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9)
죽어서도 국가에 헌신을!
며칠 후.
서울의 한 곱창집.
왁자지껄.
바로 옆 테이블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시끄러웠다. 구석진 자리에 있는 드럼통 테이블.
두 사람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크으.”
장년인 주철현이 박영광에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박영광이 잔을 받자 주철현이 소주병을 들더니.
쪼르르.
소주를 따랐다. 이어 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번에 수고 많았어.”
“CIA 애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박영광이 물으며 소주잔을 비웠다.
“무반응이야. 그게, 영 꺼림칙해.”
“음.”
박영광이 입에서 잔을 떼더니 주철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주철현이 잔을 받았다.
“뭔가 폭풍 전야 같은 기분이 듭니다.”
박영광이 병을 들었다.
주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박영광이 소주를 따랐다.
“가만있을 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3팀 건 때문에 무반응이지 않을까? 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야.”
주철현이 소주가 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건 너무 안일한 거 아닙니까?”
박영광이 말하는 사이, 주철현이 잔을 비웠다.
탁.
잔을 내려놓으며 젓가락을 집더니.
“윗대가리들이 다 그렇지 뭐.”
불판에 있는 곱창을 하나 집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도 되겠습니까?”
박영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철현이 입에 곱창을 넣고 천천히 씹었다.
“나쁘지 않지. 신분을 재세탁하고 거주지도 옮기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
주철현의 말에 박영광이 그를 보았다.
“은성이 말인데.”
“죄송합니다.”
“영광이 네가 죄송할 건 없고.”
“국장님.”
“솔직히 불안해.”
주철현이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놈!”
“…….”
“무모한 건지, 과격한 건지.”
“…….”
“아무리 사장이 보복 오더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겁도 없이 CIA 안가에 뛰어들어 일곱이나 죽였어. 게다가 공항에서 또!”
박영광이 병을 들었다.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이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습니까?”
박영광이 주철현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건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컨트롤하겠습니다.”
박영광이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철현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어 손을 들더니 담뱃갑과 1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난 지금도 은성이가 필드에서 활동하는 것에 회의적이야.”
“국장님!”
박영광이 힘주어 주철현을 불렀다.
주철현이 그새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다중성격장애는 필드 요원에게는 치명적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라고.”
박영광이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찰깍.
불을 켜자 주철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명인이 아들입니다.”
박영광이 말하며 주철현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알아.”
주철현이 내민 고개를 바로 하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죽은 명인이를 봐서라도…….”
박영광이 말끝을 흐렸다.
후우우.
주철현이 담배 연기를 뿜었다.
“녀석의 능력이 발군이라는 건 알아. 영광이 네가 직접 가르친 것도 알고.”
“…….”
“이참에 한 번 더 물어보자.”
주철현이 담배를 피우며 박영광을 보았다.
“대체 왜 은성이 녀석을 키우고 가르친 거냐?”
박영광이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예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지랄한다!”
주철현이 성난 어조로 툭 말을 내뱉었다.
박영광은 흔들림이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주철현을 보았다.
“은성이는 최곱니다. 요원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습니다.”
“됐어!”
주철현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 속내를 내비쳤다.
“당분간은 아르티펙스는 활동 중지야. 깊이 다이빙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철현이 주변을 살피더니 매우 낮은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듣는 박영광의 낯빛이 일순 확 바뀌었다. 긴장하는지 눈을 반짝이며 주철현의 말을 경청했다.
* * *
열흘 후.
서울 ×× 공원묘지.
차은성이 노태준과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일단의 이들이 몇몇 묘지 앞에 서 있었다.
노태준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말했다.
“나라를 위해 순국했는데 훈장 하나 없고, 국립묘지에도 묻히지 못하고 이런 외진 공원묘지라니. 니미!”
노태준이 성난 표정을 지었다.
훈장과 국립묘지 안장은 필히 기록이 남는다. 해당 기록은 죽은 필드 요원의 신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훈장도, 국립묘지 안장도 없다.
차은성이 말했다.
“우리 숙명이잖습니까? 선배.”
노태준이 옆에 서 있는 차은성을 힐긋거렸다.
“누가 몰라!”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차은성이 씁쓰름한 눈빛을 띠었다.
노태준이 시선을 바로 하더니.
“언젠가.”
착잡한 눈빛을 띠었다.
“…….”
“나도 저렇게 묻힐 거야.”
노태준의 말에.
“선배!”
차은성이 목소리를 높이며 돌아봤다.
“우리 숙명이잖아.”
노태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자 차은성이 멈칫했다. 방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이다.
“은성아.”
“네.”
“나.”
“…….”
“죽으면, 화장해서 바다에 몰래 뿌려 줘.”
“선배!”
“적어도 연지 녀석이 날 찾아와 질질 짜지 않게!”
“…….”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묘지가 있으면 연지가 종종 찾아와 울 것이다. 선배는 그것이 싫은 모양이다.
“하아아아.”
노태준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과 부인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걱정이다.”
“회사에서 보상금 나오잖습니까?”
“위장 회사 명의로…… 유족 보상금으로 달랑 1, 2억이야.”
“…….”
“아이들은 이제 어린이집을 다니고, 부인들은 젊어…… 아이들이 커서 대학 졸업하고, 사내 녀석들이 군대 다녀와서 취업할 때까지…… 딸내미들 교육비에다가 나중에 결혼할 때 혼수까지.”
“…….”
“못해도 20년이야. 1, 2억 갖고는 생활비도 안 돼. 대한민국 물가가 좀 무서워.”
노태준이 차은성을 돌아봤다.
“은성아.”
“네.”
“돈. 여유 있지?”
순간.
“끄응.”
차은성이 앓는 신음을 흘렸다.
‘왜 내 주변에는 내 뒤통수를 치려는 사람들밖에 없는 거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노태준을 돌아봤다.
“절 이곳으로 불러낸 이유가 돈 때문입니까?”
물음에, 노태준이 씨익 웃었다.
“우리 중에 네가 가장 돈 많이 벌잖아. 당연히 가장 많이 갖고 있기도 하고.”
“제가 앓느니 죽죠. 죽어요.”
“은성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조치를 취해 두었으니까요.”
“역시. 우리 팀장이야.”
노태준이 환하게 웃었다.
차은성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띠리리리리.
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받아 봐.”
노태준의 말에, 차은성이 옆으로 돌아섰다. 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후 귀에 댔다.
“접니다.”
“나다.”
“말씀하세요.”
“너, 말이 좀 거시기 하다. 응.”
“아닌데요.”
“아니긴. 혹시 모스크바 건 때문에…… 내가 니 뒤통수 쳤다고 삐졌냐?”
“지금 ×× 공원묘지에 있습니다.”
차은성이 말을 돌렸다.
“……오늘이 안장일이었어?”
“네.”
“휴우우우. 가 봤어야 했는데.”
“바쁘신 거 압니다.”
“녀석.”
“무슨 일입니까?”
“그게…….”
폰 너머에서 들리는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연후.
“알겠습니다.”
차은성의 대답에.
“CIA 새끼들. 동향을 좀 지켜보자.”
“네에. 들어가세요.”
“그래.”
차은성은 박영광의 대꾸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어 폰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노태준이 돌아보며 물었다.
“오더냐?”
“아니요.”
차은성이 본래의 위치로 걸어와 서더니 유족들을 바라보았다.
“신분 재세탁하고 거주지 옮기라고 합니다.”
노태준이 흠칫거렸다.
“상황이 심각한 거냐?”
“글쎄요. 일단은 CIA의…… 그리고 당분간 활동 중지하고, 그동안 재교육 받으라고 합니다.”
“뭐?”
노태준이 놀란 어조로 반문했다. 차은성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게 평소 단련 좀 해 두시라니깐.”
“마아! 연지 보살피고, 위장 신분으로 생활하는데 단련할 시간이 어디 있어. 제기랄!”
“연지에게 적당히 둘러대세요.”
“제기랄. 또 연지 혼자 두게 생겼네.”
“뭐하시면, 제가 사람을 따로 붙이고요.”
“그래 줄래?”
노태준의 물음에 차은성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데…….”
“…….”
“은성이 너.”
“…….”
“신분 세탁이나 거주지 이동이 힘들잖아.”
“…….”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은성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신분 재세탁과 거주지를 옮기라는 명령이라면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는 거 아니냐?”
노태준이 차은성을 걱정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조칩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
“상대가 CIA야!”
노태준이 경고했다.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누굽니까? 저, 차은성입니다. 차은성이요.”
차은성의 대꾸에 노태준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그것이 허세임을 아는 노태준이다.
차은성이 말했다.
“애들에게 통지해 주십시오.”
“알았다.”
노태준이 대꾸하며 물끄러미 유족들을 바라보았다.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동료들이다. 남은 유족들의 삶이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 * *
아흐레 후. 모 아파트 복도.
철컥.
문이 열리며 서른 후반의 여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시죠?”
“아, 안녕하세요. 저는 대영 생명보험 직원……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보험회사에서 무슨 일로?”
여성은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그러자 보험사 여직원이 생긋 웃었다.
“돌아가신 남편분께서 저희 보험사 상품에 가입을 하셨는데, 사망하셔서 그 처리 때문에 이렇게 방문했어요.”
“제 남편이요?”
여성이 깜짝 놀랐다. 여직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내부가 한적한 커피숍.
서른 어름의 여성이 놀라 양손을 들었다. 두 눈 아래 얼굴을 가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맞은편에 앉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여성을 향해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를 내밀었다.
“지난 6년 동안…… 수익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투자하신 회사 주식들이…….”
“오, 오빠가!”
여성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가가 붉어지며 물기에 촉촉이 젖었다.
그 모습에 남자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 부인.”
“흐흐흑.”
여성이 고개를 숙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 *
“그, 그이가요?”
마흔 중반 어름의 전업주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모르셨나 보군요.”
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 분께서 예전에 사 두셨던 땅이 이번에 택지 조성에 들어가게 되어서…….”
부동산 회사에서 나온 직원은 넌지시 주부에게 해당 땅의 시세를 말하며 이대로 보유할 경우 세금 부담이 매우 커지니 팔라고 종용했다.
“아이들을 생각하시면 파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시세보다 30% 이상 매입하려는…….”
주부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회사 워크숍 때문에 직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이 몰래 땅을 사 두었다고 한다.
남편이 돌연 사망하며 이제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된 아들과 딸을 데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죽은 남편이 마치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유산을 남겼다.
* * *
3팀의 유족들은 그렇게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많은 돈을 유족들에게 건넸고, 해당 상속이나 양도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로펌의 전문 변호사들이 작업하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