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49)
출국
“차 팀장은?”
박희오 원장이 박영광 과장을 바라보았다.
박영광은 멈칫하더니 앉은 주철현 국장, 윤희상, 선우종을 둘러보았다.
“허, 험. 긴급 요원 피신 프로그램에 들어갔습니다.”
순간.
박희오, 윤희상, 선우종, 주철현이 거의 동시에 움칫움칫했다.
―해당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원장이라고 해도 관여하지 못한다.
해당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관리자, 박영광만이 해당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고. 관련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위험에 처한 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 관련 정보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 원장조차 해당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내부 규정에 관련 몇몇 사항이 명문화되어 있다.
윤희상 1차장이 박영광 과장에게 소리쳤다.
“퇴직자인데 무슨 요원 보호 프로그램이야?”
박영광이 윤희상을 마주 보았다.
“그럼, CIA 애들에게 죽게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 1차장님!”
강한 항의의 목소리.
“박 과장!”
윤희상 1차장이 소리쳐 박영광을 불렀다. 마치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 같았다.
선우종이 급히 말하며 윤희상 1차장과 박영광 과장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 잠시만.”
선우종은 재빨리 박희오 원장을 바라보았다.
“원장님. 일단 차 팀장의 안전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박희오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
이어.
박희오 원장이 말하며 박영광을 돌아보았다.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야. 박 과장.”
“네, 원장님.”
“차 팀장이 퇴직자인 건 알고 있지?”
“네.”
“당분간만이야.”
“네.”
박영광의 말에 박희오 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상황이 많이 좋지 않다.
예상대로 미국은 딱 잡아뗐다.
―예의 커플은 SOG 요원이 아니며 선량한 미국 국적의 국민이다.
한국 국정원이 자국 국민인 커플을 불법으로 무단 체포. 스파이로 만들려 한다.
이는 한미 동맹에 매우 중대한 불안 요소가 될 수 있으니. 즉각 자국 국민인 두 커플의 신병을 미국 정부에 넘겨 달라.
주한 미국 대사가 청와대를 찾아가, 대통령 면전에서 그렇게 강력히 항의했다.
적반하장도 그런 적반하장이 없다.
대통령이 열을 받을 대로 받았다. 그리고 그 열 받은 불똥은 곧바로 국정원과 원장 박희오에게 튀었다.
“미국 놈들이 내미는 터무니없는 오리발을 뭉개 버릴 증거가 지금 당장 필요해!”
박희오 원장이 청와대의 강력한 요구를 입에 올렸다.
윤희상 1차장, 선우종 2차장, 주철현 국장, 박영광 과장.
박희오 원장과 동석한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
증거라니?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속내를 가감 없이 내보였다.
황당하다!
박희오 원장이 국내를 총괄하는 선우종 2차장을 쳐다보았다.
“2차장.”
박희오 원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없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지금으로서는 그들의 자백 외에 다른 증거가 없습니다.”
선우종 2차장의 대답에.
“끄으응!”
박희오 원장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내 입장이 지금 아주! 많이! 곤란해. 다들 알고 있겠지?”
박희오 원장이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기대가 산산이 깨어지고 난 몰라 식으로 나오는 미국 정부의 태도에 이만저만 난처한 입장이 아니다.
윤희상 1차장, 선우종 2차장은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박희오 원장이 주철현 국장을 돌아보았다.
“주 국장.”
“죄송합니다, 원장님.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딱히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박 과장!”
박희오 원장이 박영광을 쳐다보았다.
박영광은 침착하게 말했다.
“CIA 애들이, 그것도 전략적 자산에 해당하는 SOG 요원들을 동원해 차은성 팀장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증거 같은 것을 남길 정도로 그리 허술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원장님께서 저희들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박영광의 대답에 박희오 원장이 우거지상을 짓더니.
“염병!”
엄청 화냈다.
이어.
윤희상 1차장을 돌아봤다.
“1차장.”
“네.”
“뒷문은?”
“미국 애들이 전혀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SOG를 움직이려면 작전 부국장의 재가가 있어야 하잖아.”
“그게…….”
윤희상 1차장이 박희오 원장의 눈치를 보았다.
“말해!”
박희오 원장이 신경질적으로 크게 말하자 윤희상 1차장이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조지 럭스 부국장이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뭐?”
박희오 원장이 깜짝 놀랐다.
선우종 2차장, 주철현 국장, 박영광 과장 역시 거의 동시에 깜짝 놀랐다.
다들 윤희상 1차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비정상적인 계통에서 이번 암살 건이 추진된 것 같습니다.”
“설마 비공식?”
박희오 원장이 대경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윤희상 1차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큽니다!
윤희상 1차장의 무언에 박희오 원장은 진한 당혹의 눈빛을 띠었다.
비공식 경로.
그것은 미 상원 정보위원회의 작전 승인을 거쳐 CIA 국장이 다시 재가하는 통상적인 단계를 건너뛰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백악관의 은밀한 오더라는 말이 된다.
팀장이라고는 하지만 갓 퇴직한 한국 NIS의 요원을 죽이라고 백악관에서 CIA에 지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이유로 박희오 원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차 팀장이 무슨 엄청난 거물이라고 백악관에서 죽이라고 CIA에 지시. 전략 자산인 SOG를 움직이게 해?”
박희오 원장이 언성을 높였다.
“…….”
윤희상 1차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침묵하며 박희오 원장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그사이.
선우종 2차장이 박영광 과장을 바라보았다.
“박 과장.”
“네, 2차장님.”
“혹시 차 팀장이 백악관이 죽이려고 할 정도로…… 우리도 모르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일순.
박희오 원장, 윤희상 1차장, 주철현 국장이 선우종 2차장과 박영광을 번갈아 보았다.
그럴 수도 있다!
세 사람은 은근 그런 감정을 내보였다.
박영광은 태연히 대답하며 선우종 2차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 있다면 이미 제게 보고가 올라왔을 겁니다. 그리고 차 팀장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미 서부에서 작전 중이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세바스찬 박이 뭔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박영광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박 팀장을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오히려 세바스찬 박을 죽여 그 입을 영원히 봉하는 것이 타당하지.”
박희오 원장의 말에 다들 수긍의 눈빛을 띠었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거야?”
박희오 원장이 신경질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
윤희상 1차장, 선우종 2차장, 주철현 국장, 박영광 과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그들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했고. 그 때문에 박희오 원장은 매우 답답해하며 거듭 화냈다.
한동안 원장실 안에서 박희오 원장의 고성이 이어졌다.
밖에 있는 비서실 직원들 귀에 들릴 정도로 고성은 매우 컸다.
* * *
그날 오후 6시 15분.
인천국제공항 출국 심사대로 차은성이 걸어가 섰다.
“플리즈 패스포트.”
출입국 관리 사무소 직원의 말에 차은성이 상의에서 여권을 꺼냈다.
직원이 차은성이 내민 위조 태국 여권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페이지를 몇 장 넘기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직원이 서 있는 차은성을 간간이 힐긋거렸다.
이어.
위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권 감별기에 차은성의 여권을 대 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위조 여권일 경우. 소리 없이 감별기 상단에 작은 불빛이 들어온다.
직원이 여권을 수중에 쥐고 서 있는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마크 프린 수퍼파라트 씨.”
태국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지 직원이 은근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 때문에 아주 작은 주름이 두어 개 잡혔다.
“네.”
“입국하신 지 사흘이 지나셨는데. 출국이 의외로 빠르시군요.”
“전 바쁜 사람입니다. 업무.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비즈니스 때문에 급히 출국합니다.”
다소 어눌하고 중간중간 말이 툭툭 끊기는 차은성이었다. 영락없는, 영어가 서툰 태국인이었다.
“좋습니다.”
직원이 말과 함께 스탬프를 들더니 힘껏 내리찍었다.
쾅!
직원이 내민 여권을 차은성이 받아 들었다.
“탱큐.”
“유 아 웰컴.”
직원의 대꾸를 뒤로하고 차은성이 좌로 돌아섰다.
피식.
소리 없이 실소했다.
세계 모든 공항의 입출국 시스템이 비슷하다. 입국은 까다롭지만, 상대적으로 출국은 수월하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이를 상세히, 꼼꼼하게 조사하진 않는다.
차은성은 왼손에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오른손에는 여권을 쥔 채 천천히 탑승구 방향으로 걸어갔다.
완벽한 위조 여권으로 인천국제공항 입출국 시스템을 통과했다.
잠시 후.
차은성은 탑승 수속을 마치고 타이베이행 민항공기에 탑승했다.
* * *
사흘 후. 서울 모처 고급 한정식집.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잔칫상을 마주하고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등 뒤 병풍을 배경으로 앉은 임범철 국장.
맞은편에 앉은 정병훈 사장과 이관희 변호사.
이관희 변호사의 소개로 임범철 국장과 정병훈 사장 사이에 짧은 인사가 오갔다.
서너 번 술잔이 오간 후.
정병훈 사장이 아내 조혜선을 언급했다.
“……으, 은성이가 뉴스에 나온…….”
조혜선의 말은 정병훈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설마, 의붓아들인 차은성이 국정원 요원이고, 뉴스에 나온, CIA가 죽이려고 하는 팀장급 요원일 줄이야.
아들 차은성이 죽는다고, 조혜선이 거의 발작에 가깝게 행동하는 바람에.
정병훈은 급히 이관희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날 서연이 사건으로 임범철 국장과 안면이 있는 이관희 변호사가 중간에 다리를 놔 주었다.
국정원과 아무 연줄이나 인맥이 없는 이관희 변호사로서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찰청 정보국장인 임범철은 차은성 덕분에 안면이 있어 접근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특히 기자회견 당사자라 이관희 변호사가 꽤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 결과.
바로 지금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정병훈은 아내 조혜선을 재차 언급했다.
“내리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계속 은성이를 찾고만 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은성이가 죽는다고 어찌나 찾는지…….”
임범철 국장은 정병훈 사장의 말을 들으며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차은성의 모친!
* * *
잠시 뒤.
임범철 국장이 뭔가 결심을 한 듯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
이어.
정병훈과 이관희 변호사를 번갈아 보았다.
“국가 기밀에……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임범철 국장이 심상치 않은 뉘앙스를 흘렸다.
정병훈 사장이 옆에 앉아 있는 이관희 변호사를 힐금거렸다.
의아한 얼굴이었다.
이관희 변호사는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사이.
임범철 국장이 매우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