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0)
팔년풍진이라더니
한 달 후, 강원도 고산.
스, 스으윽.
검은 베레모를 머리에 쓰고 군복을 입은 차은성이 천천히 산자락을 지나가고 있었다.
총구가 봉인된 K2 소총을 양손으로 쥔 차은성은 쉴 새 없이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도 없는 심한 경사의 내리막길이라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 내려간다.
헐벗은 듯 휑한 고목들이 무질서하게 주변에 자리해 있고, 바닥에는 바짝 마른 나뭇잎들이 쌓여 있었다.
조심조심.
이동하며 봉인된 총구를 이리저리 돌리는 차은성의 전신에는 각종 센서가 부착되어 있었다.
* * *
잠깐 후.
화아악.
이동하던 차은성의 좌측에서 돌연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우수수.
그의 몸에서 나뭇잎들이 떨어졌다.
홱.
돌아서는 차은성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부릅떠졌다.
오른손에 대검을 쥐고 몸을 날리는 여군. 위장 크림으로 얼굴을 떡칠했고 길리슈트를 입었다.
뭘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여군이 차은성을 덮쳤다.
차은성이 뒤로 넘어지며 여군과 뒤엉켰다.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은 자세로 아래로 굴렀다.
떼구루루.
여군, 이혜린 중사는 대검으로 차은성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틱…… 가가가각.
차은성은 소총으로 대검을 막으며 이혜린 중사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구르는 중이라 미처 그녀를 떨쳐 내지 못했다.
잠깐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차은성과 이혜린 중사가 내리막 아래에 이르자마자 재빨리 서로 떨어졌다.
차은성이 급히 수중의 소총으로, 그새 일어나 자세를 잡는 이혜린 중사를 겨눴다. 막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데.
“남자가 치사하게.”
이혜린 중사가 찡긋 윙크했다.
“훗.”
차은성이 실소하며 소총을 옆에 내려놨다. 이어 허리춤에서 대검을 빼 들며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여자도 여자 나름이라는 말이 왜 지금 생각나는 걸까요? 이 중사님.”
차은성의 말에 이혜린 중사가 왼손을 들었다.
까닥까닥.
앞뒤로 움직이며 차은성을 도발했다.
“들어와요.”
“글쎄요. 독거미 소대 에이스인 이 중사님에게 별로 달려들고 싶지 않은데요.”
“그럼, 졌다고 버튼을 누르시든지.”
“그건 싫은데요.”
“쫀쫀하시네요. 34번 교육생.”
“쫀쫀하다고요?”
“그렇잖아요. 항복하긴 싫고, 싸우기도 싫고. 그게 쪼잔한 거죠.”
“말을 막 하시네. 우리 이 중사님.”
“들어와요. 지면 한겨울 입수 5분이지만, 이기면 또 누가 알아요. 달콤한 포상이 있을지.”
“호오. 어떤 포상인지 궁금하네요.”
차은성의 말에 이혜린 중사가 방긋 웃었다.
“이길 수 있다면야.”
“어?”
차은성이 돌연 이혜린 중사의 왼발을 바라보았다.
이혜린 중사가 차은성의 모습에 멈칫했다.
“뱀!”
차은성이 소리치자 이혜린 중사가 움칫하더니 픽 웃었다.
“겨울에 무슨 뱀이 있다고…….”
그녀가 말하는 순간, 차은성이 언제 몸을 숙여 나뭇잎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는지, 왼 손아귀에 움켜쥔 나뭇잎들을 이혜린 중사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휘익.
일순 이혜린 중사의 시야가 아주 잠깐 동안 가려졌다.
그 틈에.
휘익.
차은성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잇.
손에 쥔 대검이 곧장 이혜린 중사의 목으로 향했다.
그새 이혜린 중사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시야를 확보하는 한편, 차은성의 대검으로부터 멀어졌다.
“얍삽하게!”
소리치며 오른발을 뒤로 뺐다.
나뭇잎들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차은성이 이혜린 중사에게 다가서며 대검을 휘둘렀다.
휙.
차은성은 대검을 쥔 이혜린 중사의 오른손목을 노렸다.
“어딜!”
이혜린 중사가 말하며 오른발을 내찼다.
휘익.
발이 차은성의 사타구니로 치솟았다. 남자의 거시기를 노린 발차기!
“흑!”
차은성은 기겁할 듯 놀랐다.
이혜린 중사가 설마 거시기를 노릴 줄은 몰랐다.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혜린 중사의 발이 허공을 스쳤다. 재빨리 발을 잡아당기며 이혜린 중사가 아쉽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빨랐으면!”
차은성이 항의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호호호.”
이혜린 중사가 웃었다.
“무서우셨어요, 34번 교육생?”
“이!”
차은성이 잇몸을 드러내며 이를 악물었다. 열 받은 모양이다.
휙.
차은성이 이혜란 중사에게 달려들었다.
이혜린 중사가 기다렸다는 듯 마주 대응했다.
휘, 휘, 휙…… 채채채채챙.
두 사람의 대검이 허공을 스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수여 회 부딪쳤다.
긴장한 차은성.
눈을 똑바로 뜨고 이혜린 중사의 눈을 마주 봤다. 집중하며 감각에 따라 대검을 휘두르고 찔렀다. 그런 한편으로 반사적으로 몸을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혜린 중사의 실력?
대검을 휘두르고 찌르는 속도가 이만저만 빠른 것이 아니다. 대검 실력이 차은성보다 위인 것 같다.
그녀의 대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차은성의 가슴과 팔을 서너 번 스쳤다. 그때마다 몇몇 센서에 불이 들어오고 삑삑 소리가 울렸다.
자신감에 찬 이혜린 중사가 과감하게 다시 차은성의 심장을 노렸다. 가까이 다가서며 대검으로 찌르려는 찰나.
차은성이 와락 그녀의 가슴으로 안기며 수중에 쥔 대검을 빙글 돌렸다. 그러고는 대검의 자루 끝으로 그녀의 명치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퍽!
동시에.
“악!”
이혜란 중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그때.
차은성이 왼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오른손에 쥔 대검의 날을 목에 갖다 댔다.
이혜란 중사는 목에 닿은 차가운 느낌에 질끈 눈을 감았다.
“졌어요!”
차은성이 이혜란 중사에게서 떨어졌다.
이혜란 중사가 이를 악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명치의 고통을 참으며 왼손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삐이이이.
전자음이 길게 울리고, 이혜란 중사가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여자를 배려할 줄도 모르고…….”
차은성이 실소했다.
“풋.”
“…….”
“여자도 여자 나름이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제 심장을 대검으로 방금 전에 찌르려던 여자를 배려했다간, 아마 전 심장이 찔려 즉사했을 겁니다.”
이혜란 중사가 픽 웃더니 옆으로 돌아섰다.
“통과!”
“고맙습니다. 교관님.”
차은성이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한 달 동안 산악 행군, 생존 훈련, 사격, 격투기, 시가전 등등.
다양한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각 군 특수부대에서 엄선 및 선발된 이들이 아르티펙스 팀원들의 교관이 되어 혹독하게 굴렸다.
* * *
디미토르프에서처럼 해외 작전 중에 물속에 숨어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요원을 죽이려고 적들이 강을 향해 마구 사격하는 상황을 상정한 잠수 훈련!
* * *
촤아아악…… 푸우우.
얼음 구덩이에서 황민준이 푹 젖은 머리를 내밀었다.
“3분!”
UDT 출신 교관이 소리쳤다.
황민준이 급히 교관을 돌아봤다.
“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속에서 3분이면 엄청 버틴 겁니다. 교관!”
“기준 시간은 4분입니다. 37번 교육생.”
“4분요? 그게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시간입니까?”
황민준이 물속에서 나오며 교관에게 항의했다.
교관이 옆으로 돌아서며 툭 말을 던졌다.
“올해 예순넷이신 본 교관의 어머니께서는 한겨울 제주 바다 속에서 4분 동안 잠수하십니다. 그것도 헤엄치시면서.”
교관의 말에 황민준이 입을 따악 벌렸다.
기막히다!
그런 감정을 얼굴 한가득 띄웠다.
* * *
VR 헤드셋을 쓴 노태준이 좌로 돌아서며 방아쇠를 당겼다.
팟!
헤드셋 영상.
허리 뒤춤에서 칼을 빼내던 한 행인이 칙칙거리더니 사라졌다.
노태준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헤드셋 화면 한가득 인도가 투영되었다. 오가는 행인, 다양한 점포, 우측 도로를 주행하는 각종 차량들.
헤드셋 화면은 거의 완벽한 도심을 구현했다.
팟.
우측에서 뭔가가 나타나는 느낌에 노태준이 홱 돌아섰다. 막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유모차를 미는 여성.
“흑!”
노태준이 안도의 숨을 삼켰다.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그 순간.
퓻.
난데없이 유모차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허억!”
노태준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웃!”
교관의 외침에 노태준이 급히 왼손으로 헤드셋을 벗으며 소리쳤다.
“유모차에서 무슨 사격입니까? 교관!”
항의했다.
“기계장치로 얼마든지 유모차에서 사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48번 교육생. 본인의 부주의를 탓하십시오.”
“이!”
노태준이 인상 썼다.
기계장치라는데,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유사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염병!”
노태준이 성난 어조로 소리쳤다.
* * *
퍼억!
군화가 김아름의 얼굴을 때렸다.
“왁!”
김아름이 비명을 지르며 좌로 쓰러졌다.
콰당당.
디지털 전투복을 입은 교관이 발을 거두더니 제자리에서 탁탁 뛰었다.
“41번 교육생. 탈락!”
“으으…….”
김아름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했다.
‘부, 불공평해!’
항의하고 싶다.
군에서 딴 단이지만 교관은 합이 10단이 넘는 유단자 중의 유단자다. 게다가 신기만 하면 무조건 1단은 먹고 들어간다는 군화를 신었다. 그것도 장교용 군화를.
그런 교관을 상대로 싸워 이기라니.
항의도 못 하는 것이, 임무 현장인 필드에서 타국 정보 요원들이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축!
사망하셨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타국 정보 요원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 * *
몇 시간 후, 훈련소 외곽 산책로.
박영광과 차은성이 나란히 걸었다.
“팀이 아니라, 저 개인 오퍼라고요?”
차은성의 의문 어린 물음에.
박영광이 천천히 걸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은성이 따라 걸으며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저 지금 재교육 받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다른 팀도 있잖습니까? 재교육 받는 팀의 팀장만 따로 불러내 오퍼를 내리는 게 정상적인 겁니까?”
차은성이 의혹의 눈빛을 띠었다.
“3팀이 그렇게 되고, 다른 팀들이 지금 일에 허덕이고 있어. 다들 너무 바빠. 그리고 인력이나 팀의 운용에 여유가 있음, 재교육 중인 은성이 너에게 오퍼를 내리겠냐?”
박영광이 걸으며 돌아봤다.
마주 보며 차은성이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제게 개인 오퍼를 내리는 겁니까?”
차은성이 물었다.
“그게…….”
박영광이 말을 흐렸다.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뭐지?’
차은성이 눈을 반짝이며, 걷는 박영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