깅 트랙이 나타났다.
“헉!”
은석이 트랙을 보며 외마디를 내뱉자, 최 차사가 싱긋 웃었다.
“자, 첫 번째 훈련을 시작해 볼까.”
* * *
얼마나 지났을까.
수만 번 내리친 목검에 찢어질 것 같았던 팔은 어느새 통증조차 사라졌다.
자신의 팔이 아닌 것처럼 이제는 기계적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몇 번째 만 번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만 번을 채운 후, 은석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며칠, 아니 몇 달은 지난 거 같은데.’
은석이 길게 숨을 뱉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해도 달도 없는 곳이었다. 그의 생각에 따라 뉴욕의 타임스퀘어도, 은석의 집 앞마당이 되기도 했다.
누워 있는 은석의 눈앞에 최 차사의 무표정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훈련보다, 마주하는 얼굴이 최 차사밖에 없다는 게 더 괴롭다.’
무(無)의 공간에서는 배도 고프지 않았다.
반복되는 힘든 훈련에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도 잠시 휴식을 취하면 곧 회복되었다.
이곳은 훈련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이자 최악의 장소였다.
은석의 숨소리가 안정되자, 최 차사가 다시 목검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가로 베기다. 네 몸이 검의 기초를 완전히 익히기 위해서는 반복만이 방법이다. 모든 훈련에는 기초가 아주 중요한 법이지.”
은석이 최 차사가 내민 검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군말 없이 다시 자세를 잡은 은석을 보며 최 차사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차사님, 가볍게 십만 번부터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