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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시현아!”
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시현은 들소의 뿔 같은 보빗의 턱이 저를 향해 조여오는 것을 보았다.
시현의 차크라는 이제 스스로 나와서 보빗을 대항해 싸웠다.
시현이 거절하더라도 제 숙주를 지키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타협을 할 생각이 없는 차크라였다.
일단 시현을 보호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주저하는 것은 없었다.
시현의 차크라가 보빗을 에워싸자 보빗의 턱이 얼어붙었고 그것이 그대로 깨지며 녹아내렸다.
시현은 아무리 괴수의 왕인 보빗이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빗을 알지 못해서 내린 오판이었다.
보빗의 몸은, 녹아내린 그곳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시현의 차크라는 독자적으로 몇 번이나 다시 공격을 했고 그때마다 같은 일이 일어났다.
보빗이 다시 살아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그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져서, 보빗이 죽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보빗의 체력 말이야. 다시 살아나면 리셋 돼!”
무영이 효재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효재는 무영의 말을 듣고 보빗의 머리 위에 나타난 정보창을 확인했다.
무영이 한 말이 맞았다.
“저건……!”
효재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보빗과 시현을 바라보았다.
보빗은 차크라를 거의 소모하지도 않고 있었다.
효재는 그것이 보빗의 진짜 능력인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비!”
효재가 주비를 찾아달려갔다.
주비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비는 제 주군이 보빗에게 당할 거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제 주군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시아가 시현을 부르면서 괴수의 몸으로 쌓여진 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괴수의 공격을 당했다.
이익헌이 시아를 제때 구해내지 않았다면 시아는 임정의 치료를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시아가 그런 일을 당하자 이익헌도 빠르게 무너졌다.
임정도 마찬가지였다. 연쇄 작용이 일어났다.
보빗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기는 했지만 그들은 보빗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귀찮고 야비하고 비열하고 무능력하다고 생각만 했지 보빗이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우가 시현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한꺼번에 몇 백마리의 괴수가 지우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아무도 시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 같았다.
다른 몇 명의 헌터들이 시현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매번 무산되었고 그때마다 헌터들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공격을 받았다.
“주비! 보빗이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고 있는 것 맞아?”
효재가 물었다.
주비는 흔들리는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고 있다가 효재의 말에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정신 능력을 공격에 적용하지 않고 방어에 적용하는 괴수가 있다는 얘기였다.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정신 능력을 방어에 사용하는 괴수가 있고 보빗도 그런 종류의 괴수라고 한다면 효재가 말하는 그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에게 이루어진 공격은 부정한다. 죽어도 죽은 것을 부정한다. 완전히 죽기 전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기만 하면.'
다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보빗에게 일어난 사건, 보빗이 당한 죽음.
그것만 부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현의 차크라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고갈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아키라는, 시현이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엄청난 차크라를 전부 쓸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도 없이 일어나는 전투에 갇힌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아키라는 생각하게 됐다.
아키라는 제 안의 괴수들을 다시 내보냈다.
괴수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바닥에 몸을 박은 채 벌벌 떨었지만 아키라는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차크라 회오리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나를 숙주로 삼은 괴수들이 고작 이따위였다는 말을 듣게 하지는 않겠다.”
레이카도 자신이 가진 괴수들을 모두 방출했다.
그들의 괴수들은 두 사람이 어떤 의지로 싸움에 임하는지 깨달았다.
숙주에게 길들여져서 이제 숙주 없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데는 여러 모로 지장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 괴수들은, 자기들에게 선택의 폭이 극도로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숙주가 반하게 확 멋있어져 버리자는 생각을 한 건지, 그들은 괴수의 성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틈을 만드는데는 기여를 했다.
아키라와 레이카의 괴수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무영과 제이가 괴수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무영이 주입한 독은 불처럼 빠른 속도로 괴수들을 타고 번져갔다.
독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괴수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괴수들을 갉아먹으면서 옆으로 번져갔다.
견고하기만 했던 괴수의 성에 균열이 생겼다.
멀리에서 보기에는 성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는 괴수들의 위로 날아 올라가서 닥치는대로 잡아서 던졌다.
버티는 놈이 있으면 아예 안으로 때려 넣어 버렸다.
벽돌이 빠지듯이 군데군데 구멍이 생기면서 틈이 보이자 다른 헌터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공격을 시작했다.
먼저 괴수의 성을 부수지 않으면 그 안에 갇힌 시현에게 닿을 방법이 없었다.
효재가 만들어낸 환상을 보면서 괴수들의 행동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괴수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몸이 발아래부터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발 아래에 생긴 거대한 회오리 바람 속에 저희들의 몸이 빨려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세상이 빠르게 돌면서 그대로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에 괴수들은 헌터들의 공격에 대비할 틈을 놓쳤다.
보빗이 부른 괴수들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고양이 섬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싸움은 거기에서 끝이 나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섬을 향해 괴수들이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모두가 끝까지 싸웠지만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고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동료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헌터들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시현은 자기가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시현은 보빗이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눈 앞에서 몇 번이나 죽었던 보빗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평정을 잃었다.
주비가 시현을 향해 달려가다가 다른 괴수들의 공격을 받고 내팽개쳐졌다.
밟히고 찢기면서 죽음을 맞이할 뻔 했던 주비를 구한 것은 라이어 버드였다.
라이어 버드가 목숨을 걸고 주비를 구해냈다.
서로서로 그런 식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그들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위기를 벗어나서, 결국 내가 모두의 죽음을 목격한 채 마지막에 살아남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죽는다면.
죽게 된다면.
동료들과 같이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기운이 팽배해질 무렵이었다.
시현은 보빗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현은 더 이상 보빗을 순간적으로 얼리지도 못했고, 보빗의 촉수와 턱의 공격을 어렵사리 피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생명을 연장해 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자신의 차크라가 심각할 정도로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더 괴수들을 쓸어버리고 싶었고, 내일을 기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도 이제 그만큼의 차크라마저도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은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떼면서 몸을 움직였다.
다른 몇 사람에게는 여전히 자기가 희망일 거라는 생각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빗이 날카로운 두 턱을 끝없이 조여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보빗은 강박적으로 턱을 계속해서 조여댔다.
그것이 서로 만나면서 더 이상 조일 수 없게 됐을 때도 보빗은 멈추지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보빗은 힘의 강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로 턱을 계속해서 조였다.
보빗의 왕관 같은 두 개의 턱이 부서졌다.
그렇다고 해 봐야 곧 다시 생겨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기는 했지만 보빗은 그 희한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 촉수로 제 몸을 공격했다.
고행을 하는 수도승처럼 보빗은 제 몸에 가차없는 공격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라이어 버드의 소리가 들렸다.
보빗의 목소리였지만 시현은 그것이 라이어 버드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시현은 라이어 버드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너희 몸이 붉은 진드기에게 먹히지 않게 붉은 진드기를 공격하라!”
라이어 버드가 보빗의 목소리로 괴수들에게 명령했다. 괴수들은 의심없이 그것을 보빗의 명령으로 이해했다.
괴수들은 모두가 제 몸을 공격했다.
시현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효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보빗에게 다시 공격을 하려다가 몸이 내던져졌다.
보빗이 시현을 치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제 몸을 피처럼 뒤덮는 가상의 붉은 진드기에 겁이 나서 허우적거리다가 그렇게 된 거였다.
괴수의 성이 저절로 무너졌다.
헌터들은 모두 달아났다.
공격 의지를 잃은 채 패닉에 빠진 괴수들은 그야말로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기도 했다.
효재조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시현이 그들 사이로 내려가자 모두가 시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지우가 시현에게 물었다.
“저는 효재가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라이어 버드가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몸이 붉은 진드기에게 먹히지 않게 붉은 진드기를 공격하라고 보빗의 목소리로 말했어요.”
시현이 말했다.
“라이어 버드가요?”
주비가 물었다.
“붉은 진드기?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영이 말했다.
“라이어 버드가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해?”
무영이 주비에게 물었다.
주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라이어 버드도 조종당한 것 같은데요?”
주비가 말했다.
“라이어 버드를……. 조종했다고? 누가 그럴 수가 있는 건데? 또다른 괴순가? 주비. 네가 포섭한 괴수야?”
시현이 물었다.
그러나 주비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포섭한 괴수들이 굉장하다는 자신은 있었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녀석은 없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지금까지 주비에게 숨겼을 것 같지도 않았다. 주비가 포섭한 괴수들은 주비가 속속들이 아는 괴수들이었다. 이렇게 강력하고 유니크한 능력을 자기가 몰랐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익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한 기시감.
그런데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