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45)
홀리데이 세부
“기가 막혔어!”
한승희는 어이가 없었다. 아닌 말로 생 깐 차은성이다.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대했다.
한승희는 잔뜩 성난 눈으로 닫힌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아우우.”
한승희가 양손을 말아 주먹 쥐며 험악한 인상을 썼다.
화가 단단히 난 모습이다.
* * *
날이 저문 저녁. 세부의 밤거리.
차은성과 팀원들이 저녁을 먹고, 적당한 디저트 가게를 찾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런데…….
“꺄아악!”
“사람 살려요.”
“폴리스. 폴리스. 헬프 미. 폴리스.”
여자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런데 개중 몇 마디가 한국어였다.
“팀장.”
여자라서일까? 김아름이 걸음을 멈추고 차은성을 돌아봤다.
우형광, 황민준, 노태준 역시 걸음을 멈추고 차은성을 돌아봤다.
“팀장!”
노태준이 눈짓으로 좌측 펍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딸 가진 아버지이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흠.”
걸음을 멈춘 차은성이 좌로 돌아섰다.
* * *
대여섯 명의 서양인이 세 명의 소녀를 중앙에 두고 빙 에워쌌다.
서양인들 모두 술에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 각자 손에 술병을 들고 휘파람을 불며 뭐라 소리쳤다.
술김에 세 소녀를 희롱하는 광경을 보고도 주변에 있는 이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개입하지 않았다. 방관하는 그들의 이기적이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세 소녀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 같다.
돌연.
“스톱!”
노태준이 소리치며 천천히 세 소녀에게 걸어갔다.
딸 연지보다 두서너 살 위로 보이는 세 소녀가 노태준을 보곤 일순 반색했다. 그녀들은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이며 노태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도와주세요.”
“이 사람들이…….”
“진정해라, 애들아.”
노태준이 말하며 세 소녀를 에워싼 대여섯 명을 돌아봤다.
그들은 노태준을 보고 주춤거렸다.
노태준 뒤에서 천천히 걷는 차은성,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
노태준의 일행으로 보이기에 무리가 없었다. 하여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하지만 취한 터라 서양인들이 노태준,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에게 소리쳤다.
“갓 뎀!”
“옐로 몽키들이!”
“push off!”
몇몇이 차은성과 팀원들에게 소리쳤다. 술 때문에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언행이었다.
차은성이 픽 웃더니 천천히 말했다.
“적당히 해라.”
“네. 팀장.”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이 앞으로 나섰다.
* * *
한바탕한 후. 인근에 위치한 디저트 카페에서 차은성이 세 소녀에게 디저트와 마실 것을 사 주었다.
세 소녀가 연방 맛있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차은성을 제외한 노태준, 김아름, 황민준, 우형광.
그들 사이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세부가 관광지라서 세계 각지에서 별의별 인간들이 다 와. 그러니깐 조심하도록 해. 꼭 일행들과 함께 다니고…….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애들아.”
노태준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저희들은 뮤비 촬영 왔어요.”
세 소녀 중 한 사람인 송나리의 말에 팀원들이 영문 몰라 했다.
“저희들, 이제 곧 데뷔하는 신인 걸 그룹이거든요.”
송나리에 이어 김남주, 방다솔이 말했다.
“내일 출국하기 때문에 저희들끼리 추억을 만들려고 몰래 나왔다가…….”
세 소녀의 말에 김아름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머! 그러니?”
노태준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콜라를 마셨다.
황민준, 우형광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차은성은 당혹스러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너희들.”
다들 차은성을 쳐다봤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니?”
“네.”
송나리, 김남주, 방다솔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더 당황한 차은성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꼬인다!
뭐같이…….
* * *
이틀 후. 로마.
원형의 교차로를 빠져나온 차랑 한 대가 한 도로로 접어들었다. 차량은 도로를 주행하다가 공사 현장과 조우했다.
현장 관계자가 봉으로 좌측을 가리켰다.
―우회해라.
무언의 수신호에 차량 운전기사와 탑승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내 차량을 돌렸다.
우회로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빠앙!
폭음이 연상되는 큰 소리가 터졌다. 타이어에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한 기사가 차를 세웠다.
이어 실내 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중년인 김병두를 보았다.
“죄송합네다, 영사 동지. 차에 문제가 생겨…….”
“빨리 조치하라.”
“네에. 영사 동지.”
기사가 대답하며 조수석에 앉은 이를 힐금거렸다.
“죄송합네다. 군관 동지.”
“됐으니끼니 서둘라.”
“예에에.”
대답하며 기사가 문을 열고 내렸다.
* * *
잠깐이란 시간이 지났다.
기사가 펑크가 난 타이어를 살피는 사이. 세 명의 남자가 속보로 다가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쪼그려 앉아 타이어를 살피는 기사에게 이르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내더니 기사의 뒷머리를 겨눴다. 그러곤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퓻.
* * *
다른 한 사람이 차창에 역시 소음기가 달린 총을 대더니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퓻.
막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차창으로 돌리던 조수석의 사복 군관.
퍽!
그의 이마 정중앙에 탄환이 깊이 박혔다. 그 충격으로 사복 군관의 목이 뒤젖혀졌다.
* * *
또 다른 사내가 거침없이 차 문을 열었다.
김병두가 돌아보며 크게 놀란 어조로 물었다.
“다, 당시…….”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차 문을 연 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김병두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치, 치이이이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면가스를 들이마신 김병두는 곧바로 의식을 잃고 힘없이 뒷좌석에 쓰러졌다.
털썩.
* * *
사흘 후. 서울 모처 옥상.
뒤돌아선 박영광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저벅저벅.
차은성이 걸어와 우측에 서더니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꼬옥 호출을 해도 한창 바쁠 때!”
화냈다.
봄이라, 라센느에 스타일을 바꾸려는 고객들이 연일 들이닥쳤다. 한마디로 말해 일이 넘쳐 나는데 박영광이 호출했다는 말이다.
호출 이유야 뻔하다. 오퍼!
후우우우.
박영광이 하얀 담배 연기를 뿜으며 화내는 차은성을 흘겨봤다.
“전 휴전선에 데프콘2가 떨어졌다.”
“예에에!”
차은성이 깜짝 놀라며 박영광을 홱 돌아봤다.
“1시간 후에 국방부에서 데프콘2 발령과 관련하여 발표할 거야.”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눈을 치떴다.
“북과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까?”
박영광이 담배를 피우며 상의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주 이탈리아 주재 북한 영사 김병두가 실종됐다.”
차은성이 흠칫하더니 반문했다.
“망명입니까?”
이어 말하며 메모리 카드를 받아 챙겼다.
“아니!”
단언하는 박영광이었다.
“망명이 아니라면 스스로 종적을 감춘 겁니까?”
“아니! 운전기사와 경호원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누구 짓입니까?”
차은성이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후우우.
박영광이 하얀 담배 연기를 뿜었다.
“현지 지사에서 전력을 다해 알아봤는데. 뜻밖에도 CIA야.”
“예에에?”
차은성이 깜짝 놀랐다.
CIA가 북한 영사를 납치하다니. 이건 전쟁하자는 도발이나 다름없다.
“CIA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이유야 있긴 하지.”
“무슨 이유요?”
차은성이 묻자 박영광이 담배를 피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쿄 작전으로 시먼스 부국장이 지금 상원 정보위에 출석해서……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달려든다는 말이 있지만…… 시먼스 부국장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야.”
“…….”
“상원 정보위에 뭔가 카드를 제시해서 직위의 유지를 꾀하려고 한 모양인데. 하긴 상원 내에 시먼스를 받쳐 주는 상원 의원이 몇 있으니, 분위기만 잘 조성하면 불가능하진 않아.”
“…….”
“그 딴에는 한직으로 밀려나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모양이야.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무모해.”
박영광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발치에 버렸다. 그러곤 발로 비벼 끄며 계속 설명했다.
“……김병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형주의 손자들 중 한 명이야. 소위 말하는 백두 혈통이지. 게다가 죽은 김정일의 비자금 중 일부를 운용하며…… 이탈리아에서 북으로 들어가는 사치품의 핵심 창구 중 하나야.”
“…….”
“시먼스 부국장이 김병두의 망명을 조작. 해당 비자금과 사치품의 창구 및 북한 관련 고급 정보를 확보! ……상원 정보위에 해당 성과를 어필하여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으려고…… 궁지에 몰려 무리수를 두어도 너무 무모한 무리수를 두었어.”
“…….”
“문제는 그 불똥이 애먼 우리에게 튀었다는 거야. 지금 북한 애들은 김병두의 실종이 우리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운전기사와 경호원을 죽이고 김병두를 납치. 망명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서울로 데려오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 때문에 지금 전 휴전선에 걸쳐 군사적 긴장이 장난이 아니게 고조된 상태야.”
박영광의 설명에 차은성은 침묵했다. 왜 데프콘2가 떨어졌는지 이해가 된다.
이윽고.
박영광의 설명이 끝나자 차은성이 물었다.
“설마 저희들더러 CIA에게서 김병두를 구출하라! 뭐 그런 오더를 내리시려는 건 아니시죠.”
“그랬다가는 북한 애들의 주장을 우리가 인정하는 꼴이 돼!”
박영광이 차은성을 돌아봤다.
“이번 일에 있어 우린 철저한 제3자가 되어야 해. 그런 한편으로 북한 애들에게 우리 짓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해.”
“저희에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차은성이 의혹의 눈빛을 띠었다. 그러자 박영광이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줄담배를 피우려 한다.
“아, 좀. 담배 그만 피우시고 말씀이나 빨리 해 보세요.”
차은성이 언성을 높였다.
“짜식이. 짜증 내기는…….”
“삼촌!”
“내가 삼촌으로 보이긴 하냐?”
“갑자기 말을 왜 돌리고 그러세요.”
“약 올라서 그런다. 왜?”
“삼촌. 업무 중이잖아요. 오퍼. 배경 설명 중이시라고요.”
“망할 자식들!”
“…….”
“세부에서 3일 푸욱 쉬다 오니 좋냐? 좋아!”
박영광이 언성을 높였다. 부러운 눈치다.
“아, 예. 그럼, 저 가요.”
차은성이 뒤돌아서려 했다.
“서! 인마!”
박영광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차은성을 불렀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아, 예에. 말씀하세요.”
차은성이 말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얄미운 자식. 지들만…….”
박영광이 은근 성내며 말했다.
“……평양에서 로마로…… 노동당 33호실 요원들을 보냈어.”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흠칫했다.
“33호실이라면, 백두 혈통을 전담 커버하는 곳이잖습니까?”
“맞아. 여차하면 김정남을 암살한 것처럼. 백두 혈통의 처리를 명령받은 유일한 부서지.”
“김병두가 만약 망명하려고 하면 즉시 제거해라?”
차은성의 말에 박영광이 담배를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팀이 로마로 가서 해 주어야 하는 일은…… 김병두의 정확한 소재를 파악…… 로마에 있는 노동당 33호실 요원들에게 해당 정보를…… 그들이 의심하지 않게 잘 흘려.”
“…….”
“33호실 요원들과 CIA의 충돌을 유도…… 그들이 서로 부딪치는 영상과 관련 정보를 최대한 모아…… 이번 일에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필히 알리는 거! 절대 잊지 마라.”
“…….”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 자칫하다가는 제2의 연평도와 같은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
“그리고 이번 오퍼는 사장님이 내리신 것이 아니라 VIP의 직접적인 지시야.”
순간.
“예?”
차은성이 놀라 눈을 치떴다.
“VIP가 니들 팀을 직접 선택! 오퍼를 내렸다고. 알겠어?”
“…….”
차은성은 뭐라 말하지 못했다. 느낀 놀람을 가감 없이 온몸으로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