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06)
그녀는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정선의 탈북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정선이 정말 탈북 했다면 평양에 남아 있는 부모와 가족들은 100%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교화소나 수용소에 감금되어 죽을 때까지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
‘미친 간나. 가족은 생각 안 하네.’
박정희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은근 바닥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우.”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
이정선과 사이가 좋았고, 평소 가까이 지낸 것이 필시 문제가 될 것이다.
자칫,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불이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박정희는 자신이 살고자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지도원 김양호가 혹 이정선에 관해 물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동료 접객원들이 평소 자신이 이정선과 친했다고 말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평소에 이정선과 사이가 좋았지?
라고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이정선과 거리를 둬야 한다.
박정희는 살고자 내심 필사적이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죄!
박정희는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 *
보위부에서 캄보디아 주 북한 대사관으로 파견 나온 중좌 박철상.
군복을 입은 모습이 매우 위압적이다.
그의 앞에는 지도원 김양호와 지배인 송봉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바짝 얼어붙었다.
양손을 허리에 착 붙이고 군인처럼 정자세를 취했다.
엄청 겁먹은 모습이었다.
한편.
박철상 중좌가 뒷짐을 지며 천천히 말했다.
“동무들.”
싸늘한 목소리.
김양호와 송봉해는 과도한 긴장감에 무의식적으로 그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꿀꺽, 꾸울꺽.
그들의 몸이 은연중에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것 같다.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평양에 있는 가족들의 목숨과 미래가 지금 이 순간 경각에 놓였다.
말 한 마디.
사소하고 작은 행동 하나.
그 모든 것에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목숨이 걸린 것 같다.
김양호와 송봉해가 두려움에 심신이 짓눌린 사이.
박철상 중좌가 말했다.
“이정선이라는 에미나이래 앞으로 24시간 내로 복귀하지 않으면.”
“…….”
“동무들이래 평양으로 압송되어 우리 보위부의 조사를 받게 될 것이오.”
박철상 중좌의 냉랭한 음성에 김양호와 송봉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질끈
두 눈을 내리감고 말았다.
들어갈 때는 두 발로 걸어서 들어가지만, 죽어서는 시체가 되어서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곳이 바로 보위부다.
아닌 말로.
틈이 있어 못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못이 들어감으로써 틈이 생긴다고.
보위부를 두고 사람들이 뒤에서 그렇게 쑥덕거린다.
북한 사람에게 보위부는 사실상 저승사자나 마찬가지다.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
그런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그사이.
박철상 중좌가 재차 말하려는데.
또,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박철상 중좌가 말을 중단하고 문을 돌아봤다.
서 있는 김양호와 송봉해는 문을 곁눈질했다.
“들어오라!”
박철상 중좌가 말하자 문이 열리며 한 군관이 들어왔다.
군관은 문을 닫고 뒤돌아서더니 박철상 중좌에게 북한식으로 경례했다.
박철상 중좌가 대충 손을 들었다가 내리며 물었다.
“뭔 일이가?”
“네! 중좌 동지. 평양에서 긴급 전문이래 왔습네다.”
“전문?”
“예!”
“말해 보라.”
박철상 중좌의 말에 군관이 서 있는 김양호와 송봉해를 힐금거리더니 박철상 중좌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있는 이정선이란 에미나이의 가족이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합네다.”
“메라고?”
박철상 중좌가 버럭 소리쳤다.
그 순간.
김양호와 송봉해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니.
풀썩, 풀썩.
다리에서 힘이 빠진 듯.
김양호와 송봉해가 일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종간나. 남조선으로 도망쳤구먼기래.”
박철상 중좌가 엄청 성난 목소리로 말하며 주저앉은 김양호와 송봉해를 바라보았다.
“이 반동 노무 새끼들.”
매우 거칠게 중얼거리더니 군관을 쳐다보았다.
“야아!”
“넵!”
군관이 급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평양으로 압송하기 전까지 가두라. 도망 못 가게 철저히 지키라. 알간!”
“예에, 중좌 동지.”
군관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양호와 송봉해는 박철상 중좌의 말에 그만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죽었다!
* * *
날이 밝아 올 무렵.
최라경을 선두로 안용국과 이정선이 산악 지대를 내려왔다.
잠시 뒤.
최라경이 외진 도로가에 서서 핸드폰을 꺼냈다.
곧 신일권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도착했어요.”
“OK. 좀만 기다려.”
“빨리 와요.”
“응.”
최라경이 짧은 통화를 뒤로하고 귀에서 폰을 뗐다.
폰을 끄고 상의에 집어넣으며 최라경이 안용국과 이정선을 돌아봤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가 올 거예요.”
“네.”
안용국이 짧게 대답하는 사이.
이정선은 불안이 가득한 눈으로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차하면 도망칠 작정인지, 그녀는 매우 긴장했다.
마음속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용국이 그런 이정선을 돌아보더니 이내 가까이 걸어가 섰다.
“정선아.”
이정선이 돌아봤다.
“오빠…….”
“괜찮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정선은 안용국을 마주 보며 말끝을 흐렸다.
탈북이라는 상황과, 틀림없이 뒤쫓고 있을 북한 대사관의 이들을 잊지 않고 유념한 이정선이었다.
* * *
몇 분 후.
한 대의 중고 SUV가 외진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부우우웅.
운전석에 앉은 신일권.
그의 뒷좌석에는 최라경, 안용국, 이정선이 앉아 있었다.
이정선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울먹이고 있었다.
영상통화라, 노년에 이른 한 남자의 얼굴이 폰의 액정을 독차지했다.
활짝.
밝게 웃는 안용국의 부친.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태국 내로 들어왔다면 이젠 안심해도 된다. 그리고 평양에 있는 정선이네 가족들은 내가 탈북 브로커들을 통해 손을 써 두었으니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아마 조만간 서울에서 만날 수 있을 게다.”
“흑.”
이정선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미래의 시아버지의 마음 씀씀이가 절로 이정선으로 하여금 울먹이게 만든다.
이정선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엉엉 울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안용국이 살며시 오른손으로 이정선의 어깨를 감싸며 액정을 보았다.
“아버지. 최곱니다. 하하하.”
“녀석. 목숨을 걸고 우리 집에 시집오려는 며늘아간데. 명색이 시아버지인 내가 가만있으면 안 되지. 그리고 용국이 네놈은 죽을 때까지 정선이를 잘 챙겨 줘야 해. 알겠어?”
“예에, 아버지.”
“잊지 마라! 정선이가 너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걸!”
“예에, 아버지.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서울에서 보자.”
“예에. 들어가세요.”
안용국의 말에 이어 액정이 이내 팟 꺼졌다.
이정선이 안용국에게 폰을 건네고 우로 돌아앉았다.
그러곤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소리 죽여 우는 이정선의 모습에 최라경이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창밖. 한적한 태국의 시골 풍경.
그사이.
안용국이 이정선에게 돌아앉으며 그녀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한편.
운전 중인 신일권이 실내 미러를 힐긋거렸다.
미러에 비친 안용국과 이정선.
두 연인의 모습에.
씨익.
신일권이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몇몇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호의라는 감정이었다.
* * *
방콕 교외 고급 주택 뒤뜰.
차은성이 파라솔에 앉아 전면의 풀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부는 바람에 풀에 가득찬 물의 수면이 살며시 일렁거리는 듯하다.
차은성은 오른손으로 글라스를 집었다.
얼음이 가득 든 콜라.
천천히 몇 모금 마시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라트비아 리가.
다문 입술 사이에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음.”
리가에서의 급습 이면에 북한이 있는 것 같다. 재외 북한 대사관의 동향이 그것을 무언으로 말하고 있다.
베트남, 프놈펜의 공항에 이정선과 비슷한 외모와 복장을 한 여인들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 북한 대사관의 이들을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해 조영국이 프놈펜에 남아 있다.
‘틀림없이 태국이나 베트남 공항에 북한 대사관의 이들이 나와서 이정선 씨를 찾으려고 혈안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북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프놈펜 공항으로 이동,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은 무리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북한 대사관의 이들이 제일 먼저 프놈펜 공항으로 갈 테니깐.
그리고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다.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북한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이정선을 태국으로 빼돌렸다.
콜라가 든 글라스를 내려놓고 차은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방콕 공항에도 틀림없이 북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대비해야 한다.
차은성이 생각하는 사이.
저벅저벅.
좌측에서 이창희가 서둘러 걸어오고 있었다. 발소리에 차은성이 무심히 이창희를 돌아보았다.
* * *
해가 지고 밤의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신일권이 운전하는 SUV가 방콕 교외에 있는 한 고급 주택 앞에 이르며 정차했다.
끼익.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철문이 우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이내.
이창희가 나타났다.
이창희는 철문 왼쪽에 서서 SUV를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곧.
신일권이 운전하는 SUV가 천천히 주택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SUV가 주택 안으로 들어오자 이창희가 서둘러 철문을 닫기 시작했다.
* * *
SUV에서 내린 신일권, 최라경, 안용국, 이정선이 차례대로 현관문을 열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마주하고 서 있는 차은성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차은성을 본 안용국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천만에요.”
차은성이 대답한 후 이정선을 바라보았다.
“이정선 씨.”
“네.”
이정선이 경계심을 풀지 않은 눈으로 차은성을 마주 보았다.
생면부지의 초면이다.
응당 경계하는 것이 맞다.
그새.
안용국이 슬쩍 이정선을 돌아보았다.
“믿어도 돼.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야.”
“아…….”
그제야 이정선이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미래 시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생각 외로 무척 깊고 큰 모양이다.
한편.
차은성은 입가에 작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작업이라면?”
안용국이 차은성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차은성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죠.”
안용국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아채고는 흠칫했다.
이정선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안용국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빠. 무슨 말이야?”
안용국은 이정선과 차은성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이정선에게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이정선이 당황하는 눈빛을 띠었다.
* * *
한눈에 보아도 소규모의 시설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설은 부족한 것이 없었다. 완벽한 고급 헤어 살롱의 시설이었다.
의자에 앉은 이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