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8)
공장 내로 들어온 차들이 서고 이내 사람들이 내렸다.
그중 한 사람.
쉰 중반쯤 되어 보이는, 칼날 같은 인상의 남자.
그가 몇몇 이들의 경호를 받으며 세르게이에게 걸어왔다.
활짝 웃으며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드는 그를 본 차은성이 세르게이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세르게이가 그를 보며 대꾸했다.
“보포프. 내 상사지.”
“쯧.”
차은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연료 탱크에서 늘씬한 러시아 여인 타냐가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고르의 그것!
아마도 그 때문에 보포프가 온 것 같은데.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차은성은 진한 호기심을 느꼈다. 덜컥 욕심이 난다. 해당 것을 자신이 가지고 튈까?
‘훗. 아서라, 아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새 앞으로 두어 걸음 내디딘 세르게이를 보았다.
친구 아닌 친구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자신이나 박영광을 배신한 적이 없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도움을 주고받는 일종의 우호적인 협력자.
세르게이와의 관계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세르게이가 자신을 배신하거나 자신 쪽에서 세르게이를 배신하는 상황!
없으란 법은 없다. 자신이 있는 바닥은 늘 배신이 횡행하니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각자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친구와 적을 바꿀 수 있다.
차은성은 커피를 마시며 세르게이를 보았다. 보포프와 인사하는 중이다. 상사라서일까? 보포프에게 은근 저자세다.
차은성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뒤돌아서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나 FSB나.’
다 거기서 거기다. CIA도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은성이 뒤돌아섰다. 거의 다 마신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돌연.
타타타타타탕.
동시다발로 총성이 울렸다.
“아악!”
“으아악!”
총격에 당한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불시에 당한 총격이라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차은성은 총성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휙.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이어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상황 파악을 하려는 차은성의 눈에 혼란스러운 공장 내부와 총격을 당하는 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보포프와 함께 온 자들이 공장 내에 있던 세르게이의 부하들을 닥치는 대로 사살 중이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 중 몇 명도 동료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보포프와 함께 온 이들과 동료를 사살하는 이들이 한패임을 모를 수 없다.
“미친!”
차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급히 세르게이를 보았다.
한 사내가 왼쪽에 서서 세르게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장 방아쇠를 당길 참이다.
보포프가 세르게이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씩.
두 명의 남자가 보포프의 좌우에 서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 경호하고 있었다.
* * *
잠시 뒤.
세르게이와 함께 차은성이 서 있었다.
다섯 명의 남자가 총구로 두 사람을 겨눴다. 여차하면 사살할 태세다.
보포프가 세르게이에 이어 차은성을 보았다.
그때.
한 남자가 재빨리 보포프의 좌측으로 다가와 서더니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회수했습니다.”
보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해.”
“네.”
남자가 대답한 후 뒤돌아섰다. 그가 뛰어가고, 보포프가 세르게이를 보았다.
“유감이네, 세르게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보포프?”
“어떤 상황인지 자네라면 충분히 알 것 같은데.”
“이고르 밸라노프?”
세르게이의 말에 보포프가 싱긋 웃더니 차은성을 돌아봤다.
“운이 나쁘군. 용병 아닌 용병.”
차은성이 외부 전문가임을 아는 것 같다.
차은성이 옆에 서 있는 세르게이를 힐긋거렸다.
“세르게이.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라는 말을 망각한 대가가 너무 뼈아픈 거 아닙니까?”
“미안하군, 은성. 설마 보포프가 이고르에게 정보를 제공한 배신자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네.”
“쩝.”
차은성이 보포프를 보았다.
“날.”
“…….”
“살려 두지 않겠죠?”
“하하하하.”
이고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세르게이와 차은성을 겨눈 다섯 명의 남자가 소리 없이 실소했다.
씩, 씨익.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깔끔하게 상황을 종결짓자면 죽일 수밖에 없다.
* * *
몇 분 되지 않아.
다시 공장으로 몇몇 차가 들어왔다. 이내 차들이 서고 다수의 이들이 내렸다.
그들 중 한 사람.
머리에 검은 털모자를 쓰고 두툼한 털옷을 입은 쉰 후반의 이.
이고르 밸라노프.
코르코프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들이 이고르를 뒤따랐다.
* * *
이른 이고르가 세르게이를 보곤 반가워했다.
“여어, 세르게이. 오랜만이야.”
세르게이가 떨떠름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매우 불쾌합니다. 이고르.”
“하하하하. 역시 세르게이야. 내가 참 잘 가르쳤어. 안 그런가?”
이고르의 말에.
차은성이 세르게이와 이고르를 번갈아 봤다.
영문을 모르겠다!
차은성의 감정을 읽은 듯, 옆에 비켜선 보포프가 말했다.
“이런. 몰랐던 모양이군. 세르게이를 가르친 교관이 바로 이고르라는 것을.”
보포프가 이고르를 돌아봤다.
“이고르.”
이고르가 보포프를 돌아봤다.
“이번 일은 나로서는…….”
“US 달러로 십만!”
이고르의 간결한 말에 보포프가 이내 활짝 웃었다.
“역시 이고릅니다.”
만족스러운 눈치다. 이고르가 말했다.
“그건?”
“확보해 두었습니다.”
보포프의 대답에 이고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봤다.
“코르코프.”
“네. 보스.”
“챙겨.”
“네.”
코르코프가 대답한 후 옆으로 돌아서더니 뛰듯이 빠르게 걸어갔다.
그사이, 보포프가 세르게이와 차은성을 돌아봤다.
“이제 작별할 시간이로군.”
그의 말에 차은성이 이고르를 보았다.
“미스터 이고르.”
이고르가 의아한 눈으로 차은성을 보았다.
“날 아나?”
“당신 사진을 봤죠.”
“그래.”
이고르가 슬쩍 웃었다.
“짐승이 덫에 걸리는 이유는…….”
차은성의 말에.
이고르, 보포프, 겨냥한 다섯 남자, 이고르 주위에 서 있는 부하 등.
다들 어리둥절했다.
“덫임을 몰라서죠. 덫이라는 것을 알면 절대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야?”
보포프가 차은성에게 소리쳤다.
차은성이 히죽였다.
“세르게이.”
“…….”
“계약 완룝니다.”
“고맙네, 은성.”
세르게이가 대꾸하더니 이고르를 보았다.
“고맙습니다, 이고르. 당신의 왕국에서 제 발로 나와 줘서 말입니다.”
순간 이고르, 보포프, 다른 이들이 흠칫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때.
“세르게이!”
차은성이 고함치며 바닥에 엎드렸다.
거의 동시에.
“지금!”
세르게이 역시 고함치며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찰나.
휘, 휘, 휘이이이.
천장에서 무엇인가가 빠르게 떨어지더니.
콰앙…… 콰아앙…… 쾅!
연거푸 폭발했다.
일순간 강렬한 폭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그레네이드의 폭음과 섬광이 삽시간에 공장 내를 그득 메웠다.
“왁!”
“악!”
당황한 이들의 외침이 들렸다.
그사이.
와장창…… 쨍강.
창문을 부수고 일단의 중무장 병력이 공장 내로 난입했다.
공장 천장은 물론이고 출입문 역시 폭파되었다.
쿠아아앙.
이어, 역시 중무장한 이들이 공장 내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타타타타타타탕.
다시금 격렬한 총성들이 메아리쳤다.
“크악!”
“으아아악!”
총격을 당하는 이들이 마구 비명을 질렀다. 습격에 이은 습격으로 공장 내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 *
얼마 후.
상황이 종결되고 중무장한 스페츠나츠 병력이 공장 내외를 장악, 정리 중이었다.
보포프의 부하들과 그에게 협력한 세르게이의 부하. 그리고 이고르의 부하들이 체포되어 공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세르게이가 체포되는 보포프와 이고르를 말없이 지켜봤다. 그의 눈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세르게이의 좌측에 서 있는 차은성이 빙긋 웃으며 보포프와 이고르를 바라보았다.
“상황 역전!”
보포프와 이고르가 차은성을 잠깐 노려보더니 세르게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생사가 이제 세르게이의 손에 달렸다.
그사이.
세르게이가 한 부하에게서 총을 건네받았다. 아무래도 즉결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차은성이 세르게이를 돌아보며 급히 말리려 했다.
“세르…….”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
타앙.
총성과 함께 보포프의 머리가 뒤젖혀졌다. 그리고 서 있던 자리에서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세르게이가 보포프를 지켜보며 냉랭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배신자에게 죽음을!”
이어 이고르를 보았다.
한데.
피식.
이고르가 웃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하다.
“날 여기로 유인한 것은 기발했어, 세르게이. 칭찬해 주지. 하지만 날 죽이는 것은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이고르의 말에.
천천히 그에게 총을 겨눈 세르게이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차은성이 급히 세르게이에게 말했다.
“세르게이!”
“…….”
“죽이는 것보다 살려 두는 것이 이익입니다. 놈이 가진 정보!”
차은성이 냉철한 어조로 소리쳤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무기상이다. 이고르가 가진 정보의 양이나 질이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미 제거 명령을 내렸어. 그리고 죽은 내 부하들!”
세르게이가 격한 눈빛을 번쩍였다.
이고르에게 당한 부하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세르게이의 팔을. 그새 급히 다가선 차은성이 덥석 잡았다.
“세르게이!”
소리쳐 부르며 돌아봤다.
“이고르를 죽인다고, 죽은 부하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
“죽은 부하들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르게이. 그들의 죽음이 가치 있는 죽음이었다는 걸 입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은성이 세르게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한편으로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CIA 대외 작전부 요원들에게 죽은 3팀.
그들의 죽음이 문득 생각난다.
세르게이가 천천히 총을 겨눈 팔을 내리며 이고르를 죽일 듯 노려봤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단 한 점의 빛도 보지 못할 겁니다. 이고르.”
“후후.”
이고르가 낮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 세르게이.”
여유롭다.
이고르의 말에 차은성이 그를 돌아봤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카드는 다시 세르게이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저런 여유라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