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화창한 오후.
건우는 춘삼과 순대국밥을 먹으며 그제 겪은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
건우에게 아크 길드와 엮인 사연을 모두 들은 춘삼은 안색이 시퍼레졌다.
“표정이 왜 그러냐?”
“허허, 국내 3대 길드를 상대로 시비 건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안 미쳐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네.”
“에휴.”
춘삼은 한숨을 쉬다 뚝배기 국물을 쭉쭉 들이켰다.
“크하, 맛 죽인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람 맞네.’
건우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왜 안 따지냐? 평소에는 울상 지으면서 따질 텐데.”
춘삼이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쩝, 이해하니까요.”
“뭐가?”
“던전에서 홀로 남겨졌을 때, 공포요. 저 지난번에 사이비 종교집단한테 죽을 뻔했잖아요.”
“바알 교단이랑 엮인 일 말하는 거구나.”
춘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형님 아니었으면 저 정말 몸이 썩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겠죠.”
“거의 십중팔구는 맞는 얘기네.”
춘삼은 더욱 흥분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놈들은 그런 짓을 당당하게 해놓고 낯짝 뻔뻔하게 나오는 거잖아요. 어떻게 용서가 되겠어요? 전 형님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응원합니다.”
“웬일로 기특한 소리 해 주냐?”
“저 원래 그런 놈입니다.”
춘삼은 헤헤 웃은 뒤, 뚝배기를 바라보았다.
“좀 더 먹어야겠네요.”
“응? 한 그릇 더 시켜 줄까?”
씨익.
춘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리필하면 되죠. 형님.”
“어떻게 리필해?”
그 말에 춘삼이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하더니 TV를 보고 있는 사장님을 쳐다봤다.
“솨장님.”
“응? 왜?”
“순대쿡밥 너무 맛있어요. 솨장님 손맛 최코!”
휘청.
느닷없는 애교 섞인 말투에 건우는 몸이 흔들렸다.
반짝반짝.
하지만 사장님은 춘삼의 눈빛과 아우라에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아이고, 외국인이 한국말 참 귀엽게 하네. 더 먹어. 더. 이건 서비스야. 서비스.”
“오, 솨장님! 감솨합니다.”
아부의 효과는 대단했다.
졸지에 서비스로 모듬순대과 국밥 한 그릇을 더 받았다.
“……대단하다. 대단해.”
건우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삐리리.
그때 건우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또 섭외 문자인가? 나 참 스팸으로 등록하든가 해야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본 건우는 그대로 표정이 얼어붙었다.
***
서울 성동구에 형성된 2성급 게이트.
중소형 길드, 태진의 길드원들은 열심히 레이드를 공략하고 있었다.
게이트 안에는 거대한 공동이 있었고, 그곳에는 데스 웜이 있었다.
데스 웜.
모습은 애벌레와 지네를 섞은 것처럼 생겼는데 무척 날렵했다.
형태는 사는 환경에 따라 다양했다.
어떤 개체는 가시가 잔뜩 달려 있기도 하고, 독을 내뿜기도 했다.
크기는 대략 2미터.
하지만 움직이는 패턴이 생각보다 단순해 잡기 어려운 몬스터는 아니었다.
이제 보스까지는 바로 코앞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가로막는 데스 웜의 저항도 점차 거세졌다.
쏴아아아아.
일순간 다수의 데스 웜이 산액을 살포했다.
“하압!”
탱커들은 일제히 방패를 들어 산액이 살포되는 것을 막아 냈다.
치이이이익!
산이 상당히 강했는지 방패 곳곳의 도금이 벗겨졌지만, 길드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둘러싸서 잡아!”
“으랏샤!”
파티원들은 일제히 데스 웜들을 둘러쌌다.
피융!
가장 먼저 마법사들이 광범위 마법을 시전했다.
키이이익!
화염계통의 마법에 데스 웜들은 불에 바스락 타들어 갔다.
“흐압!”
뒤이어 갑주를 입은 검사들이 달려들어 일제히 약화된 데스 웜 무리를 해치웠다.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한 레이드였다.
훈련이 잘 된 만큼 그들은 파죽지세로 뚫고 갔다.
그리고 어느덧 그들은 보스인 데스 웜과 맞닥뜨렸다.
보스인 데스 웜은 다른 것들과 다르게 크기가 4미터 정도였다.
피융! 콰앙! 콰앙!
“조금만 힘내! 거의 다 왔어!”
파티 리더인 강민혁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파티원들을 지휘했다.
보스는 다른 웜보다 피부 강도가 대단해서, 마치 몸 전체에 철 갑주를 두른 듯 무엇이든 튕겨 냈다.
하지만 한 군데만 집중 공략만 하면 반드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쩌걱.
마침내 보스의 머리 쪽에 작은 균열이 일구어졌다.
강민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타닷!
“흐압!”
그는 단숨에 탱커의 어깨를 밟고 몸을 날려 검을 꽂아 넣었다.
키에에에엑!
보스는 정신없이 독액을 살포했다.
강민혁은 미리 입에 물고 있던 해독제를 조금씩 삼키며 끈질기게 버텼다.
……키익.
그리고 마침내 보스가 숨을 거두었다.
“우와아아아아!”
기나긴 전투가 끝이 나자, 파티는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하아, 하아.”
강민혁은 숨을 헐떡이며 동료의 부축을 받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게. 이제 나가기만 하면 돼.”
강민혁은 히죽 웃었다.
그때, 몬스터를 해체하던 한 여자 길드원이 말했다.
“어? 잠깐 여기에 엄청 커다란 공동이 있는데요?”
“정말이네.”
“데스 웜이 또 있는 건가?”
“으윽.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두 번은 못한다.”
“여러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강민혁은 동료의 품에서 떨어져 또 다른 공동을 살폈다.
주륵.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에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레이드 7년 차의 경험상 그는 이 조짐이 필시 안 좋은 것임을 느꼈다.
꿀꺽.
“……이중 던전이네요.”
“뭐 이중 던전?!”
“대박! 우리가 그 무협지에서 본 기연을 얻은 건가?”
길드원들은 흥을 내며 좋아했다.
이중 던전.
정확한 경위는 모르지만 두 던전이 합쳐진 현상을 일컫는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를 겪은 헌터들은 대부분 탐사를 하면서 값진 아티팩트를 얻거나 질 좋은 마정석을 손에 넣어 승승장구하기도 했다.
“대장님. 빨리 들어가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태진의 탱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방패를 세우며 공동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안 됩니다.”
“네? 왜요?”
“지금 길드원들 상태가 몹시 안 좋습니다. 나중을 기약하죠.”
“에이, 나중에 기약을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이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면, 저희 길드 실적 까이지 않습니까?”
굳센 옹고집에 강민혁이 버럭 화를 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줄 아세요. 저라고 욕심 없는 놈으로 보입니까?”
탱커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배포가 작아. 어린놈이 싸가지 없게 말이야.”
“…….”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강민혁은 못 들은 척했다.
레이드를 하면, 몸도 마음도 지친다. 그 때문에 감정도 예민해지고 짜증도 날 수밖에 없다.
이때 리더가 구심점이 되어 잡아주지 못하면, 생사가 걸린 레이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때문에 들어도 못 들은 척을 해야 될 때가 있는 거다.
쿠구구구구.
바로 그때, 공동에서 미미한 진동이 일어났다.
“어 뭐지?”
“지진 일어나는 건가?”
길드원들은 어리둥절했다.
강민혁은 오감을 집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진동의 근원이 바로 의문의 공동 쪽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쿠구구구구
진동은 더욱 심해졌다.
“이, 이건 설마?!”
강민혁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탱커한테 소리쳤다.
“당장 거기서 벗어나요!!”
“뭘 그렇게 호들…….”
콰직!
순간 마치 거대한 지하철이 들이닥친 것처럼 탱커는 통째로 집어삼켜졌다.
모양과 형체는 데스 웜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몬스터가 들이닥치기까지 약 3초.
강민혁은 등을 돌려 소리쳤다.
“그레이트 웜이다. 모두 탈출해요!!”
콰드드드드득!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늦었다.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강민혁의 팔이 날아갔다.
동시에 파티 전체가 그레이트웜에게 덮쳐져 괴멸했다.
“크아아아악!”
순식간에 동료를 잃은 강민혁은 허무한 표정으로 그레이트웜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았다.
땅은 깊게 파여 있고 동료들의 사지가 널브러졌다.
녀석은 돌격을 멈추지 않고 게이트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 안 돼.”
그는 죽어 가는 와중에 손아귀를 뻗었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불길한 징조는 맞아떨어졌다.
던전 브레이크.
몬스터 유출을 막고 있던 게이트가 완전히 깨져 버렸다.
“……젠장.”
강민혁은 그대로 팔을 떨어뜨리며 절망했다.
같은 시각, 평화로웠던 성동구.
가장 먼저 일어난 이변은, 말도 안 되게 확장된 게이트였다.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어차피 지금 같이 체계가 잡힌 헌터들이라면 무난히 공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에 대한 안전 불감증이었다.
위기는 언제나 예고 없이 벌어지는 법이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게이트가 완전히 박살이 나며 30미터 크기의 그레이트웜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아스팔트 도로를 깨뜨리고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 여파에 휘말린 차와 사람들은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꺄아아악!”
“도망가!”
이제껏 평화를 만끽했던 성동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
헌터협회.
갑작스런 성동구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로 구자혁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성동구의 의원들은 바쁜 그를 추궁하고 있었다.
“2성급 게이트에서 어떻게 4성급 보스가 튀어나온다는 건가?”
사태는 긴박했지만 구자혁은 냉철하게 답했다.
“태진 길드의 생존자, 강민혁 헌터의 말로는 이중 던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부터 사태는 어떻게 할 건가?”
집요한 그들의 추궁에 구자혁이 그들을 노려봤다.
“의원님들.”
“윽!”
의원들은 일제히 위축됐다.
당연했다.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 됐지만 구자혁은 사자다.
반면 지위를 제쳐두고 보면, 그들은 벌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전문가들에게 맡겨 주시지요.”
구자혁은 그들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긴급소집에 응한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S급 헌터 6위, 유지호
S급 헌터 9위, 권정아
S급 헌터 10위, 마동혁(백석길드 대표)
S급 헌터 11위, 최건우
A급 헌터, 선우혁(아크길드 대표)
A급 헌터, 서유라
그들을 모두 확인한 구자혁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소집에 응해 줘서 고맙습니다. 다들 성동구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알고 있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구조대 및 공략대를 꾸리려고 합니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구자혁의 부탁에 선우혁이 질문을 건넸다.
그러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건우와 눈이 마주칠 때, 인상을 찡그릴 뻔했지만 그는 구태여 티를 내지 않았다.
“한데, 협회장님. 어째서 S급 헌터가 이렇게 모여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구자혁이 리모컨 버튼을 꼭 눌렀다.
그러자, 빔프로젝트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서는 엉망진창이 된 도시 풍경과 함께 땅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선우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땅 속에 숨어 있는 겁니까?”
“그것도 골치 아픈데다 땅속에는 가스배관이 있어 과도한 화력을 쓸 수 없습니다.”
“단순히 그것뿐입니까?”
구자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저 굴속에 생존자들이 있습니다. 녀석이 지상에 있으면 S급이 아니어도 진압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우혁은 턱을 매만졌다.
“흐음.”
그가 우선하는 고민은 공략과 구조가 아니었다.
바로 이득이었다.
“공략과 구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 듯싶군요. 이러다가 위기가 번질 것은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생존자를 버리자는 겁니까?”
“그렇게 곡해해서 들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한데, 공략에 참가하면, 저희에게 약속된 보수는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못 참겠는지 구자혁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건우가 몸을 일으켰다.
“공략 및 구조대에 참여하겠습니다. 보수는 전부 성동구 복원에 기증해 주세요.”
“……?!”
예상치 못한 선언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건우는 선우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찌질하게 굴지 말고 자신 없으면 빠지세요.”
“…….”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선우혁의 얼굴이 노기로 붉게 상기됐다.
61.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