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0 / 0331 ----------------------------------------------
13부. 괴수의 왕
섬에는 여전히 많은 괴수들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이제는 헌터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자기 몸에 붙어있는 붉은 진드기를 공격하라고 했던 라이어 버드는 이제 다른 소리를 냈다.
-왕을 지켜라. 적으로부터!
역시 보빗의 목소리였다.
라이어 버드는 그 말을 했을 뿐이었지만 라이어 버드의 말을 들은 괴수들은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인식했다. 그들은 헌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섬으로 오는 괴수들이었다.
섬에 있던 괴수들과 섬으로 새로 들어오는 괴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필살의 의지로 싸우는 싸움은 점점 더 광포해졌다.
지우가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짚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지우가 묻자 이익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경욱 헌터라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입니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지만 민경욱 헌터는…….”
이익헌이 효재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효재는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놀라서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자부심과 함께, 아버지가 없는 지금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요?”
효재가 말했다.
그순간 효재가 눈을 크게 떴다.
들었지만 이해되지 않았던 말들,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효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담겨있던 의미가 효재에게 깨달아졌다.
큰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었던 말들. 효재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들.
“모든 건 믿음과 거짓에 달려 있어. 우리는 속임수를 쓰는 거다. 진실이 아닌 걸 믿게 하는 거지. 환상도 환청도,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그러려면 우선은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되고 보게 만들어야 돼.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야 하지.”
효재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여기에,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다는 말인 건가.
이익헌과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 절벽 앞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온통 검은 갑옷을 입은 채 그는 보빗에게서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고양이 섬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효재는 굳어버린 석고상같은 얼굴을 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무영이 더 놀란 얼굴로 효재에게 다가가서 효재의 팔을 꽉 잡았다.
효재의 아버지는 사람을 구하려고 기차에 뛰어들었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 분이 보인다는 건…….
“이제는 귀신도 와서 돕는가보다. 하긴. 주비 때문에 괴수가 우리 편이 됐으니까 귀신도 그럴 수 있는 거겠지. 괴수가 우리를 돕고 있는데 귀신이라고. 뭐. 그래. 못할 것도 없는 거겠지.”
무영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효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빠야. 아빠가 맞을 거야. 그렇죠?”
효재가 이익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익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죽음을 꾸민 거야말로 민경욱의 최대의 역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아닌 걸 믿게 했다.
환상도 환청도,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그러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이익헌은 자기가 민경욱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새삼 실감했다.
효재가 시현을 바라보았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시현은 자신의 몸에 차크라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숙주가 패하도록 정해진 싸움인 줄 알고 먼저 포기한 것 같던 괴수 차크라가 다시 시현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현이 먼 하늘을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더 이상 섬을 향해 오는 괴수는 없었다.
이번에 끝낼 수 있다면 전부 다 끝날 거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현이 그동안 너무 많은 차크라를 썼다는 것 때문에 흔쾌히 그러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때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팔을 들어 교차해 흔들었다.
그리고 그 손을 하늘로 올렸다.
그의 제스츄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시현은 그게 차크라 기둥을 쏘아 올리라는 의미인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만 더 저를 믿어주세요.”
시현이 말하자 임정이 지우의 팔을 잡았다.
“가요. 아들 차크라에 맞았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고요.”
지우가 시현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 자리를 피했다.
모두들 그렇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차크라를 모았다.
세상을 씻어버릴 것 같은, 폭포같은 차크라가 중력을 거슬러 반대로 뻗어올라갔다.
고양이 섬은, 러프 스톤을 수북하게 남긴 채 괴수의 사체로 뒤덮였다.
헌터들이 모두 달려왔다.
효재는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효재는 우뚝 멈춰 그를 바라보았다.
환하게만 지어지지는 못하는, 미안한 마음과 괴로움이 담긴 웃음을 걸친 남자가 효재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효재를 안았다.
“아…버지!”
효재가 제 아버지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랬던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경욱은 효재의 팔이 풀리자 시현에게 걸어갔다.
시현은 친구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경욱이 시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왕을 뵙습니다.”
“……!”
주비도 경욱의 뒤를 이었다.
“왕을 뵙습니다.”
주비에게 포섭되어 왔던 괴수들도 주비의 뒤를 따랐고 두 마리의 라이어 버드도 땅으로 내려와 생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을 뵙습니다.”
“……!”
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익헌과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을 보류하겠다는 태도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길무영입니다. 효재 친구죠. 효재가 어려웠을 때 많이 도와줬어요. 아버님.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보빗이 왜 그런 거예요?”
궁금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무영이 경욱에게 말했다.
효재의 아버지라고밖에 할 수 없는, 외모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던 민경욱이 입을 열었다.
“보빗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는 능력을 가진 괴수다. 실패했다고 생각되면 그 시간을 되돌리지. 죽었다고 믿을 때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부정할 필요가 없지. 보빗은 죽은 후에도 자신의 죽음을 부정할 수 있어. 그러면 보빗의 죽음이 부정되지. 그런데 그 시간에는 제한이 있다. 보빗이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한 채로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보빗한테는 영원히 기회가 없지.”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항상 그리워했어요.”
효재가 말했다.
“나는 너랑 같이 있었어. 너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욱이 효재의 어깨를 붙잡은 채 효재를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며 말했다.
그때 문득 효재는, 큰아버지의 집에서 훈련을 받던 때를 떠올렸다.
마지막 날, 큰아버지의 말이나 행동이 전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저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 아버지였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경욱을 바라보자 경욱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셸터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헌터들을 향해 달려오다가 해변의 조약돌이 러프 스톤으로 바뀐 것 같다고 착각을 했다. 그럴만도 했다. 러프스톤을 밟지 않은 채 다섯 걸음을 옮기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섬은 러프 스톤으로 가득찼다.
달려온 사람들은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를 보고 멈칫거렸지만 그가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았어도 경욱이 누구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주비와 다른 괴수들이 시현의 주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속도를 떨어뜨렸다.
“괴수의… 왕이 되기로…, 한 거야?”
지연이 느린 목소리로 시현에게 물었다.
그러자 경욱이 고개를 저었다.
“괴수의 왕이 아닙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경욱이었다.
모두가 경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시는 겁니다.”
경욱이 말했다.
“풉!”
“푸픕!”
“으으으으으흐으으읍!”
각각 효재와 제이, 무영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시현은 붉은 유황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오그리 토그리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어우. 야. 미안해. 나는 아빠를 처음 가져봐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아빠 대신 사과해야 되는 거야?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거에 대해서?”
효재가 말했다.
경욱은 효재를 야단치지 않았다.
주비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경욱은 웃음을 지은 얼굴로 주비를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시현의 의지를 떠나서, 이제 모든 괴수들이 그에게 복종할 터였다.
고양이 섬 바깥의 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고양이 섬의 헌터들만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더이상 고양이 섬으로 괴수들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익헌이 경욱을 조용히 살폈다. 다른 사람들이 경욱을 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하더라도 이익헌은 선천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민경욱에 대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익헌이 자신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른채 경욱은 이익헌에게 특별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했다.
“제 아들을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마침내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때 경욱이 이익헌에게 말했다.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으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이익헌이 말했다.
“예?”
경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익헌을 바라보았다.
익헌은 시선을 경욱이 끼고 있는 반지에 두었다.
특이한 반지였다.
익헌이 탐낼만큼 특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익헌은 거기에 관심을 보였다.
“이건. 저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반지기는 하지만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기꺼이 주겠다는 말을 할 때는 어울리는 동작을 하면서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익헌은 이미 손을 내민채 말했다.
민경욱은 정말 그런 자리에서 반지를 뺏길 줄은 생각을 못했다가 익헌에게 반지를 강탈당하듯이 뺏겼다.
아키라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이익헌에게 걸리면 팬티까지 뺏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단 벨트를 꽉 붙잡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이카 역시 눈에 웃음을 건 채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익헌은 만족스러운 듯이 반지를 구경했다.
그렇다고 자기 손가락에 끼운 것은 아니었다.
반지를 두 손가락으로 든 채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이익헌의 뒤로 시아가 지나갔고, 시아의 손이 스치자 이익헌이 반지를 떨어 뜨렸다. 얼핏 보기에는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부녀 사기단 같았다.
이익헌은 반지가 민경욱의 비밀을 시아에게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보다 더 정확한 방법은 없을 터였다.
주비와 괴수들은 그들의 주군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우가 서규태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써전님?”
서규태는 미키 위도에게서 폭풍처럼 메시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여주면서 한숨을 쉬었다.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폐허로 변한 사진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괴수들의 대이동 중에 경로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 도시가 재앙을 맞은 것이었다.
“누군가 이 혼돈의 시기에 질서를 바로잡기는 해야 할 것 같군요.”
서규태가 말했다.
태인이 서규태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거들었다.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는 거겠군요.”
“그럴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제가 알기로는 한 무리밖에 없죠.”
강현이 말했다.
“이게 뭐야. 이 조그만 땅덩이 위에서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았는데. 갑자기 땅이 도대체 얼마나 늘어난 건데?”
미하일이 툴툴거렸다.
“괴수와 인류를 포함한 지상 유일의 통치자라니. 시현이가 나를 다스린다고? 그 말에 나는 반댈세.”
레오니드가 말했다.
“나도. 나는 시현이 선생님이었던 사람이야.”
미하일이 말했다.
“나는 아빠였어.”
“나는 엄마였고.”
“나는 아빠의 써전이었어. 시현이가 나를 다스린다는 건. 안 돼. 자존심이 상해.”
서규태가 말했다.
“삼촌을 다스리다니. 그러는 거 아니야. 그건 아주. 굉장히. 건방지고 패륜적인 행동이야.”
이익헌이 말했다.
“나는 친구야. 네 친구. 어림없어. 나를 다스리겠다는 생각 하면 가만 안 놔둬.”
무영이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 말도 한 적 없어요. 저도 그러고 싶지 않고요.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 아니예요? 안 그래, 주비?”
시현이 갑자기 주비에게 도움을 청하자 주비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분들 사이에서의 역할이나 관계는 변하지 않게 되겠죠. 저도 이 사람들을 겪어봐서 알지만 세상의 모두가 주군의 통치를 받게 되더라도 이 분들은 아마 그 ‘모두’에서 빠지게 될 겁니다.”
“너무 많아서 힘들면 우리가 같이 다스려 줘?”
효재가 시크하게 제안했다.
“지금도 잘 들 다스리고들 있는데 왜 굳이 내가…….”
다시 징징거리는 시현에게 제이가 스마트폰을 코 밑에 들이밀었다.
“도시 재건부터 시작을 해야 될 것 같은데. 그게 이어지다보면 네 제국이 건설되는 건가보다. 어쨌거나 무너진 걸 다시 세우긴 해야지.”
제이가 말하자 그런 식으로들 가닥을 잡아갔다.
고양이 섬으로 갑작스럽게 집결하게 된 괴수들의 대이동으로 폐허가 된 땅을 회복시키는 일에서부터 시현이 맞을 새로운 첫날의 과업은 시작이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