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50)
“듣고 잊으십시오. 절대 머리에 담아 두셔서는 안 됩니다. 녹음도!”
임범철 국장이 각별한 주의를 주었다.
그를 마주 보는 정병훈 사장과 이관희 변호사가 입을 다물고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모친이 말씀하신 대로 국정원 팀장급 요원이 맞습니다.”
순간.
“흑!”
정병훈 사장과 이관희 변호사가 순간 엄청 놀랐다.
임범철 국장이 계속 말했다.
“CIA에서 차 팀장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맞습니다.”
점입가경이다.
정병훈 사장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확 변했다. 거의 사색이 되었다.
“흐윽!”
이관희 변호사 역시 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쩐지…….’
전날 서연이 사건으로 차은성이 여느 사람과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국정원 팀장급 요원이었다니.
묵직한 망치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 같은 충격을 느끼는 정병훈 사장과 이관희 변호사였다.
임범철 국장이 말을 이으며 정병훈 사장과 이관희 변호사를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차 팀장은 출국했을 겁니다.”
“추, 출국이오?”
정병훈 사장이 놀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네. 국내에 남아 있을 경우. 주변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차 팀장은 한국을 떠나 해외로…….”
임범철 국장의 말에 정병훈은 알아챘다.
차은성이 어쩌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아내 조혜선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관희 변호사는 차츰 놀람을 가라앉히며 눈을 반짝였다.
이해가 된다.
CIA가 어떤 곳인가?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데, 자칫 주위 사람들이 잘못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범철 국장은 차분하게 설명하며 정병훈 사장과 이관희 변호사에게 각별한 주의와 침묵을 부탁했다.
“함부로 입에 올리시면 안 됩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차 팀장의 모친에 관해서는 차 팀장에게 조금 들은 바가 있습니다만.”
임범철 국장이 정병훈 사장에게 무엇인가를 짧게 말했다.
정병훈 사장은 당황하는 기색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관희 변호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시 뒤.
정병훈 사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은성이. 무사하겠지요?”
임범철 국장은 흠칫하더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침묵했다.
“임 국장님.”
정병훈 사장이 임범철 국장을 불렀다.
“안전하다고, 무사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차 팀장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CIA이니까요.”
“그, 그럼…… 주, 죽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병훈 사장이 매우 더듬거리며 물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임범철 국장이 말하며 이관희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이관희 변호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구하겠습니다!
그는 무언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정병훈 사장은 아내 조혜선을 생각했다.
‘으, 은성이가 잘못되면…….’
모르긴 몰라도 식음을 전폐하고 죽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아내 조혜선에게 아들 차은성은 한없이 미안하기만 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해외에서 살해당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조혜선은 자신의 손에서 삶을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
정병훈은 그것이 가장 걱정되고 염려스러웠다.
차은성의 죽음보다 아내 조혜선이 죽으려고 할까 봐. 자살 충동을 느낄까 봐. 그는 내심 매우 두려웠다.
* * *
열흘 후.
천장에 매달려 있는, 좌우로 흔들거리는 작은 백열전구가 사방을 밝히는 지하실.
주위는 창문 하나 없는 콘크리트 벽이었고 출입문은 녹슨 철문이었다.
안에는 오직 하나!
천장과 연결된 쇠사슬에 양손이 칭칭 묶인, 다 죽어 가는 고깃덩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이다.
뚝뚝.
발아래로 굵은 핏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바닥에는 선혈이 흥건했다.
철문 밖.
한 사람이 서서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두 눈동자.
꽤 오랫동안 눈동자의 주인이 안을 보았다.
이윽고.
눈동자의 주인이 우로 돌아섰다.
저벅저벅.
나직한 발걸음 소리를 흘리며 그가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 * *
타이베이 공항.
모스크바, 텔아비브를 거쳐 차은성이 타이완에 입국했다.
곧바로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은성은 택시를 잡아타고 모처로 향했다.
* * *
끼익.
타이베이 교외에 자리한 대저택.
택시가 서자 정문 안쪽 좌우에 서 있는 두 남자가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남자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중 한 남자가 오른손을 들더니 입 가까이 대고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덜컥.
택시 뒷좌석 문이 열리며 차은성이 내렸다.
곧 택시가 낮은 소리를 내며 저택을 떠났다.
부우웅.
차은성은 잠깐 동안 서서 저택 정문을 바라보았다.
큼직한 창살문.
이내.
차은성이 천천히 정문으로 다가가자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마주 다가왔다.
곧.
차은성과 남자가 큼직한 창살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남자가 정중하게 물었다.
한데.
그 모습과 달리 차은성을 주의하고 경계하는 속내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차은성이 픽 웃더니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수가 양 대인을 만나러 왔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남자가 엄청 놀라며 실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네. 지시를 받았습니다.”
사내가 급히 대답하며 머리를 들더니 다른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안에 알려. 귀수께서 오셨다!”
다른 남자가 급히 차은성을 보았다.
창황한 표정이었다. 얼굴 가득히 대경이란 감정을 띠고 두 눈동자를 찢어져라 크게 휘둥그레 떴다.
그 모습에 차은성은 소리 없이 고소의 눈빛을 띠었다.
별칭이라고 할까?
평소 사용하지 않는 닉네임이라고 할까?
잊힌 옛 호칭을 사용하려니 어색하고 무안하다.
* * *
중국풍의 넓은 정원을 지나 꾸불꾸불한 회랑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주변 모든 것이 고풍스러운 청조 말의 양식이다.
치파오를 입은 여성.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차은성은 옛 추억에 잠겼다.
대만 사자방의 방주 양승조의 저택.
과거, 잠깐 동안 살았었다. 그런 이유로 크게 낯설지는 않다.
차은성은 안내를 받으며 주변을 담담히 둘러보았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회상의 눈빛을 띠었다.
‘그때가 참 좋았었지.’
차은성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내 양승조를 생각했다.
―조직원 2만 3천 명의 거대 조직이자 대만 삼합회 3대 조직인 사자방의 방주다.
또한.
아버지 차명인을 개인적으로 의제라 부른다.
전날 마카오에서 작전할 때 만났던 죽림방주 화용진이 말한 것처럼,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낀다.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지만, 이젠 다 죽고 유일하게 남은 자식이 딸 양령이다.
안내를 받으며 걷는 차은성의 마음은 무거웠다.
개인적으로 의부라 부르는 양승조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화교.
차은성은 해당 거대 조직을 염두에 두었다.
―전 세계 각지에 차이나타운이 없는 곳이 없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에 삼합회가 있다.
그런 말이 있다.
미국 내에 상당수의 차이나타운이 있다.
차은성은 퇴직자이기에 더는 NIS와 한국 해외 공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화교의 도움을 받아 안전 가옥, 정보, 무기, 장비 일체를 구할 생각이었다.
조만간 위장 신분으로 미국에 입국할 작정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전쟁 아닌 전쟁을 할 계획이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상.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최소한 죽을 때 죽더라도, 그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엄청난 피해와 손실을 안겨 줄 작정이다.
그리고 비장의 한 수, 히든카드로 모스크바와 텔아비브를 염두에 두었다.
자신이 미국 내에서 활동할 때, 모스크바와 텔아비브는 도움을 주기 힘들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지시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하지만 화교는 다르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런 화교를 자신의 우군으로 끌어들이자면 필히 양승조와 같은 거물의 도움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형제!
끈끈한 의리를 바탕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
해당 네트워크가 가동되어야만 미국 내에 있는 화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미국 내에서 그들과 전쟁을 할 경우.
그들은 필히 미국 경찰, CIA, FBI, 국토 안보부 등.
동원 가능한 모든 국가기관을 움직여 자신을 추적, 사살하려 할 것이 자명하다.
미국 내에 퍼져 있는 화교 조직망을 우군으로 만들어야 해당 전쟁에서 생존 가능 확률이, 승률이 높아진다.
그 때문에 차은성은 의부 양승조를 찾았다.
* * *
잠시 뒤.
야외 다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양승조에게 이르렀다.
안내해 준 여자가 양승조의 우측으로 다가가 서며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모셔 왔습니다.”
양승조가 돌아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가 이내 뒤돌아서며 차은성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서 있는 차은성을 지나 뒤로 걸어가는 동안.
양승조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은성아.”
활짝, 매우 밝게 웃으며 양승조가 양손을 좌우로 벌렸다.
“의부님.”
차은성이 머리 숙여 인사한 후, 서 있는 양승조에게 걸어갔다.
이내.
차은성과 양승조가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잘 왔다.”
양승조가 손으로 차은성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차은성이 그간의 안부를 묻자, 양승조가 가슴에서 차은성을 떼어 내며 두 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나야 늘 잘 지내지.”
만면에 미소를 띤 양승조.
차은성을 마주 보는 그의 두 눈동자에 따뜻한 정감이 흘렀다.
* * *
수여 초 후.
다탁을 사이에 두고 차은성과 양승조가 마주 앉았다.
차은성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군요.”
“하하. 네가 온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보이차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우려내 오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의부님.”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래. 듣자 하니 미국 애들이 널 노린다면서?”
“네.”
“너무 큰 적을 만들었구나.”
“제가 원해서 그들을 적으로 돌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저를 적으로 돌린 것이죠.”
“하긴…….”
양승조가 이해한다는 투로 말했다.
―형제의 복수!
삼합회의 전통 중 하나다.
복수하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을 형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삼합회는 의외로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을 한사코 고수하려 한다.
“그래.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느냐?”
양승조의 물음에 차은성이 내심 긴장했다.
“미국 내의 화교 조직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전쟁을 할 생각이냐?”
“저를 죽이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습니까?”
“조용해질 때까지 숨어 있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다고 그들이 과연 절 내버려 둘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은성의 말에 양승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