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6)
이고르가 러시아 정부와 한판 하자고 할 정도로 그가 믿고 있는 것이 뭘까?
‘조커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게 분명해. 요원을 곁에 붙여 둔 것도 어쩜 그 때문일지도 모르고.’
차은성은 자신이 있는 바닥에서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뒤통수를 친 박영광만 봐도 알 수 있다.
한편, 세르게이가 계속 말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긴 했는데, 알아챈 이고르와 그놈의 패거리 때문에 요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만 디미토르프에 고립되고 말았어.”
“…….”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구출하려고 관련 팀을 보냈는데, 정보가 새는 바람에 전원…….”
말을 잇지 못하는 세르게이였다.
그의 심중에 활화산 같은 화가 있는 모양이다. 은근 엄청 화내는 눈치다.
“……우리 FSB 내에서 배신자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누구인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어. 그렇다고 고립된 요원을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래서 나더러 고립된 요원을 디미토르프에서 데리고 나와 달라는 말입니까?”
차은성의 말에 세르게이가 고개를 까닥였다.
“세르게이…….”
차은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고르의 개인 왕국이나 마찬가지라는 디미토르프라면서요……. 지금 나더러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기어들어 가라는 말입니까?”
차은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세르게이가 말없이 보드카 병을 쥐더니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쪼르르.
차은성이 다시 그를 불렀다.
“세르게이.”
세르게이가 보드카 병을 내려놓더니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곤 차은성을 마주 보았다.
“외부 관련 전문가가 필요한데. 내가 아는 외부 전문가들 중 은성, 자네가 최고지.”
“높게 평가해 줘서 고맙긴 한데…….”
차은성이 말끝을 흐렸다.
“은성!”
세르게이가 차은성을 불렀다.
“이미 박영광과…….”
거래가, 아니 계약이 성립되었다.
세르게이가 그런 취지로 말했다.
‘이!’
차은성이 마음속으로 박영광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 바닥에 믿을 사람이 없다니깐!’
차은성이 세르게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그쪽은 그쪽이고 이쪽은 이쪽이죠. 저도 뭔가 목숨을 걸 만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르게이? 그리고 FSB 내부의…….”
차은성이 세르게이에게 미끼를 툭 던졌다.
대번에 세르게이의 낯빛이 바뀌었다.
박영광과 별도로, 세르게이에게서 뜯어낼 수 있는 한 왕창 뜯어내려는 차은성이다.
칼자루를 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깐 말이다.
* * *
차은성은 세르게이에게 관련 모든 정보를 요구했다.
연후.
세르게이가 건넨 정보들을 이틀 동안 보고 또 보았다.
그런 한편으로 마음껏 룸서비스를 누렸다. 호텔 숙박비는 전액 FSB가 부담한다.
차은성은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겼다.
그리고 미진하다 싶은 부분을 핑계로 세르게이를 불렀다.
연후, 추가 정보를 요구했다.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FSB가 가진 관련 정보, 모두 다 볼 수 있게 해 주시죠. 세르게이.”
“은성.”
“고립된 요원을 살리고 싶으면…… 아니, 요원이 가지고 있는 것을 확보하고 싶으면, 따로 분류 및 보관 중인 일급 정보들! ……제공해 주시죠, 세르게이.”
“끄응.”
세르게이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차은성에게 제공한 정보가 다가 아니다. 진짜 알짜배기 정보는 특별한 몇몇 경우가 아니면 절대 열람도, 제공도 불가다.
그런데 차은성이 해당 정보를 요구했다.
“오래전부터 이고르 곁에 요원이 잠입, 암약했다면 꽤 많은 고급 정보가 축적되어 있을 텐데요, 세르게이.”
차은성이 추궁하듯 세르게이를 밀어붙였다.
결국.
“제공하지.”
세르게이의 항복을 받아 냈다.
차은성은 내심 실소했다.
‘후후. 누굴 바보로 아나.’
이참에 FSB의 극비 정보를 최대한 열람, 머리에 담아 두려는 차은성이었다.
* * *
닷새 후, 디미토르프.
창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창밖은 온통 눈이었다. 북극권에 가까운 디미토르프의 겨울 기온은 통상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린다.
그의 뒤.
책상 너머에 서른 중반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디미토르프에 온 외지인은 모두 세 명입니다. 그중 두 명은 내국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인입니다.”
중년인이 말하며 손을 들었다. 안경을 밀어 올리는 사이.
“일본인?”
창가에 서 있던 남자, 코르코프가 뒤돌아봤다.
“네.”
중년인 메조프의 대답에 코르코프가 의구심의 눈빛을 띠었다.
“일본인이 겨울에 디미토르프에 왜 와?”
“그게 좀 어이가 없습니다.”
“응?”
코르코프가 반문하며 어안이 벙벙한 기색을 지었다.
메조프가 곤혹스러워했다.
“말씀드리기가 저도 참 그렇습니다만.”
“…….”
“디미토르프에도 동양 인종이 다소 있지만, 외지에서 온 이라…… 경찰의 도움을 받아…… 불심검문 결과, 일본 여권 소지자로…… 모스크바 바우만 공대 강사였습니다.”
“…….”
“그런데 가르치던 여대생과…… 프러포즈를 하러 왔다가…… 여자가 변심하는 바람에…… 지켜보는 애들 보고에 따르면 실연당해…… 바에서 하루 온종일 술에 절어…… 굳이 감시할 필요가 있냐고, 애들이…….”
메조프가 코르코프의 눈치를 보았다.
얼굴을 찌푸린 코르코프.
“확실해?”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네. 확실합니다.”
메조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일전에 코르코프 님이 말씀하신 것도 있고 해서…… 모스크바에 있는 올렉을 통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올렉이 직접 바우만 공대를 방문…… 의심의 여지가 없는…….”
“흠. 그렇단 말이지.”
코르코프가 은근 안심하는 투로 말했다.
올렉이 직접 알아보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무언으로 말하는 것 같은 코르코프였다.
“다른 두 사람은 디미토르프에 연고가 있고, 친인척이 살고 있어……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래.”
“네. 제가 애들을 시켜 연고지와 친인척을 확인했습니다.”
메조프가 넌지시 강조했다.
꼼꼼하게.
철저하게.
조사 및 확인하였다고.
코르코프가 말하며 뒤돌아서더니.
“다행이군. FSB 놈들인 줄 알았는데.”
말하며 책상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코르코프가 시가를 피우며 연기를 뿜었다.
후우우.
그러곤 메조프를 보았다.
“메조프.”
“네.”
“타냐는?”
코르코프의 물음에 메조프가 움찔하더니 급히 말했다.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을 다 풀었습니다. 각 상점과 바. 그리고 레스토랑 등등 저희 패밀리의 영향 아래에 있는…… 현상금으로 6백만 루블도 걸었습니다. ……타냐가 디미토르프를 빠져나가지 못했다면 저희의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젭니다.”
“디미토르프를 빠져나가지 못했어!”
코르코프가 확신에 찬 눈빛을 번쩍이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보던 메조프가 긴장한 듯 목울대가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마도 마른침을 삼키는 것 같다.
코르코프가 화를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경찰이 디미토르프 시 경계선을 틀어막고 검문검색을…… 틀림없이 디미토르프 내에 있어!”
코르코프가 강조했다.
‘대체?’
메조프는 이해되지 않았다.
타냐가 디미토르프 내에 있다는 것을 철석같이 확신하는 코르코프였다.
메조프는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FSB 내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가 있다. 그의 정보는 이고르를 통해 코르코프에게 전해졌다. 그 때문에 코르코프가 확신하는 것이다.
“분명 디미토르프 어딘가에 숨어 있어. 아마…….”
코르코프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타냐는 오래전부터 이고르의 곁에 있었고. 그녀와 FSB를 연결해 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타냐가 디미토르프 모처에 숨어 있다.
코르코프는 메조프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메조프.”
코르코프가 부르자.
“네.”
메조프가 대답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지?”
“네.”
“찾아!”
“…….”
“타냐를 빨리 찾아야 해! 그리고 그녀를 디미토르프에서 빼내려는 FSB 놈들을!”
코르코프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메조프를 쏘아보았다.
“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코르코프 님.”
메조프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코르코프는 메조프를 보며 답답해했다.
타냐가 빼돌린 것을 회수해야 한다. 보스 이고르의 목숨이 회수 여부에 달려 있다.
시가를 피우며 코르코프가 뒤돌아섰다.
눈 덮인 시가지.
창밖을 보며 코르코프가 형형한 안광을 희번덕였다.
그새. 메조프가 뒤돌아섰다. 정면에 있는 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발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저벅저벅.
* * *
이튿날, 어두운 밤의 다리.
비틀비틀.
누군가가 고풍스러운 다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보드카 병이 쥐어져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뒤에서 두 남자가 그를 미행 중이었다.
* * *
잠시 뒤.
만취한 이가 다리 중간 어름에 이르더니 느닷없이 난간으로 돌아섰다. 그러곤 미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풍덩.
뒤이어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미행하던 두 남자가 급히 다리로 뛰어가려 했다.
한데, 그중 한 남자가 멈칫하더니 왼손을 뻗어 뛰려는 동료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잠깐!”
동료가 멈칫하더니 돌아봤다.
그러자 낚아챈 이가 목덜미를 잡은 손을 내렸다.
“왜 그래?”
동료가 물으며 다리와 낚아챈 이를 번갈아 봤다.
“가만있어 봐.”
낚아챈 이가 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니콜라이, 지금 사람이 강에 빠졌어. 서두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낚아챈 이, 니콜라이가 동료를 돌아봤다.
“우리가 다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 만에 하나라도…… 다른 이가 보거나 CCTV 카메라 영상 같은 것에 우리의 모습이 잡히면…… 자칫 우리가 그자를 강으로 밀어 죽였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고!”
니콜라이의 말에 동료가 흠칫했다.
맞는 말이다.
이해를 한 동료가 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영하의 날씨에 강에 빠졌으면 오래 못 버텨. 죽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다고.”
동료가 니콜라이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