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85)
누이 뒤처리는 오빠가 한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왼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안경을 쓴 장년인.
대림 로펌 파트너 변호사 이관희.
척 봐도 고가의 양복이고 넥타이다. 적잖은 돈을 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관희가 막 한 기둥을 지날 때였다.
기둥 뒤에서 돌연 누군가가 뛰쳐나오더니 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이관희 변호사의 뒤에 섰다.
그러고는 어느새 꺼내 든 길쭉한 회칼을 이관희 변호사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명백하다.
여차하면 목을 그어 버리겠다!
돌연 당하는 봉변에 이관희 변호사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경악 실색한 얼굴.
입안 깊숙이 자리한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벌린 입.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크게 부릅뜬 눈동자.
이관희 변호사가 아연실색 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누, 누…….”
크게 놀란 까닭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관희 변호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쉿!”
뒤에 있는 사내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이관희 변호사가 입을 다물었다.
“오서연.”
뒤에서 들린 사내의 목소리에 이관희 변호사 흠칫했다.
“이미 죽은 여자애 사건을 왜 조사하는 거지?”
사내가 물으며 목에 댄 회칼을 놀려 이관희 변호사를 은근 위협했다.
“그, 그게…… 해상 테크 예, 예서 아가씨 부탁으로…….”
이관희 변호사의 말에 사내가 침묵했다.
“이유가 있을 텐데?”
“저, 절친한 친구인데, 갑자기 죽은 시체로 발견되어서 그 때문에…….”
겁을 먹은 이관희 변호사가 듬성듬성 이유를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이관희 변호사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건 경고야.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는 경고 같은 건 없으니깐 말이야.”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일순.
파지지직.
고압의 전류가 이관희 변호사에게 흘러들었다.
전기 충격기였다.
이관희 변호사가 힘없이 주차장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곤 덜덜 몸을 경련했다.
그사이.
사내가 옆으로 돌아섰다.
얼마 되지 않아 검은색 SUV가 급히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끼아아아아아.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남기며…….
* * *
차은성이 방여옥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박영광이 몇몇 이들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을 본 방여옥이 불안해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여옥 씨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니까요.”
“아, 예에.”
차은성의 말에 방여옥이 다소 안도했다.
“기내에서 드린 말씀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네.”
차은성의 말에 방여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영광과 함께 마중 나온 이들이 방여옥을 데리고 갔다.
그러자 박영광이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커피 한 잔 하자.”
차은성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거죠?”
“끙.”
박영광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돈도 많은 놈이.”
차은성은 못 들은 척하며.
씨익.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 * *
공항 스낵바에 앉아 차은성은 박영광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번 일.”
“…….”
“수고 많았다.”
박영광이 말하며 잔을 내렸다.
“뭘요. 늘 하던 일이었던데요.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차은성이 말끝을 흐리며 박영광을 흘낏거렸다.
“제 일의 성격상 가능한 노출을 피해야 하는데. 최근 노출이 과합니다.”
차은성이 우려했다.
위험에 빠진 요원을 구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다. 그런데 팀이 마담 화이트에게 당한 후 이전보다 노출이 심해졌다.
차은성이 그런 마음을 토로하자.
“아닌 게 아니라, 나나 국장도 그 점을 의식하고 있다.”
박영광이 말하며 잔을 바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새.
차은성이 잔을 들어 두어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국장은 이번에 신설되는 3팀을 네게 맡겼으면 하던데.”
박영광이 말하며 차은성의 의중을 살폈다.
차은성이 흠칫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뭐가 아닌 것 같은데?”
“3팀. 아직 필드 실전 경험도 없잖습니까?”
“…….”
“제대로 팀이 돌아가려면 충분한 필드 경험을 필히 쌓아야 합니다.”
“…….”
“최소 필드 경험이 2년 정돈 있어야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3팀을 맡긴 힘들다?”
박영광의 물음에 차은성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제가 맡는다면…… 가벼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필드 경험을 쌓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천년에 저더러 팀을 데리고 임무를 수행하라고…….”
차은성이 말하다 멈칫했다. 뭔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박영광을 돌아봤다.
“혹시 저더러…….”
박영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잔을 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 테이블 너머에 있는 일자의 거울.
박영광은 거울을 통해 등 뒤를 살피며 말했다.
“국장이 바라는 눈치야.”
“아니. 제가 애 키우는 무슨 보몹니까? 이제 갓 필드에 투입되는 팀을 맡아 경험을 쌓게 도와주는 한편, 그들을 교육시키게요?”
차은성은 다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전 필드에서 활동하고 싶은 거지, 필드에서 활동할 팀에게 경험을 쌓게 해 주며 교육시키는 임문 사절입니다.”
싫다!
차은성이 그런 마음을 가감 없이 내보였다.
“좋지. 뭘 그래?”
“좋긴 뭐가 좋아요.”
“그 애들 데리고 가벼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때때로 혼자서 단독 임무도 수행하고.”
“삼촌!”
차은성이 박영광을 돌아보며 힘주어 불렀다.
“시먼스!”
박영광이 정면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차은성이 흠칫했다.
“3팀 맡아. 교육시키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놈을 추적해.”
“은밀히?”
차은성의 반문에.
“당연히.”
박영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전력을 다해 알아보았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
“월터 부국장도 나름 손은 쓰고는 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어.”
“말도 안 됩니다. 천하의 CIA가 전 부국장의 소재지도 못 알아낸다고요?”
차은성이 반문하며 어이없다는 속내를 내보였다.
“못 알아낼 수도 있지.”
박영광이 말하며 잔을 집어 들었다.
“…….”
차은성은 말없이 박영광을 보았다.
“CIA 내부에 부국장의 그림자가 상당히 짙게 드리워져 있는 모양이야.”
박영광이 말하며 커피를 마셨다.
“내부에 시먼스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
박영광이 우려의 눈빛을 띠었다.
“우리 역시 정재승 국장을…… 혹 모르지. 정재승 국장 외에 다른 이중 스파이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박영광이 말하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상하지 않냐?”
박영광이 우측에 앉은 차은성을 돌아봤다.
“뭐가요?”
차은성이 반문했다.
“아무리 CIA 부국장이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
“상당히 오래전에 정재승 국장을 포섭한 것 같단 말이지. 그리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
“내 경험상.”
“…….”
“이중 스파이가 더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의 얼굴이 서서히 경직되었다.
“CIA 내부도 그렇고.”
“…….”
“우리나 CIA가 시먼스 부국장의 소재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와 CIA를…….”
박영광은 NIS와 CIA가 모르는 제3의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있음을 언급했다.
“촉이 안 좋아. 너무!”
박영광이 강조했다. 자신의 감이 위험을 알린다고 넌지시 말했다.
경직된 얼굴의 차은성.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3팀을 맡아서…… 나 외에 다른 이들 모르게 은밀히 시먼스를 추적해 봐.”
“…….”
“뭔가 건지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그리고…….”
“…….”
“조심해야 한다.”
“…….”
“마담 화이트가 팀원들을 죽이고 은성이 널 노렸어.”
“…….”
“내 경험으로는 팀장을 노린 다음에 팀원들을 노리는 것이 상례일 것 같은데.”
“…….”
“팀원들을 먼저 제거하면 팀장이 그것을 모를까?”
“…….”
“안다면, 필시 복수심에 암살자나 암살 조직을 추적할 텐데 말이지.”
차은성이 눈을 반짝였다.
“혹 누군가가 깔아 놓은 포석 위에서 우리가 타의에 의해 행마를 당하며 놀아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차은성이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박영광이 잔을 집었다.
“모르지.”
“삼촌!”
“그러니깐 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알아보라고.”
박영광이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은성은 시선을 바로 하며 잔을 집었다.
박영광이 커피를 마시며 차은성을 흘겨봤다.
불안하다!
혹, 차은성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박영광이 입에서 잔을 뗐다.
“은성아.”
“네.”
차은성이 마시려던 잔을 내려놓으며 박영광을 돌아봤다.
“노파심이다만.”
“…….”
“3팀을 맡기 전에 시간을 내서 공정 통제사 특훈을 한번 받아라.”
“예?”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특훈을 받아요?”
차은성이 항의조로 반문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
박영광이 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놨다.
“생존 확률!”
“…….”
“최대한 높여야겠다.”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움찔했다.
엄청 위험하다!
박영광이 혹, 자신이 죽을까 봐 살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배양시켜 주려는 것 같다.
“그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차은성의 물음에 박영광이 피식 웃었다.
“세상일을 누가 알겠냐?”
“…….”
“그저 만약의 상황이나 경우에 미리 대비해 두려는 것뿐이야.”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박영광의 말에서 이제까지 맡은 임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고 난이도의 임무를 앞으로 맡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때문에 심중 진한 긴장을 느꼈다.
“네가 잘못되면.”
“…….”
“네 아버지 볼 면목이 없어.”
박영광이 불안한 눈으로 차은성을 보았다.
그러자 차은성이 살며시 웃었다.
싱긋.
이어 말했다.
“절 누가 가르쳤는데요?”
박영광이 픽 웃었다.
“자만은 독이야.”
“에이. 그렇게 못 미더우시면서 왜 제게 자꾸 오더를 주셨어요.”
“짜식이.”
“저 믿으세요. 저, 차은성입니다. 삼촌이 온갖 정성을 들여 심혈을 다해 키운 차은성이요.”
“그래. 너 말 잘했다.”
“…….”
“그걸 아는 놈이, 매번 돈 내는 걸 그렇게 아까워하냐?”
“끄응.”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앓는 신음을 흘렸다. 이어 놔둔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커피를 마시며 박영광의 말을 슬쩍 비껴 내려 했다.
“왜 말을 안 해?”
박영광이 채근조로 물었다.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묵묵히 커피를 홀짝였다.
“확, 그냥!”
박영광이 차은성을 한 대 쥐어박으려는 듯이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으며 눈웃음쳤다.
이제까지 결혼하지 않고 홀몸으로 지내온 박영광이다. 그에게 차은성은 친아들에 다름 아니다.
최고의 요원 자질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차은성을 데려다 키우며 온갖 정성을 들였다.
그것이 가끔은 후회되기도 하는 박영광이다.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차은성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지도.
필드에서 그리 활동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