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그너스 3계층, 슬리핑 포레스트.
신전에 도착해 종말의 비석을 살펴본 건우는 이마를 짚었다.
“피곤한 게 오네.”
[죽음과 절망의 군대, 디아도스의 강림. 도래 예정 시간, 약 102일]
죽음과 절망의 군대는 좀비와 구울, 스켈레톤 등의 언데드를 지칭한다.
디아도스는 그 언데드들의 수장인 아크리치였다.
다행히 등급은 아라크네나 세피아처럼 7성급은 아니었다.
아마 이곳 기준으로 치면 디아도스는 6성급일 거다.
‘아라크네나 세피아 때처럼 퇴화되어서 오면 좋을 텐데.’
건우는 쯧 혀를 찼다.
현재 실력으로는 6성급의 몬스터랑 싸워서 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S급 헌터들이 난항을 겪는 난이도도 바로 6성급이었다.
현재 6성급을 단독으로 잡을 수 있는 S급은 지금까지 딱 3명이었다.
그것도 국내 기준이 아니라 세계 기준이다.
따라서 6성급부터는 S급들이 팀을 결성해 던전 공략에 나서야 했다.
건우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쉽게 끝날 리 없지.’
방금 생각한 경우는 디아도스만 상대했을 경우다.
만약 디아도스가 몰고 온 언데드 군단까지 고려하면 피해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과거, 세피아는 아이스 에이지로 한 나라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디아도스는 사제트와 연계해 죽음의 군단을 이끌고 세 개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들은 한 나라 인구를 언데드로 탈바꿈시켰다.
인간은 끝도 없는 언데드들의 습격에 차례차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난 어떻게 이런 것들이랑 싸워 왔지.”
건우는 새삼스럽게 과거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리한 적도 없는 주제.
“…….”
상당히 삐졌는지 건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근래 들어 세이비어의 팩폭이 마음을 묘하게 후벼 팠다.
건우는 앙금을 품고 말했다.
“오늘 저녁 10시 드라마를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왜 들까요?”
-이놈!! 100인치 TV를 받아 놓고 어떻게 볼 생각을 안 해!
“아 그러네요. 그럼 교양 있게 바둑을 봐야겠네요.”
-내,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마.
“사과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세이비어의 사과에 건우는 피식 웃었다.
이제는 그가 자신보다 더 현대인인 것 같았다.
세이비어는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참이냐?
“당연히 대비해야죠. 근데 이것 참 불친절하네.”
건우는 종말의 비석을 보며 인상을 홱 찌푸렸다.
분명 종말을 예고해 준다는 점에서 비석은 유용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간 전력을 감퇴하면서까지 복원시킨 보람은 없다.
건우는 쯧 혀를 차며 팔을 높이 들어 비석에 손을 얹었다.
“예언만 해 주면 어쩌냐. 어떻게 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줘야 될 거 아니야.”
띠링.
그때 귓가에 시스템음이 울려 퍼졌다.
[퀘스트가 형성되었습니다.]
[퀘스트: 디아도스의 도래를 막아라.]
-달성조건: 디아도스가 강림할 게이트를 파괴하라.
난이도: 최상
보상: 필모어의 기록서
‘필모어의 기록서?!’
예상치 못한 보상에 건우는 눈을 부릅떴다.
필모어.
그는 전생시절에서 탑을 떠돌던 하이랭커였다.
힘은 신들과 견줄 수 있다고 알려졌으며, 신들의 은밀한 비밀도 간직하고 있다.
그의 교본에는 탑 등반의 노하우가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기록서는 탑등반계의 바이블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 사실은 로한의 사실을 더듬은 것이 아니라 건우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필모어의 서사시는 지구에도 전파되어 동화처럼 일컬어졌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로 있었어?’
놀란 건우의 앞에 상태창이 생성됐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하려고 했어.’
건우는 피식 웃으며 수락을 클릭했다.
띠링.
[연계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디아도스의 정찰부대를 섬멸하라.]
-달성조건: 디아도스의 강림을 위해 파견된 정찰병들을 섬멸하라.
-난이도: 상
-보상: 데일라잇의 성수 및 좌표석.
-게이트 생성 좌표: 244.XX.
-게이트 생성까지 남은 시간: 17일
‘아직 좀 시간이 남았네.’
건우가 잠시 깊은 고심에 잠겼을 때였다.
-건우야.
“네.”
-크흠, 슬슬 10시구나. 빨리 가자꾸나.
“알겠어요.”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던전에서 집으로 복귀했다.
시간은 9시 50분.
그는 TV를 틀어 놓고 반지를 벗어 바로 앞에 놓았다.
-오오!
세이비어의 흥얼거리는 걸 무시하며 건우는 휴대폰을 살폈다.
오늘도 역시나 부재중인 통화가 한가득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터라 건우는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그러다가 춘삼에게 온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오늘따라 많이 전화했네.’
여러 가지로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터라 자연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건우는 즉각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리.
얼마 안가 춘삼이 전화를 받았다.
-형님! 어디 계십니까?
“집인데, 왜 전화했냐?”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또 사기 쳤던 사람이 쳐들어와서 두들겨 팼냐?”
-크흠. 부끄러운 과거사는 언급 좀 자제해 주십시오.
“부끄럽긴 하구나.”
-형님!
춘삼을 화를 냈지만 건우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워낙 낯짝이 뻔뻔해서 생각을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춘삼은 불편한 심정을 뒤로하고 용건을 말했다.
-사실 아크 길드에서 저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건우는 낯짝을 굳혔다.
“그 자식들이 너한테 무슨 짓 한 건 아니겠지?”
-걱정 마십시오. 그럴까 봐 형님이 붙여 둔 크레이지 처키들을 꼭 옆에 매고 있었으니까요.
“…….”
뜬금없지만 건우는 층계보스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짐짝 취급하면서 자기 아쉬울 때는 방패막이처럼 내세우다니.
어찌 이렇게 치졸한 놈이 있을까?
“그래서 아크 길드에서 너한테 뭐라고 하는데?”
-형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주선을 부탁하던데요.
“일 없다고 해라.”
-그렇게 말은 했는데요. 형님.
수화기 건너편에서 춘삼에게서 난감한 기색이 느껴졌다.
“했는데? 뭐?”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분이 오셔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누군데?”
-선우혁 회장이요.
“…….”
건우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선우혁.
그는 아크 길드의 대표로 명성을 떨친 자였다.
각성 등급은 A급으로 길드 운영에 일가견이 있었다.
20년 전, 각성자들이 나타나고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그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길드를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혁혁한 공훈은 아직까지 업계에서는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건우에게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선우혁이 바로 선우유정과 선우진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얼마 전, 건우는 자신을 습격한 선우유정을 가루도 안 남기고 소멸시켜버렸다.
후회는 없다.
선우유정은 그저 자승자박하여 최후를 맞이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가 얼굴을 보자고 하니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건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한테 전한 말이 뭔데?”
-한 번 대화라도 하자고 하더라고요. 약속 시간과 장소는 저한테 미리 말하고 떠났습니다.
“후우, 그 녀석들이 자기 멋대로 구는 건 유전 때문인가?”
건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장소랑 시간이 어딘데?”
-갈 생각입니까?
“어차피 그 콩가루 집안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막무가내 짓을 하거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춘삼은 곧 시간과 장소를 메시지로 보냈다.
***
서울 용산구.
6성급 호텔의 레스토랑 카페에 선우혁이 있었다.
뚜벅뚜벅.
그때 약속상대인 건우가 그의 앞에 앉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건우입니다. 이쪽은 제 매니저 박춘…….”
“로베르토 버트입니다.”
춘삼은 건우의 말을 가로채며 자기소개를 했다.
선우혁이 침중한 음색으로 말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맙네. 앉게나.”
두 사람은 선우혁 맞은편에 앉았다.
선우혁은 두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춘삼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는 반면, 건우는 별 긴장감도 없이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이에 선우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보군.’
하지만 업계 내공 20년 차답게 그는 얼굴에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용건은 자네를 아크 길드에 섭외하고 싶어서 그러네.”
건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제 의사는 확실히 전달된 것 같습니다만.”
“허허허허, 내 아들과 벌어진 사소한 마찰은 잊어 주게나.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차원에서 온 거네.”
건우는 ‘사소한’이란 대목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내가 자네한테 내밀 수 있는 제안이니 살펴보게나.”
비서가 탁자에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고, 춘삼이 봉투를 열어 확인했다.
“일단 자네가 우리 길드에 와 준다면, 공략한 던전의 이익 50퍼센트를 할애하겠네. 세금은 우리 쪽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지.”
통상 S급에게 제시하는 할당률은 20~30퍼센트였다.
그 외에도 개인 리무진 대용 및 복지 혜택 등이 나열돼 있었다.
춘삼은 인상을 홱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별론데요.”
“…….”
선우혁은 짐짓 당황하다가 다음 제안을 건넸다.
“토지 및 빌딩을 지급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있네만.”
춘삼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영…….”
선우혁은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허허허, 제3안에 적혀 있는 사항은 국내 기준이 아니라 세계 정상이 누릴 수 있는 복지사항도 넣어 놨네. 그렇게 되면 5년 동안은 탈퇴가 힘들겠지만.”
“에휴, 우리 헌터님 창창한 인생에 장애물 생겨서 안 되겠는데요.”
춘삼은 이번에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빠직!
결국 선우혁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저 노랭이는 좀 치우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푸훗!”
지금까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던 건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춘삼아. 나가 있어.”
“로베르토입니다.”
춘삼은 구태여 한마디를 더 남기며 자리에 벗어났다.
건우는 싱긋 웃으며 선우혁에게 말했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이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
선우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자신이 누구란 말인가?
헌터업계에서는 누구에게나 칭송받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선우혁은 사전에 조사했던 건우의 프로필을 떠올리며 말했다.
“혹, 이미 섭외가 된 건가. 다른 길드와도 친분이 깊더군.”
자료에는 자신들과 인연을 맺을 뻔했던 봉황 길드와의 연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묘하게 우릴 방해하는 느낌이군.’
“딱히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아쉬운 게 없거든요.”
“…….”
건우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마저 했다.
“그리고 그쪽 집안이랑 저는 영 맞지 않아서요. 아마 절 들였다가는 아크가 파탄날 겁니다.”
“…….”
솔직 담백한 말에 선우혁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말문을 뗐다.
“진이가 레이드 때, 자네를 두고 간 것 때문에 그런가?”
“두고 간 게 아니라 희생양으로 버리고 간 겁니다. 회장님. 그리고 저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요.”
“말조심하게. 어차피 거기에 대한 일은 다 비용을 지불했어. 이미 끝난 이야기야.”
건우는 눈을 삐죽 올렸다.
“……지불이라고 하셨습니까?”
“뭐 문제 있나?”
그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까지 했다.
건우는 싸늘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람 목숨으로 갑질하는 거 아닙니다. 이 콩가루 영감탱이야.”
빠직!
일순간 선우혁이 쥐고 있던 컵에 빗금이 서렸다.
곁에 있던 그의 비서는 뜨헉 소리를 내며 경악했다.
한편 건우는 자리를 박차고 출구로 발을 옮겼다.
그런 건우를 보며 선우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리와 전쟁을 선포한 거라고 봐도 되겠나?”
걸음을 멈춘 건우가 피식 웃으며 답변을 남겼다.
“총알은 많이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60.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