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79)
차은성이 천천히 말했다.
“제 팀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순간.
정재승 국장의 눈꼬리가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그들에 관한 정보를 유출했고…… 해당 정보를 입수한 마담 화이트가 그들을 한 명씩 죽였습니다.”
“…….”
“그들이 그렇게 죽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
“다들 나라와 국민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던 필드 요원이었습니다.”
“…….”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
“그저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던 요원들이었단 말입니다.”
차은성이 울분을 토로했다. 피가 끓는 분노 어린 차은성의 음성에.
정재승 국장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중 죄책감이나 가책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눈치다.
* * *
박희오 원장, 2차장 선우종, 5국장 주철현, 국장보 박영광이.
매직미러를 사이에 두고 차은성, 정재승 국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 차은성과 정재승 국장의 대화가 들렸다.
* * *
잠시 뒤.
정재승 국장이 천천히 말했다.
“아무래도 내게 이중 스파이라는 혐의가 씌워진 것 같은데.”
“…….”
“그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있나?”
정재승 국장의 물음에 차은성이 천천히 말했다.
“있습니다!”
확고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정재승 국장이 흠칫하더니 알아보기 어려운 당황의 눈빛을 띠었다.
“저희가 이중 스파이에 관해 조사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해당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보안 등급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차은성이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당 정보는 기밀에 속합니다. 해서 접근 가능한 이들은 원장님을 포함. 소수에 불과하죠.”
차은성은 원장, 1, 2차장, 국장들을 언급했다. 그들 외에 해당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이 없다.
“즉, 그들 중에 우리가 찾고 있는 이중 스파이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재승 국장이 말하는 차은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장님이나 1,2차장님은 사실상 회사를 움직이는 분들이죠. 그분들이 이중 스파이일 리는 없습니다. 물론 내부 감찰의 경우. 규정된 관련 사규에 의해 세 분 모두 감찰 대상인 것은 맞습니다.”
“…….”
“일단 세 분을 제외하고. 누가 해당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보안 등급을 가지고 있으며, 사내 지위 체계에서 아무 의심 없이 해당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지 따져 보았습니다.”
“…….”
“각기 맡은 업무 외에 타 팀의 업무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회사 내규죠.”
차은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재승 국장이 가로채듯 말했다.
“결론적으로.”
“…….”
“정보통신을 맡은 내가 제1혐의자다! 그건가?”
정재승 국장의 말에 차은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의 뒷조사를 하면서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이렇다 할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 난 아니니깐!”
정재승 국장이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차은성이 비웃듯 실소했다.
피식.
그 모습에 정재승 국장이 불쾌하다는 속내를 내보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다소 성난 목소리로 차은성을 불렀다.
“사시는 원룸을 수색했습니다.”
차은성의 말에 정재승 국장이 흠칫하더니 언성을 높였다.
“영장! 발부받았겠지?”
“…….”
차은성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국장님.”
“…….”
“저희는 경찰이 아닙니다.”
“영장도 없이 내가 사는 원룸을 뒤졌단 말인가?”
정재승 국장이 고함쳤다. 당장이라도 앉아 있는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자 차은성이 툭 던지듯 말했다.
“노트.”
순간.
정재승 국장이 움찔했다.
“처음에는 눈에 안 들어왔습니다. 당장 내다버려도 될 정도로…… 무심코 집어 들었습니다…… 뒤페이지에 아주 재미있는 짧은 혼용문이 있더군요.”
“…….”
침묵한 정재승 국장. 동요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했다.
“……겨우 서너 명의 관련 언어학자만이 알 뿐인 스와힐어. 그리고 난수표를 이용한 OSS의 암호 체계!”
“…….”
“국장님이 알고 계실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CIA가 해당 암호문 체계를 국장님께 알려 주었겠지요.”
“…….”
“가사 도우미를 이용한 정보 전달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냥 넘어가겠지만.”
차은성이 정재승 국장을 똑바로 보았다.
“원하시는 증거로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면, 추가로 관련 증거를 더 제시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
“전, 당당하신 국장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
“저희가 아는 킹스맨에게, 분명히 저희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 저희를 배신했다고 생각합니다.”
차은성이 언성을 높이며 정재승 국장을 압박했다.
“조국과 국민을 배신한 이유가 뭡니까? 정재승 국장님!”
차은성이 심문실이 떠나가라 고함쳤다.
그새 정재승 국장이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곤 귀에 들리는 차은성의 고함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바르르.
그간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죄책감과 가책감이 쏟아져 나왔다. 제방이 무너져 물이 쏟아지듯이.
한편.
타앙.
차은성이 벌떡 일어나며 양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어 상체를 내밀며 정재승 국장에게 소리쳤다.
“이유가 뭡니까? 조국과 국민을 배신한 이유가?”
정재승 국장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차은성에게 마주 소리쳤다.
“배신은 내가 아니라! ……이 나라 대한민국이! ……이 나라 국민이 먼저 했어!”
결국 자신이 이중 스파이임을 간접적으로 자인하는 정재승 국장이었다.
차은성은 멈칫했다.
“네가 뭘 알아?”
정재승 국장이 심문실이 떠나갈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나라가! ……이 나라 국민이! ……얼마나 개좆같은지! ……네가 뭘 안다고 감히 날 배신자라고 말해에!”
당당한 정재승 국장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그렇게 무언으로 말하듯 떳떳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차은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신…….”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해!”
정재승 국장이 포효하듯이 소리쳤다.
* * *
한참 후.
소강상태라고나 할까?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차은성이 상의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평소 정재승 국장이 즐겨 피우던 브랜드의 담배였다.
차은성은 정재승 국장으로부터 보다 명확한 자백을 받아 낼 요량으로, 그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내밀었다. 심리적 안정을 노리고.
정재승 국장이 차은성과 담배, 라이터를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잠깐이란 시간이 지나고.
정재승 국장이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회사에 들어왔을 때.”
“…….”
“막 군사독재 정권 중반이었어.”
차은성은 말없이 정재승 국장을 바라보았다.
후우우.
정재승 국장이 하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젊어서였을까? 나는 나라를 위해 정말 목숨 바쳐 충성하고자 했어. 그래서 미친 듯이 주야를 불문하고 일에 매진했었지. 덕분에 위아래로 신망을 얻었고. 동료들보다 승진도 빨랐어.”
“…….”
“그렇게 일하는 동안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그들의 부정부패가 세상에 까발려졌지.”
“…….”
“난 충격을 받았어.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것은 군사독재 정권의 위정자들의 부정부패를 위해서가 아닌데. 드러난 결과는 그들의 권력 유지와 부정부패를 위해 내가 주야를 불문하고 일한 거였어.”
“…….”
“매일 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만큼 난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어.”
“…….”
“……그렇게 군사독재 정권의 시대가 끝나고 문민정부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했어. 문민정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고 했었지. 그것이 내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했지 때문에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하고 또 일했어.”
정재승 국장은 자조적인 눈빛을 띠었다.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듣기만 했다.
“……문민정부 말에 터진 IMF 사태는 내게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었어.”
“…….”
“IMF가 터지기 2년 전에 워싱턴포스트지나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서 한국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다고 보도하며 한국 경제가 위험하다고 했었지만. 당시 문민정부는 철저히 그것을 부정했어.”
“…….”
“당시 대통령을 포함하여 내각의 모든 각료들이 해외 언론들의 보도를 오보라고 호도하며 국민들에게 한국 경제는 아주아주 튼튼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었지.”
“…….”
“IMF가 터지기 6개월 전쯤. 싱가포르 환율 시장에서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퍼졌었지.”
“…….”
“회사 내에 있던 모 팀이 외환 보유고를 급히 점검해 봐야 한다고 긴급 보고서를 작성. 상부에 올렸지만. 상부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허튼짓을 했다고 해당 팀을 찍어 눌렀어. 그럼에도 해당 팀의 팀장은 가만히 있지 않았지. 옷을 벗을 것을 각오하고 청와대로 보고서를 올려 보냈지.”
정재승 국장이 담배를 바닥에 툭 떨어뜨리고 발로 비벼 끄며 차은성을 보았다.
“어떻게 됐을 것 같나?”
“…….”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재승 국장이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
“완전 무시했지. 그리고 이따위 보고서를 올린다고 팀장의 옷을 벗기고 해당 팀을 해체시켜 버렸어.”
“…….”
“결국 6개월이 지나고 IMF가 터졌어.”
“…….”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당시 정부 인사들의 오만과 자만 때문에!”
정재승 국장은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온몸으로 분노를 내보였다.
“대통령이란 인간이 국민 담화를 발표했는데 담화문 그 어디에서도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국민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었어.”
“…….”
“나는 열심히 잘했는데, 결과가 IMF다. 어쩌겠느냐?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니들 국민이 희생해라!”
“…….”
“그따위 개좆같은 소리를 늘어놨었지.”
“…….”
“명색이 대통령이란 작자가 부끄러움도, 가책이란 감정도 느끼지 않고 너무도 당당하게 그런 뭐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어. 큭큭큭.”
정재승 국장이 낮게 웃었다.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대통령이 그따윈데 정부 각료들이 사과나 사죄 따위를 할 리 없지. 그들 중 그 누구도 사과 한마디 없었고 책임지려는 놈도 없었어. 죄다 당당했지. 자신들은 IMF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자신들은 열심히 했는데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됐다고. IMF가 태풍이나 지진처럼 천재지변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어.”
정재승 국장이 차은성을 보았다.
“IMF 시대를 맞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아나?”
정재승 국장이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