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51)
현대의 귀족
순경과 지구대 경찰들에게 들으라는 듯.
민해경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 해경이.”
“아……. 해경이구나?”
“아빠는?”
“청장님은 회의에 들어가셨어.”
“말 좀 전해 줘.”
“말?”
“그래. 내가 지금 ×× 지구대에 있어.”
“…….”
폰 너머에서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다. 폰 너머의 통화 상대방.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 엄청 당황하고 있지는 않을까?
민해경이 버럭 소리쳤다.
“왜 말이 없어?”
“휴우우.”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구대 대장이 아마 경위일 거야. 거기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 좀 바꿔 줄래.”
“보이스 모드니깐 그냥 말해.”
“해, 해경아.”
당황한 통화 상대방이 말을 더듬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거잖아. 아버지가 경찰청장이라는 거.”
민해경이 소리쳤다.
순간. 지구대 안이 조용해졌다.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릴 정도로, 잠시 잠깐 지구대 내부가 고요해졌다.
세 일진 여고생이 민해경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 경찰 총수. 경찰청장.
직급은 차관급이지만, 주어진 권한은 대한민국 권력 서열 5위 안에 든다.
순경, 지구대 경찰들.
모두 아연실색했다.
대한민국 10만 경찰 총수의 딸!
폰 너머의 청장 비서관 김다연이 말했다.
“거기 책임자가 누구죠?”
“…….”
“책임자가 누구예요?”
김다연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지구대 대장인 안지형 경위가 급히 말했다.
“아, 예에. 안지형 경윕니다.”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곧 사람이 갈 거니깐 그때까지만 해경이를 맡아 주세요. 그리고 거기 간 사람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요.”
김다연이 이어 말했다.
“이 일!”
“…….”
“기자들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원들 입단속 잘하세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안지형 경위님?”
“네. 잘 알겠습니다.”
“휴우우.”
폰 너머에서 김다연이 한숨을 쉬더니.
“해경아.”
“…….”
“해경아!”
민해경이 침묵하자 김다연이 소리쳤다.
“듣고 있어.”
“너어,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러니. 응?”
“…….”
민해경은 태연했다. 얼굴 표정의 변화는커녕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청장님 생각은 안 하니? 너 이럴 때마다 청장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지시는지 알아?”
“내 엄마도 아닌데 잔소린 이쯤 하지.”
“뭐?”
“아빠에게 전해. 나, 이 지긋지긋한 한국 좀 떠나게 해 달라고. 왕짜증이야!”
민해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폰 너머의 김다연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민해경이 전화를 끊고 폰을 앞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오른발을 들어 왼발에 얹으며 팔짱을 꼈다.
그러곤 예의 순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이 조소임을 모를 수 없다.
“간도 크지. 언감생심, 청장 딸내미에게 조금 전에 뭐라 말했더라?”
민해경이 제법 매서운 눈으로 순경을 바라보았다.
완전 쫀 순경!
경찰청장.
해당 직함이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에 심신이 완전 짓눌려 버렸다.
지구대의 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이없어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안지형 경위 역시…….
* * *
다음 날.
다다다다다.
노태준이 병원 복도를 뛰듯이 걷는 중이었다.
마음이 이만저만 다급한 것이 아니다. 공항에서 곧바로 집으로 왔다.
출장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 된 딸이 혼자 있다. 혼자서 밥과 반찬을 해 먹으며 혼자서 설거지를 해야 한다.
혼자서 학교에 가야 하고, 혼자서 숙제를 해야 하며, 혼자서 대입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혼자서 쓸쓸히 집에서 자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로서는 불안 그 자체다.
그런 딸이 집에 없었고. 집에는 사람이 머문 흔적도 온기도 없었다.
NIS 필드 요원이기에 집에 혼자 있는 딸 걱정에 나름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 조치들이 한동안 딸 연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급한 마음에 딸의 친구들에게 전화했다. 그런 한편으로 김아름에게 연락해서 딸의 폰 위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노력 끝에, 딸 연지가 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게 다쳤을지 모르는 딸에 대한 걱정에 노태준은 이만저만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러하겠지만, 딸에 대한 걱정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딸 생각뿐이다.
* * *
손잡이를 쥐고 막 병실 문을 열려는데 안에서 대화가 들렸다.
“연지야. 어서 사인해. 사인만 하면 병실도 편하고 좋은 1인용 병실로 옮겨 줄 거고. 입원 비용은 물론,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와…… 네가 대학에 합격하면 등록금까지 내주실 거야.”
“학생. 선생님 말씀처럼 여기 이 종이 아래에 이름 적어. 사인을 해도 되고 지장을 찍어도 돼. 그럼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세요, 변호사 아저씨. 저, 안 찍는다고 분명히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찾아와서 합의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연지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허, 연지야. 애가 버릇없이!”
선생이 변호사를 편들었다.
“선생님.”
“그럼 못써. 어서 사인해. 어서!”
“왜 그러세요? 전 사인하기 싫어요. 싫다고요.”
“애가 왜 이렇게 뻗대. 네가 사인하면 모든 것이 조용히, 다 좋게 끝나는데 왜 고집을 피우고 그래. 너 이러다 정학당해, 정학! 알겠니? 정학당하면 나중에 대학교 입학 면접에서 얼마나 불리한 줄 아니.”
선생이 에둘러 연지를 협박했다.
“학생. 그냥 사인해. 봐하니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한 것 같지 않은데,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변호사가 돈을 입에 올렸다. 다인용 병실임에도 환자는 연지밖에 없었다.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조치가 취해진 듯하다.
* * *
대화를 들은 노태준은 이성을 잃었다. 부모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콰아앙!
부서져라 문을 열어젖히며 노태준이 일갈했다.
“누가아아아아!”
병실이 떠나가라 내지르는 노태준의 분노에 찬 외침에 선생과 변호사가 돌아봤다. 놀라고 당황한 두 사람이다.
“내 딸을…… 건드렸어어어어!”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눈에서 불을 토하는 노태준이었다.
돌아본 연지.
“아, 아빠…….”
당황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성을 잃은 아버지 노태준이다. 온몸으로 쏟아 내는 분노가 심상치 않다. 흔한 말로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사람을 죽여 본 노태준이다.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살인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살기를 마구 뿜어 댔다.
필드 요원으로서 지금까지 죽인 이만 줄잡아 수십여 명이다. 그런 노태준이 사람을 죽이려는 기운을 온몸으로 발한다. 그 서슬이 평범할 리 없다.
선생, 변호사, 연지가 놀라고 당황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듯이 연지가 앉은 병원 침대에 이른 노태준이 제일 먼저 선생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정확하게 오른손 주먹을 선생의 얼굴에 꽂았다.
그 광경에.
“꺄아악!”
연지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아빠!”
불시에 공격당한 선생이 병실 바닥에 쓰러졌다.
와당탕.
노태준이 선생에게 소리쳤다.
“네가 그러고도 선생이야!”
선생은 어쩔 줄을 몰랐다. 급히 일어나며 양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코피!
그 광경에 놀란 변호사가 두어 걸음 뒷걸음쳤다.
노태준이 변호사를 돌아보며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소리쳤다.
“미성년자에게 사이이인?”
“아, 아버님. 이러시면…….”
변호사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벼락 치듯이 다가선 노태준이 다시 한번 주먹을 변호사의 얼굴에 꽂았기 때문이다.
퍼억.
콰당당.
바닥에 쓰러진 변호사가 몸을 옆으로 굴렀다.
“으으.”
아픔 때문에 신음을 흘리는 변호사. 은근 쾌재의 눈빛을 띠었다.
‘잘됐어.’
심중 좋아했다. 한 대 맞았으니, 이를 빌미로 노태준을 위협. 합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합의금을 최소 금액으로 하거나, 아예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개애새끼야아아아!”
이성을 잃은 노태준이 발로 변호사의 가슴과 얼굴을 마구 걷어찼다.
퍼퍼퍼퍼퍽.
변호사가 저항 없이 비명을 지르며 발길질에 계속 당했다.
“아아악! 사람 살려요. 아악! 사람 살려!”
간호사들이 오기를 바라며 변호사가 황급히 고함쳤다.
그사이.
“아빠!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연지가 소리쳐 노태준을 말렸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노태준의 귀에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 * *
다음 날.
“그게 무슨 소리야? 태준 선배가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니?”
차은성이 이해되지 않아 폰 너머의 김아름에게 언성을 높였다.
“팀장. 그게요, 그러니까요.”
김아름이 서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차은성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그런 한편으로 후회했다.
작전 중일 때, 연지 곁에 사람을 붙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방심과 안일함이 일을 부른 것 같아 차은성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윽고 김아름의 설명이 끝나자 차은성이 말했다.
“알았다. 일단 내가 알아보마.”
“네. 팀장. 그럼.”
“그래. 들어가라.”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폰을 하의 우측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뒤에서 라센느의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 * *
몇 시간 후.
차은성은 오주택 변호사와 함께 ×× 경찰서를 찾았다. 노태준이 경찰서 유치장에 있어, 일단 그를 빼낼 생각이었다.
내심 다행이라는 다소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노태준이 경찰에 대응했다면 유치장에 갇힐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대신 문제는 더 커졌을 것이다.
아마도 노태준이 순순히 경찰에게 순응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유치장에 갇혀 있는 것이리라. 이유야 어찌 되었든 법을 존중하는 노태준이었다.
* * *
“예에애?”
차은성은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반문했다. 오주택 변호사가 무척 당황했다.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라…….”
경찰이 노태준을 풀어 주기를 거부했다. 심지어는 면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오주택 변호사가 강력히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장의 특별한 지시를 받은 담당은 완강했다.
오주택 변호사가 법 조항까지 들먹이며 압박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오주택 변호사는 어쩔 줄을 몰랐다. 관례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담당의 완강한 태도에 황당하다는 감정을 피력했다.
“누군가 찍어 누르는 것 같네.”
오주택 변호사의 말에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성난 마음을 숨기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늘한 눈빛을 띨 뿐이었다.
* * *
비서관 김다연이 수화기를 귀에 대고 당혹스러워했다.
“네.”
대답에 이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보국장 임범철이 보자고 한다.
“혹시…….”
김다연은 정보국 과장들 중 한 사람인 최상국 과장을 생각했다. 그에게 몰래 노태준에 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을 정보국장 임범철이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정보국장을 거치지 않고 실무자인 최상국 과장에게 부탁한 것을 트집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으음…….”
김다연이 침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천천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