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44)
차은성이 최관우와 두 부하를 바라보았다.
“저희도 퇴출하죠.”
“항공기까지 동원한 건가? 차 팀장.”
최관우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바나나 농장에서 농약을 살포하던 기체를 잠시 대여한 것뿐입니다.”
“농약 대신 휘발유 뿌리려고 말인가?”
최관우의 물음에 차은성이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차 팀장.”
“…….”
“다니오의 주민들은 민간인이네. 작전 대상이 아니야.”
최관우가 진한 염려를 내보였다.
차은성이 우로 돌아섰다.
“압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에게 적극 협력했습니다. 사실상 교전 대상자에 들어간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차은성이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선택에는 늘 책임과 대가라는 결과가 따릅니다.”
“…….”
“다니오의 주민들은 로드리게스에게 협조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차 팀장. 하지만…….”
최관우가 말끝을 흐리며 은근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자 차은성이 걸어가며 말했다.
“응징입니다. 그리고 응징은 언제나 가혹한 법이죠.”
“차 팀장! 대형 화재가 될 수도 있어.”
걸음을 떼는 차은성이 왼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쯤이면 필리핀 경찰과 소방 병력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테니까요.”
차은성의 말에 최관우가 움찔하더니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씨익.
차은성이 미리 조치를 취한 모양이다.
최관우가 이내 멋쩍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야…….”
이내 최관우와 두 부하가 차은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고.”
“빨리 오십시오.”
그새.
손을 내린 차은성이 대답하며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 * *
한참 후.
일단의 경찰차와 소방차들이 다니오에 도착했다.
각 차량에서 내린 경찰들과 소방관들은 화마에 휩싸인 다니오를 보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화르르…… 화르르르르.
얼마나 불길이 거세고 강력한지, 다니오가 대낮같이 밝았다.
또한 너무 뜨거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소방 지휘관이 무전망을 통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방화복과 관련 장비가 필요하다고.
자신들만으로는 끌 수 없다고.
지급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다니오 내에서는 지옥의 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꺄아아악!”
“아아악!”
“안 돼에에.”
불길을 피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살길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다니오의 미로가 그들의 안간힘을 비웃듯 치명적인 위기를 안겨 주었다.
불길은 차은성의 생각 이상으로 크게 번졌다. 기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온 다니오를 불태울 것처럼 그 기세가 엄청 사나웠다.
또한 다니오의 미로 때문에 세 자릿수의 사망자가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적당한 응징!
차은성은 그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다니오의 화재는 그런 차은성의 예상을 훌쩍 벗어나 버렸다.
불과 1~2시간에 다니오를 잿더미로 만들고 일백여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남기고 말았다.
차은성은 의도와 달리 다니오의 주민들에게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응징을 가하고 말았다.
로드리게스에게 적극 협력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도록 강요했다.
* * *
최관우가 이끄는 불렛 팀이 1시간 후 사전 약정된 포인트에서 인질들을 각국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인계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 이륙 준비를 끝낸 DHL 화물기에 탑승. 곧바로 이륙했다.
* * *
이틀 후. 필리핀 세부.
철썩철썩.
선베드에 누운 차은성이 석양의 바다를 바라보며 통화 중이었다.
“너! ……너어어!”
폰 너머의 박영광이 말을 잇지 못했다.
감격이 아니라 화 때문이다. 늘 임무가 끝난 뒤에는 골머리가 아픈 뒤치다꺼리를 왕왕 남기는 팀 아르티펙스였다.
“…….”
차은성은 침묵했다.
인질 구출!
다니오의 화재!
필리핀 일간신문 일면에 실린 톱기사들.
인질 구출 과정에서 로드리게스의 부하들과 교전이 있었고. 그 와중에 우연히 일어난 화재가 그만 대형 화재로 화하고 말았다.
기사는 그렇게 추정하고 있었다.
“너어…….”
“…….”
“청와대에서 인질 구출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 때문에!”
“…….”
“내가 건넨 상납 장부 때문에 라울 필리핀 대통령과 얘기가 잘된 덕분에!”
“…….”
“무사히 넘어가는 줄 알아!”
“…….”
“죽은 사람이 백여 명이 넘어, 백여 명이!”
박영광이 화를 참으며 말을 이었다.
“…….”
“아무리 인질과 관련하여 로드리게스에게 적극 협력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너! 너무 과격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감정을 통제하란 말이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너, 네 안에 있는 또 다른 네게 먹혀! 그럼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박영광이 연거푸 고함쳤다.
“…….”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박영광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박영광의 말이 얼추 끝났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줄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해당 작전은 불렛 대원들의 안전한 퇴출을 보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휴우우.”
박영광이 폰 너머에서 한숨을 쉬었다.
“이번 작전으로 국방부에서 불렛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긴 했지만…… 관련 국가의 주한 대사들이…… 대놓고 말은 하지는 않지만, 불렛의 무자비함에 혀를 내둘렀어……. 한국에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한 특수부대가 있는 거냐고…… 외교부 장관님이 시치미를 떼시느라 아주 혼쭐이 나셨어.”
“…….”
“무슨 악마의 특수부대쯤으로…… 주한 호주 대사가 뭐라고 한 줄 알아?”
“…….”
“헬 아미란다, 헬 아미!”
“…….”
“제발 부탁이다. 응? 작전 성공도 좋지만, 뒷마무리도 좀 신경을 써!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박영광이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끊어!”
박영광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소리쳤다.
뚜우우우우.
전화가 끊겼다.
차은성이 폰을 우측에 내려놨다.
그러자 좌우에 있는 선베드에 누운 팀원들이 돌아봤다.
“국장보?”
노태준이 묻자 차은성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맞다!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일은 엎질러졌습니다. 주워 담을 수 없는데 신경 써 봐야 뭐합니까?”
차은성이 말하며 석양을 바라보았다.
노태준,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 *
메디슨 스퀘어 파크.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주변 경관을 배경으로 몇몇 이들이 조깅 중이었다.
타타타탁.
후드 집업을 입고 양쪽 귀에 이어폰을 낀 여성이 조깅 중이었다.
조성된 코스를 따라 뛰는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후, 후우, 후우.”
쉬지 않고 뛰는 그녀는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요?”
“…….”
“좋죠. 나쁘지 않아요.”
“…….”
“하지만 지금 당장은 힘들어요.”
“…….”
“자료를 주셨다고 해도, 저 나름 이래저래 알아볼 것이 꽤 많거든요.”
“…….”
“부국장님!”
“…….”
“별수 있나요? CIA에 고용된 킬러 주제에. 명령하면 명령대로 움직여야죠.”
여인이 말하며 싱긋 웃었다.
“…….”
“우리 부국장님. 엄청 화나셨네. 호호호.”
“…….”
“놀리는 거 아니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
“부국장님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곤란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한 후에 한국으로 가도록 하죠.”
“…….”
“네에. 최대한 서두르겠어요. 그리고 보수는 언제나처럼…….”
“…….”
“호호호. 그렇담 저야 탱큐죠.”
여인이 웃으며 뛰던 것을 멈췄다. 이어 서며 손을 들어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활짝 밝게 웃는 여인.
코드명 마담 화이트.
부국장 JK. 시먼스가 가진 몇 장의 히든카드 중 하나다.
* * *
팀원들과 잠시 떨어진 차은성이 리조트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몇몇 사람이 밖으로 나오고 한 여인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그녀가 눈에 보인 순간, 차은성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어머?”
놀라 걸음을 멈추고 선 한승희.
“차 실장님.”
차은성이 순간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망할!’
한승희와의 뜻하지 않은 만남. 뭔가 꼬이는 기분이다.
“여기서 차 실장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호호.”
한승희가 반가운 척 말을 걸었다. 그녀 나름의 꿍꿍이가 있는 인사말이었다.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며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우측에 있는 패널로 급히 다가갔다. 그러곤 급히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그사이.
한승희가 돌아섰다.
“차 실장님.”
“…….”
차은성은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 이내 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차 실장님.”
문틈으로 소리쳐 부르며 다가서는 한승희.
차은성은 그녀를 보고도 가타부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왜 하필 여기서!’
심중 중얼거리며 곤혹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간만에 갖는 휴식인데, 아무래도 휴식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일 것만 같다. 심중 깊은 곳에서 불안이 싹트는 느낌에 차은성의 안색이 슬며시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