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뚝뚝.
세피아의 몸은 바닥에 물이 고일 정도로 녹아내렸다.
후우웅.
헬파이어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는지 그녀는 아직까지도 몸을 수복하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안광과 마주쳤을 때, 건우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유는 평소와 달랐다.
‘생각보다 약해.’
그의 눈앞에는 세피아의 상태창이 떠있었다.
<창빙의 군주, 세피아>
-등급: ★★★★
-설명: 얼음미궁의 최종보스.
최근 무리한 마법 구현으로 등급이 현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능력치
체력: 2900/3500 공격력: 820 방어력: 8800 마력: 7200
이름은 역시 새빨간 적색 표시였지만 등급은 4성이었다.
그렇다고 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마법 계열의 몬스터답게 마력이 5성급 몬스터의 평균을 월등히 상회했다.
세피아가 여전히 7성이었다면, 여기서 그 누구도 살아 돌아갈 수 없었으리라.
‘역시 아이스 에이지를 준비하고 있었어.’
-저기서 엄청난 마력이 느껴지는구나.
세이비어가 세피아의 뒤에 있는 통로를 지목했다.
“그런 것 같네요.”
때마침 건우 역시 마나스킨을 통해 감지를 마친 참이었다.
후웅!
통로 쪽에는 미세한 얼음의 결정,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무수히 부유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 통로에 혹한의 마력이 밀집해 발생하는 것 같았다.
마력의 근원지는 물론 세피아였다.
대강 상황 파악은 했지만, 건우는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어째서 전생과 달리 세피아의 힘이 깎여나가는 것일까?
아라크네부터 시작해 어째서 저들은 세상을 멸망시키는 재앙으로 선택받은 걸까?
그때 마동혁이 건우의 곁에 섰다.
“최건우 헌터님.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요. 마동혁 헌터님은 뒤에서 동료들을 보살펴주세요.”
“그, 그러면 차라리 제가 나서는 게…….”
“그 부상으로는 무리입니다. 동료들한테는 이걸 먹여주세요.”
건우는 인벤토리에서 불사조의 명약을 꺼내 마동혁에게 건넸다.
“이, 이건?!”
약의 진가를 알아본 마동혁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말투에 건우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저도 최대한 끝내고 치료에 가담하겠습니다.”
“그럼.”
마동혁이 즉각 동상이 된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저벅.
건우는 그대로 세피아를 향해 걸었다.
때마침 몸을 완전히 수복한 세피아 역시 얼음의 창을 생성시키며 걸어오고 있었다.
‘장비까지 갖추고 있으니까 바포메트 때보다는 덜 고생하겠지.’
“우선 맛보기로 가볼까나.”
[파이어볼을 발동했습니다]
[파이어볼을 발동했습니다]
[파이어볼을 발동했습니다]
세피아의 주변으로는 다수의 파이어볼이 도깨비불처럼 형성됐다.
딱!
그러나 세피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쩌저저저저적!
그러자 건우의 주변으로 수많은 얼음송곳이 형성됐다.
숫자도 건우가 생성한 파이어볼보다 훨씬 많았다.
“빨라?!”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마법을 쏟아냈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화르르르륵!
쏴아아아아!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각각 아이스월과 파이어월이 형성되어 상대의 마법을 막아낸 참이었다.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가운데.
타앗!
마주 본 두 존재는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세피아는 얼음의 창을 쥐고 돌격했다.
카앙!
건우 역시 크루엘의 마검을 빼들어 즉각 응수했지만,
콰직!
공격을 완전히 흘리지 못하고 어깨에 상처가 스쳐 지나갔다.
빠른 속도에다가 창의 위력까지 가미되니 벌어진 결과였다.
건우는 치료할 틈 없이 세피아와 공방전을 벌였다.
카카카카카캉!
매섭게 찔러 들어오는 창격.
니제르의 초식을 구사하고 싶었지만, 막는 것으로만 급급했다.
‘바포메트보다 훨씬 빨라?!’
[초감각을 발동했습니다]
그나마 초감각을 시전하니 아까와 달리 세피아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다.
세피아.
그녀의 움직임은 창을 구사하는 이들 중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이건 어떨까나.’
휘릭!
몸을 회전시켜 날아드는 창을 회피한 건우는 세피아의 겨드랑이 밑을 노렸다.
우우우웅!
크루엘의 마검에는 검은 오러가 맺혔다.
건우는 검을 휘두르며 승리를 장담했다.
이 궤적은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녀는 한 팔을 잃고, 창을 사용하는데도 큰 문제가 생기리라.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 공격에 대한 답을 세피아는 마법으로 답해주었다.
쩌저저저저저적!
건우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얼음송곳이 생성되며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세피아 역시 건우를 향해 창을 내찔러왔다.
“뭐?!”
건우는 눈을 부릅뜨다 공격에서 회피로 방향을 바꿨다.
[블링크를 발동했습니다]
콰콰콰콰콰콰쾅!
몰아치는 얼음송곳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던전에 폭음을 자아냈다.
주륵.
블링크, 단거리 텔레포트로 간신히 회피한 건우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허억, 허억.”
세이비어는 관전 중 분석한 상황을 일러주었다.
-애초에 이 던전 자체가 세피아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그녀가 열화 됐다고 해도 지형보정으로 인해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단다.
주변은 눈과 얼음으로 인해 반짝이고 있었다.
저벅저벅
세피아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며 건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쩌저저저저적!
그녀는 전신에서 강렬한 냉기를 뿜어내며 다시 허공에 얼음송곳을 형성했다.
이번에는 그 크기가 아까보다 세 배는 더 크고 두꺼웠다.
송곳이 아니라 기둥이라고 표현해야 될 정도였다.
“젠장! 해보자는 거지?”
건우는 발끈하며 전신의 마력을 모두 개방했다.
[파이어볼을 발동했습니다]
[파이어볼을 발동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마법을 난사했다.
콰콰콰콰쾅!
순수한 화력은 세피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다만, 건우가 에어웨이브까지 전개해 화력을 키우니 승부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이렇게는 승부를 결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게 판단한 건지, 세피아는 양손에 빙룡을 소환해 건우에게 날렸다.
크아아앙!
얼음으로 조각된 두 마리의 용이 순식간에 건우의 뒤를 점했다.
콰르릉!
[더블 체인라이트닝을 발동했습니다]
건우의 양손에 맺힌 뇌력의 줄기가 곧장 빙룡을 관통했다.
타앗!
난이도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세피아는 마법을 난사하며 건우를 향해 돌격했다.
건우는 즉각 발을 뒤로 빼며 마검으로 응수했다.
카카카카카카캉!
달리면서 치르는 격전.
불똥과 격철 소리를 난무하며 둘은 엄청난 속도의 공방전을 펼쳤다.
“……대체 정체가 뭐야? 완전 상위권 랭커의 움직임이잖아.”
멀찍이서 동료를 돌보고 있던 마동혁이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상대는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한 던전 보스.
S급 중에서도 상위권 랭킹만이 상대가 가능한 레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격전 중.
건우는 조금씩이지만 데미지를 허용하고 있었다.
승세가 미세하게 세피아에게 기울고 있는 것이다.
빠득!
마동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애써주시구려.”
***
초감각 때문에 세피아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음의 창은 아직까지도 섬광처럼 느껴졌다.
파앗!
또다시 얼음의 창이 건우의 등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다.
[응결저주로 동상을 입었습니다.]
[초감각 스킬 남용으로 피로도가 급상승됩니다.]
‘젠장!’
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작용이 나올 정도로 이렇게까지 장시간 격전을 치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세피아에게는 좀처럼 유효타가 먹히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세이비어가 중간에 호통을 치지 않았다면 진작 패배했으리라.
[복원을 발동했습니다.]
[동상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몸 상태를 수복한 건우는 입가를 씰룩였다.
‘웃어, 웃어야 돼.’
슬쩍.
그러자 건우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서걱! 콰앙!
그 기점으로 상황에 반전이 일어났다.
니제르 이식, 사편.
건우의 검이 창대를 휘감듯이 스치더니 세피아의 가슴을 꿰뚫었다.
콰쾅!
당황한 세피아는 얼음송곳을 쏘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건우는 마검을 버리고, 인벤토리에서 트윈헤드 오우거 건틀렛을 꺼내 장착했다.
시간으로는 고작 1초.
콰칭! 푸욱! 푸욱!
날아온 얼음송곳은 대부분 건틀렛의 풍압에 반파됐지만, 몇 개는 건우의 몸에 박혔다.
‘아파 죽겠네.’
건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세피아의 양쪽 손목을 붙들었다.
콰드득!
붙잡기가 무섭게 건틀렛이 동결저주로 인해 얼어붙었다.
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킬을 전개했다.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며 방벽이 형성됐다.
세피아의 팔을 제외한 몸통 전부가 실드 안에 갇혀버렸다.
콰앙! 콰앙! 콰앙!
세피아가 동결저주를 퍼부으며 실드를 뚫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건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와라. 바포메트.”
[게이트를 형성합니다.]
우웅!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뒤로 게이트가 형성됐다.
스스스스.
그리고 게이트 너머에서 거대한 뿔을 가진 염소악마가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우우웅!
벌어진 입에서는 엄청난 양의 마력이 밀집됐다.
?!
위기를 감지한 세피아는 머리로 실드를 들이박으며 벗어나려고 했다.
콰앙! 콰앙! 콰앙!
쩌걱!
하지만 머리에 균열이 일어날 뿐.
실드는 쪼개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세피아는 방법을 바꿔 자신의 팔을 송두리째 부수기 시작했다.
쩌거걱! 콰앙!
팔에 서서히 균열이 가며 부서지기 일보 직전.
세피아의 표정에 한순간 희망이 엿보였다.
바로 그때, 건우의 건틀렛에서 금빛 마력이 발산됐다.
[복원을 발동했습니다.]
균열이 간 틈이 금빛 마력으로 메워지며 팔이 원상태로 복원됐다.
꽈악!
건우는 복원된 세피아의 팔을 붙들고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되지. 세피아, 이제는 네가 멸망할 차례야.”
?!
세피아의 표정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바포메트 입에서 브레스가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세피아의 몸은 일제히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나더니 부서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얼음미궁을 공략했습니다.]
[보상으로 빙창, 글라체스를 획득했습니다.]
“……끝났네.”
건우는 피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건틀렛에는 진주 같은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얼음미궁의 던전 코어>
-등급 : ?
-설명 : 얼음미궁을 이루고 있는 핵심 코어, 이제 곧 소멸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내구성 17/250
꽈악!
건우는 코어를 손에 꽉 쥐었다.
“운이 좋네. 두 번이나 코어를 손에 넣었어.”
그때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마동혁이 달려왔다.
“최건우 헌터님! 모, 몸은 괜찮습니까?”
“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동료분들 상태는 어떻죠?”
그는 얼굴을 밝게 피며 말했다.
“최건우 헌터님의 도움으로 모두 살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행이네요.”
“자, 던전도 공략됐으니 어서 빠져나가도록 하죠.”
“먼저 나가주세요. 저는 아직 이곳에서 해야 될 일이 남았습니다.”
마동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먼저 동료들을 데리고 그대로 게이트로 빠져나갔다.
잠시 후.
뚜벅.
건우는 보스 방에 있던 통로를 거닐며 내부로 진입했다.
그곳은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이었다.
천장에는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 꽤 위험한데”
마법진을 살피던 건우가 이마에 주륵 식은땀을 흘렸다.
[아이스 에이지(Ice age) 가동까지 : 00:42:01]
약 42분.
그것은 화성 시가 혹한의 지대로 변모하기까지 남은 시간이기도 했다.
37.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