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86)
라센느 인근 카페.
차은성은 벽을 등지고 앉아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주변을 살폈다.
늘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이젠 습관이 되었다.
잠시 후.
카페 자동 출입문이 열리며 사복을 입은 예서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예서는 걸으며 구석진 자리를 집중적으로 둘러봤다.
“하여튼.”
바로 눈에 들어오는 이복 오빠 차은성.
좌측 구석에 있는 작은 원탁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게임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예서가 빠른 걸음으로 차은성에게 다가갔다.
* * *
“왁!”
가까이 이른 예서가 냅다 소리쳤다.
차은성은 내심 픽 웃었다. 이미 예서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담담하게.
차은성이 예서를 보았다.
“앉아.”
눈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어?”
예서가 어리둥절해하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놀라?”
“바보냐? 그 정도에 놀라게.”
“에이. 재미없어.”
예서가 입을 삐죽이며 맞은편 의자로 가 앉았다.
* * *
잠깐이란 시간이 지나고.
예서가 코코아를 빨대로 빨아 마시며 차은성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여자 없어, 오빠?”
차은성이 마시던 라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반문했다.
“갑자기 여자는 왜?”
“아니. 허구한 날 라센느에서 일만 하고 말이야. 지금도 그렇잖아. 폰으로 게임을 하고 앉아…… 오빠, 나이도 있는데 연애 좀 해.”
마치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예서라 차은성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빠 정도면.”
“…….”
“마음만 먹으면 예쁜 연예인이나 아이돌 애들도 만날 수 있잖아.”
“쓸데없는 말 말고. 만나자고 한 이유나 말해.”
“피, 재미없어. 꼭 내가 만나자고 먼저 전화해야 만나 주지.”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예서 말대로 이제까지 자신이 먼저 전화한 적이 없다.
요원으로서의 활동. 라센느에서의 일. 모친과의 거리 등.
알게 모르게.
예서에게 다가서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있잖아, 오빠.”
“응.”
“나, 칼국수 먹고 싶어.”
“무슨 엉뚱한 소리야?”
차은성이 영문 모르겠다는 어투로 물었다.
“그게.”
“…….”
“집에서는 떡볶이나 칼국수 같은 것을 못 먹게 해서……. 아니, 음식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음식을 못 먹게 하냐고?”
연거푸 불만을 입에 올리는 예서였다.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혼자서 가서 먹는 건 좀 처량하잖아. 그러니깐 내 밥 친구 좀 돼 주라. 응?”
“알았다.”
치은성이 대꾸하며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
까불거리는 예서가 차은성을 보며 웃더니 고개를 숙여 코코아 잔에 있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쪼오오옥.
한편.
차은성은 주변을 신속하게 둘러봤다.
눈.
두어 명이 예서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알아챘다.
심중 의아했다.
그런 한편으로 혹시 자신을 노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자신 때문에 예서가 다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기에.
* * *
얼마 후, 카페 인근 골목.
차은성은 왼손으로 앞에 있는 예서의 입을 틀어막고 우를 돌아봤다.
놀란 예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차은성을 돌아봤다.
남매의 귀에.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낭랑한 대화가 들렸다.
“찾았어?”
“아니.”
“젠장. 어디로 사라진 거야?”
“빌어먹을. 순간적으로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질 줄이야.”
“어서 찾아. 못 찾으면 골치 아파져.”
“알아.”
“흩어져서 찾아보자.”
“그래. 난 이쪽.”
“그럼 난 저쪽.”
두 사람이 급히 흩어지며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 * *
“아, 숨 막혀.”
예서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은 차은성의 왼손을 떼어 냈다.
“아이고, 짜!”
차은성이 그런 예서를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쉿!”
“괜찮아, 오빠. 아빠가 내게 붙인 경호원들이야.”
“응?”
예서의 말에 차은성은 어리둥절했다.
“호호호.”
예서가 재미있다는 듯 밝게 웃었다.
* * *
전통 시장 안쪽.
몇몇 노점에서 국수, 떡볶이, 김밥 등을 팔고 있었다.
안동 김밥.
예서가 자주 온 듯 거침없이 일자의 긴 의자에 앉았다.
“이모. 여기 칼국수 둘하고요, 떡볶이 1인분요.”
일하는 두 아주머니 중 한 분이 돌아보더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하니 예서를 아는 눈치다.
차은성이 예서의 좌측에 앉으며 물었다.
“너,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아?”
“헤헤헤.”
예서가 낮게 웃으며 나무젓가락을 두 개 집어 들었다.
“가끔 친구들과 오곤 해.”
예서가 말하며 차은성을 돌아봤다. 건네는 나무젓가락.
차은성이 받아 들며 물었다.
“혹, 그 친구들 중에 내가 말한 서연이라는 애도 포함되어 있는 거니?”
“응.”
예서가 대답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난 이해가 안 돼, 오빠.”
“…….”
차은성은 뭐라 말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약물에 의한 쇼크사라니.”
예서가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인적으로 이관희 변호사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예서다.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 정병훈이 두 경호원을 예서에게 붙였다.
예서의 말을 들으며 차은성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있다!
그사이.
아주버니가 떡볶이를 먼저 주었다.
“감사합니다.”
예서가 공손히 말하며 두 손으로 받아 내려놓았다. 그러곤 재빨리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갰다.
“먹어 봐, 오빠. 이 집 떡볶이는 마약이야, 마약.”
돌아보는 환한 이복동생 예서.
잘못되면 어머니 조혜선이 매우 가슴 아파할 것이다.
* * *
잠시 뒤.
칼국수가 앞에 놓였다.
후루룩.
차은성은 젓가락으로 칼국수를 먹으며 서연이라는 친구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예서가 입에 젓가락을 물고는 생각하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좋은 친구였어.”
“…….”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각기 가정을 만드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혼자 살았지만.”
“…….”
“나와 함께 연습생 꿈을 꾸며…… 생활비 때문에 야자 하지 않고. 뭐, 선생님도 사정을 알고 있어 봐주었지만. 아무튼 열심히 일하며…….”
“…….”
“아빠나 엄마에게는 서연이에 관해 말한 적이 없어. 보나 마나 같이 어울려 다니지 말라고 말할 게 뻔하니깐.”
“그 애와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구나.”
“사이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어. 뭐, 베프라고 할까?”
“…….”
“가끔 혼자 사는 서연이 집에서 같이 라면도 끓여 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걔 혼자 살아서 그런지 엄청 외로워했거든. 먹고사느라 주변에 이렇다 할 친구도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내게 무척 잘해 줬어.”
“…….”
“뭐랄까? 서연이를 통해, 똑같은 대한민국을 살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간접경험 해 보았다고나 할까?”
예서가 고개를 들어 정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회가 되면 오빠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애였어.”
예서의 중얼거림에 순간 차은성이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급히 물을 찾아 마신 차은성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미쳤니? 네 친구라면 나와 나이 차이가 몇인데.”
예서가 고개를 바로 하더니 차은성을 돌아봤다.
“고리타분한 꼰대!”
“뭐?”
“요즘 열네 살, 열여섯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데.”
“어럽쇼.”
“남녀가 서로 좋으면 되지, 나이 차이가 뭔 상관이야.”
“훗.”
차은성이 어이가 없어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예서가 서연이라는 애와 엄청 친했던 모양이다.
“서연이가 얼마나 예뻤는지 알아? 어지간한 아이돌 뺨칠 정도로 예뻤다고. 게다가 몸매가 나이에 비해, 와우우.”
“…….”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정도로…… 모델 몸매였어.”
“그런 애를 내게 소개해 주겠다는 건 뭔 속셈이야? 혹시 나더러 서연인가 하는 애, 스폰서가 되라. 뭐, 그런 마음이었어?”
“히.”
예서가 웃었다.
“어쭈. 그런가 본데.”
“그게 아니고, 오빠가 그 애 후견인이 돼 주었으면 했었어.”
“후견인?”
“응. 오빠라면 사심 없이 서연이를 돌봐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애 돌보는 무슨 보모냐?”
차은성이 대꾸하며 내심 고소했다.
삼촌 박영광도 자신을 무슨 보모 취급하더니 예서도 마찬가지다.
“에이, 됐어. 서연이는 죽었는데 뭐.”
예서가 신경질적인 어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입에 문 젓가락을 빼내 급히 칼국수를 먹는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슬픔이 배어났다.
서연이라는 애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진 듯 보였다.
‘흠.’
차은성은 이관희 변호사를 생각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다. 혹 예서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서연이의 죽음을 알아봐 달라고 이관희 변호사에게 부탁한 예서인데. 느닷없이 두 경호원이 붙었다는 건…….
* * *
다음 날 오후. 대림 로펌 이관희 변호사 사무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차은성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관희 변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빤히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혜 자 선 자를 쓰십니다.”
“아, 해상 테크 사모님!”
이관희 변호사가 그제야 차은성을 알아보았다.
해상 테크 정병훈 사장의 의붓아들.
* * *
잠깐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관희의 비서가 들어와 테이블에 두 찻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차은성은 차를 마시며 이관희 변호사와 대화를 나눴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차은성이 예서를 입에 올렸다.
“변호사님께 뭔가 부탁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예서에게 경호원들이 붙었더군요.”
차은성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듯 차은성의 말을 듣던 이관희 변호사가 은근 곤혹스러운 기색을 지었다.
차은성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이관희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말해 달라.
차은성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한 이관희 변호사가 난감한 눈빛을 띠더니.
“휴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친구의 죽음에 슬퍼한 예서가 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여겼다.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알아보았다. 그런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사인이 급성 약물중독에 의한 쇼크사인데.”
“…….”
“죽은 오서연 학생은 평소 약물을 가까이한 흔적이 없었다네.”
“사인이 급성 약물중독에 의한 쇼크사인데, 평소 약물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건?”
차은성이 의아한 어조로 묻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