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50)
노태준이 중얼거렸다.
“자백제?”
“맞는 것 같은데요.”
“CIA 애들. 랭글리에 보내기 위해 촬영한 것 같은데.”
“CIA 덕분에 대박을 건진 것 같아요. 호호호.”
김아름이 활짝 웃으며 차은성, 노태준, 황민준, 우형광을 돌아봤다.
“아름아.”
“네, 팀장.”
“영상을 처음으로 다시 돌리고 소리를 좀 더 키워 봐.”
“네.”
김아름이 대답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영상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웅얼거림이 보다 크게 들렸다.
잠깐이란 시간이 지나고.
노태준을 비롯하여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이 들뜬 표정을 지었다.
“33호실 애들. 김병두를 데리고 가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런 영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은데.”
노태준이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와우.”
우형광이 목청을 높였다.
“죽이는데요.”
황민준이 살며시 웃었다.
김아름은 차은성을 돌아봤다.
“팀장.”
“간만에 아름이 네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물론이죠.”
김아름이 만면에 미소 지었다.
노태준이 그녀를 돌아봤다.
“아름아.”
“네. 선배.”
김아름이 노태준을 보았다.
“명품은 이제 안 된다.”
“예에. 알아요. 감찰실 조사 때, 명품 때문에 진땀깨나 뺐어요.”
김아름이 대답하며 질렸다는 기색을 지었다.
황민준과 우형광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북한 애들이 김병두 영사가 자백제에 당했다는 것을 알 텐데요.”
황민준이 말하며 차은성을 보았다.
“한발 빨리 움직여야지.”
차은성의 말에 우형광이 김아름을 보았다.
“아름이가 신호등에 조금 장난을 치면 33호실 애들이 은행에 가는 것을 어느 정돈 늦출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형광의 말에 김아름이 자신만만한 눈빛을 띠더니 양손을 들었다. 이어 깍지를 끼더니 앞으로 쭉 뻗었다.
뚜, 뚝.
그러자 뼈마디가 어긋나는 몇몇 작은 소리가 울렸다.
* * *
다음 날. 로마 SIBB 지점.
중절모에 두꺼운 외투를 입은 중년의 백인이 막 계단을 내려와 1층에 섰을 때다.
“팀장. 33호실 요원들이 도착했어요.”
귀에 낀 이어폰에서 김아름의 음성이 들렸다.
“알았다.”
차은성이 대꾸하며 우로 돌아섰다.
* * *
은행으로 이혜란을 필두로 다섯 명의 사내가 급히 들어왔다.
그들은 곧바로 2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장식용 화분을 좌에 두고 몸을 가린 차은성이 그들을 흘겨봤다.
‘훗.’
한발 늦었다. 이미 자금은 룩셈부르크로 빼돌렸다.
그 사실을 알면 이혜란이 광분할 것이다. 한두 푼도 아니고 미화 7억 달러다. 곧 그 자금이 CIA 수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보나 마나 평양에서 이혜란에게 단단히 한 소리 할 것이다.
차은성은 이혜란을 비롯한 다섯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빨리 입구로 걸어갔다.
* * *
밖으로 나왔을 때, 황민준이 운전하는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차은성은 서둘러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탕.
차 문을 닫자마자 차가 움직였다.
* * *
얼마 후.
은행 밖으로 이혜란과 다섯 사내가 부리나케 나왔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혜란이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쓸어 넘기며 매우 성난 표정을 지었다.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 * *
차은성과 팀원들이 이탈리아에서 작전 중일 때다.
짜악!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꽤나 크게 울렸다.
“악!”
연지가 비명을 지르며 털썩 골목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면과 좌우에 서 있는 세 일진 여고생.
당혹스럽게도, 그들이 서슴없이 발을 들더니 무자비하게 연지를 짓밟았다.
콰, 콰, 콱.
연지가 비명과 함께 양손을 들었다.
“아악.”
그러곤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세 일진 여고생의 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방어 동작이었다.
그런 연지를 한 일진 여고생이 지켜보고 있었다.
세 일진 여고생 뒤에 있는 골목 담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문 민해경.
오른손을 들더니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웠다.
후우우우.
그러곤 입에서 떼며 하얀 담배 연기를 뿜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민해경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연지를 바라보았다. 똘마니 격인 세 일진 여고생이 무작스럽게 손봐 주고 있다.
연지가 당하는 모습에 민해경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일종의 우월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상대에게 얼마든지,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수 있다.
한데.
상대는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상대가 내게 할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
내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야 한다. 내가 짓밟으면 짓밟는 대로 짓밟혀야 한다.
나는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지만, 상대는 내게 고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폭주를 의미한다.
“훗.”
담배를 피우며 민해경은 세 일진 여고생에게 당하는 연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이제까지 연지는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면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렇다 할 접점이나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애들로 하여금 연지를 손봐 주는 것은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학교 화장실을 나오며, 마침 화장실로 들어오던 연지와 몸이 살짝 부딪쳤다.
연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없이 그냥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것에 눈에 거슬리고 짜증이 난 민해경이다.
그릇된 우월감은 어린 여고생인 그녀에게 자신이 여느 사람들과 다르고 특별하다는 일종의 계급의식을 심어 주었다.
귀족과 평민!
봉건 왕조 시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계급의식은 21세기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수많은 병폐 중 하나다.
* * *
한참을 구타당한 연지가 땅에 쓰러져 신음했다.
“으으…….”
머리맡에 민해경이 서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발을 들더니 지그시 연지의 머리를 밟았다.
꾸욱.
그러자 연지가 아픔을 호소하는 신음을 흘렸다.
“으으…… 내, 내가 뭘 자, 잘못했다고…….”
너무도 억울한 마음에 연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민해경이 연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이 바퀴벌레를 보면, 백이면 백, 다 싫어해. 왜 그런 줄 알아?”
“…….”
“바퀴벌레니깐 그런 거야.”
“…….”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고 발로 밟아 죽여 없애고 싶고. 내 눈앞에서 싹 치우고 싶은…… 보는 것 자체가! 눈에 띄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운 바퀴벌레!”
민해경이 에둘러 말했다. 그녀에게 연지는 예의 바퀴벌레라고.
“으으…… 나, 나안…… 아, 아니…….”
민해경은 발을 떼며 짜증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게 그래도!”
21세기의 계급주의에 심하게 잠식된 민해경이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홱.
눈에 보이는 세 똘마니.
“애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이래!”
“해, 해경아. 그게…….”
“뻗대는 거야. 그래, 맞아. 뻗대는 거야.”
“우, 우리가 다시 손볼게.”
세 일진 여고생이 급히 말했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민해경을 두려워함을.
민해경이 쌍심지난 듯 험악한 눈빛을 띠었다.
“확실하게 손봐!”
“알았어.”
“그럴게.”
세 일진 여고생이 급히 말하며 연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들의 구타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퍼퍼퍼퍼퍼퍽.
연지는 구타에 일절 대항하지 못했다. 차면 차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샌드백처럼 온몸으로 구타를 감당해야 했다.
* * *
한참 후.
인근 지구대.
골목에서 벌어진 구타를 본 누군가의 신고로 지구대 순찰차가 출동했다.
민해경, 세 일진 여고생은 순찰차와 지구대의 경찰들을 보고도 태연했다. 전혀 겁내지 않았다.
연지를 인근 병원에 데리고 가 치료를 부탁하고, 경찰들이 지구대로 민해경과 세 일진 여고생을 데리고 왔다.
그녀들을 다인용 소파에 앉히고 지구대 막내인 순경이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가해자에게 상황을 물어보는, 조사 같지도 않은 조사였다.
나태와 태만이 낳는 안일함.
대상이 청소년이란 점 때문에,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지구대 막내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다.
민해경과 세 일진 여고생은 비협조적이었다.
“어차피 니들 학교와 부모님들께 연락할 수밖에 없어. 그 전에 순순히 말해. 뭐 때문에 그 애를 집단 구타한 거야? 대체 뭐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팬 거냐고?”
순경이 격앙된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세 일진 여고생이 서로 돌아보았다. 이어 순경을 동시에 마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러니깐 그게요…….”
“그것이…….”
“우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세 일진 여고생이 말하기 어려워하며 민해경을 흘겨봤다. 민해경을 몹시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순경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니들.”
“…….”
“요즘 학교 폭력을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는 줄 알아.”
순경의 말에 세 일진 여고생이 몸을 움찔거렸다. 바보가 아니다. 뉴스에 자주 학교 폭력 관련 기사가 나온다.
“검사도, 판사도 학교 폭력을 단순하게 보아 넘기지 않아.”
순경이 세 일진 여고생에게 겁을 주었다.
“좋게 말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순경의 말에 민해경이 똑바로 쳐다보더니.
“감당할 수 있겠어요?”
물으며 조소의 눈빛을 띠었다. 순경을 비웃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태도였다.
순경이 움칫하더니 민해경을 보았다.
“너.”
“감당할 수 있겠냐고?”
거리낌 없이 반말을 내뱉는 민해경이다. 그 태도와 언행을 들은 지구대 경찰들이 돌아봤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요즘 애들은 정말이지.”
“아주 간이 배 밖에 나왔지, 나왔어.”
“부모가 누군지. 참.”
그들의 중얼거림을 들은 민해경이 돌연 쳐다보더니.
“입!”
“…….”
“안 닥쳐……어어어!”
버럭 고성을 질렀다. 그 바람에 옆에 앉은 세 일진 여고생이 화들짝 놀라더니 급히 좌측으로 모여들었다. 그러곤 겁먹은 눈으로 민해경을 돌아봤다.
* * *
한편.
순경을 포함한 지구대 경찰들은 황당해했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어, 다들 잠시 말을 잃었다.
“겨우 경장, 경사들 주제에.”
민해경이 거리낌 없이 재차 고성을 질렀다.
순경과 지구대 경찰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 낮게 웃고 말았다.
“풋.”
“훗.”
민해경이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현실감각이 거의 없다.
순경과 지구대 경찰들의 웃음에 발끈한 민해경이 폰을 꺼내더니 보이스 모드로 돌렸다. 그러곤 단축 번호를 신경질적으로 꾹꾹 힘주어 눌렀다.
띠리리리리.
신호가 가고, 이내.
“네, 청장실입니다.”
낭랑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