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77)
혼자 사는 남자의 전형적인 흔적이 원룸 곳곳에 남아 있었다. 도통 청소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일주일마다 가사 도우미가 방문. 청소를 하고 몇몇 밑반찬을 만들어 둔다고 한다.
하필이면 오늘이 가사 도우미가 오는 날이다. 그런 이유로 서둘러 살펴봐야 한다.
* * *
얼마 후.
차은성은 문득 정재승 국장이 사는 원룸에 PC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나?”
요즘 PC나 노트북이 없는 사람이 없을 텐데.
“혹, 폰을 주로 쓰기 때문에 PC나 노트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으음.”
차은성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 *
시간이 꽤 지났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다. 그러다 차은성의 눈에 낡은 노트 한 권이 들어왔다. 그간 냄비 받침으로 쓰였던 걸까?
너덜너덜한 겉표지에 라면 국물 자국인 것 같은 몇몇 얼룩이 남아 있었다.
노트는 사용한 지 오래된 듯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두께도 얇았다.
차은성은 별생각 없이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서너 장 넘겨 봤다.
“풋.”
실소하고 말았다. 페이지가 꽤 찢겨져 나갔다. 찢겨진 페이지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모르겠다. 남은 페이지가 몇 장이 되지 않는다.
두어 장을 넘기자.
“응?”
차은성의 눈이 반짝였다.
이상한 문자와 영어의 혼용문이 몇 눈에 들어왔다. 단문이었다. 급하게 휘갈긴 듯이 쓰인 단문은 어떻게 보면 낙서 같았다.
“뭐지?”
차은성이 의구심이 어린 어조로 막 중얼거리는데.
띠디디디디.
밖에서 누군가 디지털 도어 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사 도우미가 왔다!
* *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
“후우우.”
무슨 시름 같은 한숨을 쉬더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는 원룸을 정리정돈하며 청소하기 시작했다.
* * *
차은성은 난간에서 도시가스 배관으로 힘겹게 이동 중이었다.
‘젠장.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도시가스 배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만약 띄었다면, 틀림없이 도둑으로 오인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본 목격자가 112에 신고했을 것이다.
* * *
이틀 후.
차은성은 폰으로 찍어 온, 노트에 쓰인 혼용문을 보고 또 보았다.
암호문인가 싶었지만, 그동안 살펴본 바로는 아닌 것 같다. 이런저런 모색과 방법으로 혼용문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인지 알고자 하였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끄으응.”
차은성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도와줬음 해. 지금 보내는 첨부 파일이 무엇인지 좀 알아봐 줘. 그리고 연락은…….
메시지를 보냈다.
* * *
다음 날.
사전 약속한 시간에 기다리고 있던 메신저에…… 접속이 이루어졌다.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지?
차은성이 인사를 건넸다.
―그럭저럭. 그런데 은성이 너, 흥미로운 것을 보냈더라.
―흥미롭다고?
―응. 어디서 어떻게 구한 거야?
상대방이 관심을 보였다.
―뭔지 말해 줄 수 있어?
차은성이 묻자.
―그거 스와힐어와 영어의 혼용문인 것 같아.
―스와힐어?
―어. 아프리카 토속 방언 중 하난데……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진 언어 중 하나야.
―사라진 언어라고?
차은성은 의아했다.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렸다.
―응. 스와힐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거의 다 죽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다 죽다니?
―스와힐어를 쓰는…… 전체 인구가 채 50여 명도 안 돼…… 부족 사이에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에서 해당 부족이 무슨 수로 살아남겠어?
차은성이 호기심에 물었다.
―그런데 스와힐어라는 걸 넌 어떻게 아는 거야?
―아, 예전에 나만의 전용 암호통신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이런저런 자료를 모으다가 알게 됐어. 의외로 남아 있는 문자가 몇 없어서, 다른 문자와 혼용하지 않으면 쓸 수 없었거든.
―내가 보낸 첨부 파일에 있는 스와힐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어?
―힘들어.
차은성이 일순 실망했다.
“이런.”
중얼거리더니 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무슨 말인지 꼭 알아야 해. 어떻게 알 수 없을까?
―스와힐어 자체가 사라진 언어인 데다가 남아 있는 단어도 몇 개 안 돼. 그리고 전 세계를 통틀어 스와힐어를 아는 언어학자가 겨우 서너 명밖에 안 돼…… 그리고 누가 OSS 암호 체계를 이용해 혼용문을 만든 것 같아. 그 때문에…… 상호 약속된 난수표가 있다면 모를까, 없다면 무슨 내용인지 알기가 너무 어려워.
―뭐?
차은성은 깜짝 놀랐다.
OSS라니.
상대가 차은성을 불렀다.
―은성아, 은성아.
―아, 미안해. 놀라서 그래.
―ㅎㅎㅎㅎ
―웃지 말고.
―그나저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느닷없이 OSS 암호 체계를 이용한 혼용 암호문을 보내고…….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진 스파이가 도대체 누구야?
상대가 차은성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실은…….
차은성이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상대를 확실하게 믿는 눈치다. 그리고 혼용문이 어떤 내용인지 해독을 간곡히 부탁했다.
―너무 힘들어.
상대가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꼭! 좀 부탁해.
―아까도 말했지만, 상호 간에 사전 약속된 고유의 난수표가 없으면 해독이 너무 어려워.
―…….
―수법이 꼭 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이 썼던 방법과 꽤 유사한 것 같긴 해.
―미 해군의 수법?
―응. 당시 걔네들, 인디언들 데려다 통신병으로 썼거든. 그 때문에 서로 인디언어로 통신이 이루어져서 일본군 감청 부대가 해당 통신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해.
―그래. 그런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정말 꼭 알아야 해서 그래.
―으음…….
―…….
―방법이 두어 개 정도 있긴 한데. 그게 좀…….
―뭔데? 빨리 말해 봐.
차은성이 반색하더니 급히 재촉했다.
―슈퍼컴!
―슈퍼컴?
―응. 대전에 정부가 출연한…… 핵 잠수함 개발을 위해…… 지금 몰래 슈퍼컴으로 설계 시뮬레이션 중이거든. 그 슈퍼컴을 써서 난수표가 가진 모든 경우의 수를 차례차례 대입해…… 초고속의 초고속으로 계산이 가능하니깐, 넉넉잡고 이틀이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거야.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요즘도 애들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거야?
차은성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
―대답해!
차은성이 다그쳤다.
―알잖아. 내가 어나니머스 멤버라는 거. 대한민국에서 나 포함해서 딱 여섯 명이라고.
―너. 그러다 NIS 요주의 감시자 리스트에 네 이름이 오를 수도 있어.
차은성이 걱정했다.
―에이. 그런 일은 없지!
자신만만한 상대방이다.
―없다고?
―응. 얼마 전에 너네 NIS 서버 들어가서 훑어봤는데. 네가 말한 감시자 리스트에 사람 몇 명 없던데.
차은성이 입을 따악 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NIS 서버를 해킹하다니. 그런데도 NIS가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 알고 있다면 아주 생난리가 났을 것이다.
‘여, 역시 어나니머스!’
차은성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 상대방이다.
NIS가 어떤 곳인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엄중한 보안 시스템이 하루 24시 작동하는 곳인데. 쥐도 새도 모르게 서버를 털어 버리다니.
―너!
―…….
―내가 아는 한 방화벽만 해도 4겹이야. 그런데 보안 시스템을 어떻게 뚫은 거야?
―ㅎㅎㅎ. 그건 비밀이지. 내 노하우라고.
차은성은 상대의 대꾸에 어이가 없었다. 하긴 셰프들이 자신들의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해커들도 자신들의 해킹 방법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과 같다.
차은성은 상대방과 자신이 친구라는 것에 내심 고마워했다. 적이라면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섭지만, 우군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든든해지는 자신만의 비밀 병기다.
차은성이 생각하는 사이, 상대가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서버의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이……확인된 각국 스파이,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들, 해외에서 자유 용병으로 활동한 사람들…… 그리 많지 않던데.
―…….
―그리고 내 이름이 올라가 봐야 지워 버림 그만이지 뭐.
―야아아!
―에이, 화내지 말고.
―…….
―내가 어나니머스 멤버라는 걸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딱 한 사람밖에 없어.
―…….
―우리끼리는 닉네임을 쓰고 본명은 절대 쓰지 않아. 그리고 상대에 관해 일절 개인 정보 같은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고. 그러니깐 은성이 너밖에 몰라.
―…….
차은성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놈을 미쳤다고 정신병원에 집어넣은 부모나 사회복지 시스템이나.’
아닌 말로, 상대는 혼자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가 시스템을 다운시켜 버릴 정도로 엄청난 천재다.
다만, 너무 심각한 자폐 증세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뿐이다.
그 자폐 때문에 정신병원을 겸한 요양원에 장기 입원 아닌 입원을 했어야만 했다.
그곳에서 만나, 지금까지 이렇게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주로 연락하는 것은 차은성이었고. 해당 연락에 응해 상대방이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은성아.
―응.
―해킹해서 슈퍼컴을 이용해 해독해 줄게. 이틀만 시간을 줘.
―안 돼! 하지 마!
차은성은 불안해서 말렸다.
핵 잠수함 설계 시뮬레이션 중이라면 국가 단위의 보안 체계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방화벽이 이중 삼중일 것은 보나 마나다.
자칫 우성이가 꼬리를 밟히게 되면, 정말 큰일이 난다.
CIA도 어나니머스와의 접촉 방법을 모른다.
만약 한국 정부. 특히 NIS가 상대의 존재를 알게 되면 핵무기급의 자산으로 분류.
죽을 때까지, 남은 생애 내내 철저히 관리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이용해.
전 세계의 인터넷망, 인트라넷, SNS 네트워크 등.
모든 정보통신을 장악하려 시도할지도 모른다.
상대는 살아 있는 핵무기급의 전략적 가치가 있다.
차은성은 상대의 삶이 철저히 파괴되는 최악의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친구이기에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괜찮아. 절대 흔적 같은 건 안 남겨. 내가 누군데.
―하지 마!
―알았어. 네 말대로 하지 않을게. 다만, 우리 애들에게 돌려 무슨 내용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볼게.
―애들이라면?
상대가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어나니머스 멤버들을 말했다.
―너어…….
―헤헤. 은성이 네가…… 걔네들과 내가 엮여 내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 다 알아.
―…….
차은성은 키보드를 치던 것을 멈췄다.
해당 혼용문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포기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