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87)
이관희 변호사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타의에 의해 약물에 중독되었다!”
“…….”
“그리 봐야 하네.”
이관희 변호사가 말하며 은연중에 의문이란 감정을 내보였다.
“보통 약물중독에 의한 쇼크사는…… 장기간에 걸쳐 마약을 가까이한 이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자 사인인데. 주로 마약에 중독된 이들 중에서 그런 사인으로 죽는 이들이 있네.”
“…….”
“마약중독자들은 보통 몸에 관련 흔적들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
“서연이라는 여학생의 몸에는 그런 흔적들이 없었네. 흔히 비행 청소년들이 즐겨 하는 본드와 같은 것도 필히 몸에 흔적들이 남기 마련인데, 그런 흔적도 없었고.”
이관희 변호사의 말을 받듯이 차은성이 말했다.
“오서연이란 학생은 약물과 거리가 멀다?”
“…….”
“그 말씀이시군요.”
차은성이 말하며 이관희 변호사를 보았다.
그러자 이관희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리고 이상한 점이…… 약물이라는 것이 쉽게 구할 수 없는 거라네. 그런 이유로 고가인데.”
“…….”
“오서연 학생은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네.”
차은성이 동의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면 알바를 하진 않았겠죠.”
“자네도 알아보고 왔군.”
차은성의 말에 이관희 변호사가 눈을 반짝였다.
차은성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예서가 하도 아니라고 말하는 바람에…….”
“허허.”
이관희 변호사 웃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싶어 다른 가능성을 알아보았네.”
“다른 가능성이요?”
차은성의 물음에 이관희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약물을 접하는 사람이 과도한 양의 약물이 체내에 들어오면 왕왕 급성 약물중독으로 인해 쇼크사 하는 경우가 있네.”
“치사량의 약물이 체내에 들어갔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네.”
“…….”
“약물을 접한 이들은 적정한 양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는 게 일반적이네.”
“…….”
“세상 어느 미친 약물중독자가 죽을 수도 있는 양의 약물을 흡입하겠나? 그건 상식이라네.”
“서연이라는 죽은 학생이 약물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맞네. 내가 보기에는 약물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머네. 그런데 사인이 급성 약물중독으로 인한 쇼크사라는 건.”
“누군가가 서연이라는 학생을 치사량이 넘는 약물에 중독시켰다는 말이군요. 그것도 단시간 내에 말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관할 경찰서에 서연이라는 학생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었는데.”
“…….”
“얼마 전에 지하 주차장에서 괴한이 나타나 내 목에 회칼을 들이대고는…….”
이관희 변호사가 지하 주차장에서 당한 봉변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차은성이 흠칫했다.
“전기 충격기에 당해…… 정병훈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네. 혹시라도 그 괴한이 예서 학생을 찾아갈까 싶어서 말이네.”
이관희 변호사의 말에 차은성은 예서에게 왜 경호원이 붙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셨습니까?”
이관희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신고했지.”
꽤 강단 있는 어투다. 괴한에게 덜컥 겁을 집어먹은 건 아닌 것 같다.
“판사에 이어 변호사로 지금껏 살아오며 이런저런 많은 일을 겪으며 험한 사람들을 꽤나 상대해 보았다네.”
이관희 변호사가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 정도 일로 몸을 사릴 내가 아니네.”
일반인이라면 겁을 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인데, 판사와 변호사 생활을 하며 겪은 경험들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차은성이 물었다.
“혹 지하 주차장 영상을 경찰이 받아 갔습니까?”
“받아 갔네.”
“카피본이…….”
차은성이 물으며 말끝을 흘렸다.
명색이 변호사다. 증거를 밥 먹듯이 다루는데, 따로 카피본이나 원본을 남겨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이 달라고 한다고, 덜컥 모든 증거를 다 내어 주는 변호사는 없지.’
차은성이 심중 중얼거리며 이관희 변호사를 보았다.
원본을 자신이 갖고 사본을 경찰에게 주었을 수도 있다.
그새.
이관희 변호사가 차은성에게 물었다.
“영상은 왜?”
“아, 네에. 예서가 걱정이 되어 아는 분에게 영상을 보여 주고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려고 합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경찰 고위직에 아는 분이 있습니다.”
“고위직?”
“네. 치안감 중 한 분이십니다.”
“허!”
이관희 변호사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치안감은 지방경찰청장이나 중앙 경찰 학교장 정도 되는 경찰 고위직 중 고위직이다. 직급 서열로 보면 세 번째다.
이관희 변호사가 차은성에게 말했다.
“자네 인맥이 생각 밖으로 놀랍군그래.”
차은성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 * *
이틀이 지났다.
이관희 변호사에게서 받아 온 영상을 살펴보았다.
화질이 형편없었다. 그 때문에 괴한의 얼굴은 물론, SUV의 번호판의 번호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한데 이관희 변호사의 직업 정신이 돋보인다. 그가 확보한 주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의 블랙박스 영상.
기대했는데, 해당 영상 역시 화질이 좋지 않아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으음.”
차은성은 침음을 흘리며 관련 분야의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지했다.
픽셀 단위로 분해, 영상을 재조립하며 깨끗하고 선명한 화질의 영상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이.
차은성은 김아름을 생각했다. 김아름이라면 관련 고가의 장비들을 이용, 5분 안에 깨끗하고 선명한 영상을 볼 수 있게 해 줄 텐데…….
차은성은 진한 아쉬움에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연후.
박영광에게 전화했다.
* * *
다음 날. NIS 영상분석 팀.
“어서 오세요.”
팀장이 밝게 미소 지으며 차은성을 반겼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차은성의 말에 팀장이 웃었다.
“호호호.”
이내 웃음을 그치며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영상은요?”
“여기.”
차은성이 영상이 저장되어 있는 메모리 카드를 건넸다.
“한 30분쯤 걸릴 거예요.”
“30분이나요?”
차은성이 반문하며 내심 너무 오래 걸린다고 중얼거렸다.
“오래 걸리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차 팀장님의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팀장의 말에 이해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팀장이 웃으며 뒤돌아섰다.
차은성은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가 영상분석 팀을 나왔다.
* * *
잠시 뒤.
차은성은 자판기에서 콜라 캔을 꺼내 복도 창가에 섰다. 콜라를 마시며 물끄러미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곡동의 NIS 건물은 주변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마치 산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싼 듯,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였다.
차은성은 그렇게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30분이란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또박, 또박.
하이힐 소리가 들리더니.
“차은성?”
긴가민가하는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차은성이 창틀에 캔을 내려놓고 돌아봤다.
감찰실 계장 정가연.
입사 동기다.
“맞네.”
왼손에 파일을 든 정가연이 말하며 걸어왔다.
‘이런.’
차은성은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속은 달랐다. 전날 감찰받은 것을 염두에 두고 긴장했다.
이르러 선 정가연.
“의외네. 본사에서 널 보게 되다니 말이야.”
차은성은 말없이 씨익 웃었다.
“네 소식 들었어. 요즘 뭐 해?”
정가연이 물었다.
차은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바깥으로 젖혔다.
“대기!”
“…….”
“시간이 남아돌아. 그래서 기분이 마치 휴가를 받은 것 같다고나 할까?”
“너.”
“…….”
“지금 날 약 올리려는 거지?”
정가연이 물으며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천만에.”
“그래.”
정가연이 말하며 손을 뻗어 창틀의 콜라를 집어 들었다.
“어?”
차은성이 움칫하더니 급히 말했다.
“내가 마시던 거야.”
“상관없어.”
정가연이 대꾸하며 주저 없이 두어 모금 마셨다.
이어.
캔을 입에서 떼며 트림했다.
“꺼어어.”
그러자 차은성이 어이가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야아. 여자가 남자 앞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트림을 하면 어떻게 해?”
정가연이 차은성을 보았다.
“니 눈에는 내가 여자로 보이긴 하니?”
“뭔 소리야?”
차은성이 반문하자 정가연이 한 걸음 다가섰다.
성큼.
그에 차은성이 멈칫거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런데.
꽈악.
정가연이 돌연 오른발 하이힐 굽으로 차은성의 왼 발등을 힘껏 내리밟았다.
그 고통에.
“악!”
차은성이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불의의 일격이라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차은성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정가연을 보았다.
“야아…….”
그녀에게 소리치려는데 정가연이 날렵하게 차은성에게 다가서며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곤 바닥에 깔릴 것 같은 매우 낮고 작은 어조로 말했다.
“이 개자식아.”
“아, 아파. 아프다고! 가연아!”
차은성은 밟힌 아픔을 호소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헛소문에 시달렸는지 알아!”
“가, 가연아. 발! 발 좀!”
발등을 인정사정없이 더 힘주어 내리밟는 정가연이었다. 차은성에게 단단히 악감정을 품었음이 한눈에 보인다.
“발 좀 치워. 제발! 아프다고!”
“아프냐?”
차은성이 엄청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더 아팠어!”
정가연이 인상을 쓰며 발등을 밟은 오른발에 더 힘주었다. 하이힐 굽이 한층 깊게 차은성의 발등을 파고들었다.
“아악!”
차은성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정가연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러곤 급히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정가연은 밀리지 않고 버티며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아프지? 응?”
“가, 가연아.”
“난 더 아팠어. 이 개놈의 새끼야.”
정가연이 표독하게 말하며 오른발을 좌우로 수여 회에 걸쳐 비틀었다.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차은성의 발등을 무자비하게 밟았다.
“아아악!”
차은성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연탄불에 구워지며 말리는 오징어처럼.
“흥!”
정가연이 코웃음 치며 발등에서 발을 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날, 차은성을 감찰했었다. 그때 차은성이 언급한, 교육이 끝난 회식 날 밤.
“글쎄. 정가연 계장이 그날 동기인 차 팀장과…….”
“설마 원 나잇?”
“우와. 정 계장 그렇게 안 봤는데. 화끈하네.”
감찰실 직원들 사이에서 그런 헛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돌고 돌아 정가연의 귀에까지 들렸다.
“아니거든!”
대놓고 그렇게 소리칠 수도 없고, 짐짓 모른 척하며 속으로 그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던 정가연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차은성이 띄었다. 즉각적인 보복을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편.
차은성이 왼발을 들고 오른발로 깡충깡충 제자리에서 뛰더니 창가로 돌아섰다.
“으, 흐으윽.”
고통에 전 신음을 흘리며 정가연을 돌아봤다.
“너어…….”
정가연이 오른손을 들며 머리를 살짝 좌로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가 흔들렸다. 그런 머리를 오른손으로 쓸어 넘겼다.
“뭘 봐. 하긴 내가 예쁘긴 예쁘지.”
“야아!”
차은성이 잇몸을 드러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아픔을 참으며 정가연을 쏘아보았다.
“너 때문에 내가 당한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당당한 정가연이다.
“너!”
차은성이 인상 썼다.
“너 때문에.”
정가연이 빠르게 전날의 감찰로 자신이 당한 헛소문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아픔을 느끼던 차은성이 주춤했다. 자신 때문에 정가연이 마음고생을 했다. 그 때문에 조금 미안해진다. 감찰에 대한 반발심에 조금 과하게 반응했었다.
정가연의 말이 끝나자 차은성이 말했다.
“쏘리.”
“됐어!”
정가연이 대꾸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본사에는 무슨 일이야?”
“보안 규정 제5조 3항.”
“지랄한다.”
정가연이 툭 던지듯 대꾸했다. 이어 창가의 콜라로 손을 뻗었다.
차은성이 거침없이 콜라를 마시는 정가연을 보며 미소 지었다.
허물없이 대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와 같은 입사 동기다.
* * *
정가연 덕분에 30분이란 시간이 이내 지나갔다.
영상분석 팀에 갔을 때, 팀장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결과예요.”
“고맙습니다.”
차은성이 말하며 봉투를 열었다. 안에 몇 장의 선명한 사진과 신원 조회 서류가 서너 장 들어 있었다.
“서류는 서비스예요.”
차은성이 미소 지으며 팀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후.
준비한 봉투를 건넸다.
“직원들과 회식이나 하십시오.”
“어머. 뭘 이런 것까지.”
팀장이 웃으며 주저 없이 봉투를 받았다.
차은성이 팀장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윙크.
차은성이 그러거나 말거나 봉투를 쥔 팀장이 액수를 확인하더니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외의 공돈에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