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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왕, 본인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왕을 홀로 섬기는 신하였으면서도 가장 줄기차게 주군의 말을 거슬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지 않는 걸 조르는 건. 안 되는 거겠지?”
주비가 말했다.
야나는 대답 없이 주비의 주위를 몇 바퀴 더 돌았다.
주비는 알아채는 사람이 없는동안 언덕 위로 올라갔다.
절벽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비를 맞아들였다.
주비가 떠나고 시현은 그게 일종의 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떠난 다음에 후회하는 것.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시현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반화를 하고 있었다.
자기를 떠나간 사람들은 모두 자기 때문에 괴로워서 떠난 것 같았고 자기가 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았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거기에 '괴수'까지 포함하게 생겨버렸다.
시아는 시현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보는 게 싫었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그동안 너무 한가해서 이것 저것 생각만 많았던 거라면서 시아는 제가 훈련하는 거라도 도와달라고 말했다.
일단 시아의 잡도리가 시작되자 정말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졌다.
제이와 시아는 어느새 주비를 걱정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주비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세상이 변해가고 있었다.
괴수들과 인간들이 헌터라는 존재를 매개로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평화를 유지하면서 공존하던 세상이 조금씩 흔들렸다.
보빗을 따르는 괴수들은 더 심했다.
고양이 섬의 헌터들은 더 이상 고양이 섬에서 보빗의 수하들이 공격해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지쳤다는데 입을 모았다.
무영이 했던 말이, 그리고 주비가 했던 말이 시현의 머릿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것 같았다.
괴수의 왕이 되지 말고 괴수와 인류의 왕이 되어서 인류와 괴수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시현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꿈틀거리는 때가 있었다.
미키 위도는 급변하는 상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양이 섬의 헌터들에게 경고를 보내왔다.
이러다가는 균형이 완전히 깨지고 헌터로도 괴수에 대항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고양이 섬의 헌터들도 알 수 있었다.
늪과 콜로니가 생기는데 고양이 섬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보빗의 수하들이 하늘을 검게 덮고 고양이 섬에 공격을 감행했을 때, 클랜 A와 어린 헌터들은 그때야말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남는다면 그 다음날부터는 완전히 달라져야 할 것이었다.
더 이상은 고양이 섬에 남아서 방관자로서 살지는 않을 거라고 모두들 뜻을 모았다.
그 다음날의 일을 계획하고, 구체적으로 꿈꾸기 위해서라도 그 날은 살아남아야 했다.
헌터가 아닌 사람들은 셸터에 들어갔다.
선아영과 지연, 천기정과 채준형은 마지막까지 셸터에 들어가지 못하고 클랜 A와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헌터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때처럼 걱정이 됐던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채준형이 그들을 다독였다.
저 사람들이 밖에서 문을 두드려 줄 거라고.
다 끝났으니까 나오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해 줄 거라고.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기다리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선아영과 지연은 지금 자신들이 보는 모습이 살아있는 헌터들의 마지막 모습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비록 먼 하늘을 검게 덮은 먹구름 같은 괴수 군단이 빠르게 섬으로 다가오고 있었더라도. 그들은 절대로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
먹구름이 몰려왔다.
일반적인 먹구름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을 덮은 괴수 군단이었다.
“이번에는 보빗도 올 것 같군요.”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괴수들의 엄청난 행렬을 보자니 다음번은 없다는 괴수들의 의지가 읽혔다.
보빗이라면, 이 많은 녀석들을 앞세워서 헌터들의 차크라가 바닥나게 한 후에 나오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게 왕이라니. 진짜 싫다.”
강현이 말했다.
괴수들의 총공격은 시현을 위한 공격이라는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었다.
클랜 A와 어린 헌터들이 고양이 섬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이 괴수들이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향할 때 괴수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보빗의 계획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빗이 오늘에야말로 괴수의 왕에 오르는 즉위식을 거행할 모양이다.”
태인이 말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죠.”
미하일을 시작으로 헌터들이 괴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섰다.
하늘과 바다가 모두 괴수로 점령된 것 같았다.
위협적인 날개를 펄럭이면서 괴수들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세진이 활을 꺼내들었다.
화살이 괴수를 향해 뻗어나갔고 정확히 괴수의 몸을 맞췄지만 세진이 한 번의 공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괴수들은 많지 않았다.
초반에 진을 빼겠다는 계획이었는지, 앞서 나온 녀석들 중에 체력이 높은 1급 괴수들이 많았다.
“우리가 먼저 나서야 될 것 같은데요?”
지우가 아키라를 보면서 말했다.
상대가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거기에 걸맞게 대우를 해 주자는 생각이었다.
그 ‘우리’에 자기도 끼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클랜 A가 한꺼번에 나섰다.
결국 우리라는 말이 클랜 A를 가리키는 말처럼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싸울 상대가 겹쳐서 심심해질 틈은 없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날아오른 야로슬라프는 날아오고 있던 괴수의 목을 돌려 잡아 목뼈를 부러뜨리면서 그것을 밟고 다른 괴수의 머리를 베어냈다.
강현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로데오 기술로 한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타서 괴수의 체력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공격을 감행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싸우는 것을 바라보다가 시현이 효재를 바라보았다.
“내 차크라를 써야 될 것 같아. 이걸 아꼈다가 오늘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거잖아.”
“그래도…….”
효재가 쉽게 동의를 하지 못하자 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시현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사는 동안 오늘같은 일을 얼마나 겪겠냐. 오늘은 써야 될 것 같아.”
무영이 말했다.
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후면 고양이 섬은 삽시간에 괴수들로 뒤덮일 터였다.
클랜 A가 그 수를 줄여가고 있기는 하지만 뒤따라오는 행렬이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러다가는 보빗의 의도대로 결국 헌터들이 모두 죽게 될 것 같았다.
아무리 클랜 A라고 하더라도 7일 밤낮을 계속해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고양이 섬을 향해 다가오는 괴수의 수를 봐서는 그 시간으로 충분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씀드려야겠어.”
시현이 말했다.
“하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을 거야. 괴수들이 섬에 더 가까이 다가오면 그때는 네 차크라를 우리가 피하는 것도 어려워져.”
제이가 말하고 나서 그들이 곧 소리쳤다.
“제가 할게요!”
시현이 크게 소리쳤다.
“시현이가 한대요. 우선은 피하세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클랜 A가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몸을 숨겼다.
시현이 서 있던 발 아래의 흙먼지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올라왔다.
시현의 주위에서 차크라가 응집되다가 깨끗한 직선을 뻗어냈다.
그 폭만 해도 50여미터에 달했다.
시현의 차크라에 닿은 것들은 회색빛 재로 변해 낙엽처럼 떨어졌다.
0.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마치 하늘에 괴수의 모습이 처음 나타난 때로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중량감있게 바다로 떨어지는 것은 러프 스톤이었다.
셸터에서 감응기로 그 모습을 보면서 지연이 중얼거렸다.
“497마리네요. 시현이가 한 번의 공격으로 죽인 게. 러프 스톤도 497개일 거고요. 여기서 나가면 당분간은 바닷속을 뒤져야겠는데요?”
지연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지연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제발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라면서도 자꾸만 나쁜 상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선아영이 그런 지연의 손을 붙들어 주었다.
“하늘을 보세요. 다시 채워지고 있어요. 지구상에 있던 괴수들이 오늘 여기로 전부 집결하고 있는 건가봐요. 콜로니란 콜로니가 전부 다 오픈된 건지.”
채준형이 말했다.
“콜로니는 괴수를 만들어내는 공장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선아영이 말했다.
하늘을 덮은 검은 그림자는 빠르게 섬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클랜 A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현이가 한 번 더 하려나본데요.”
천기정이 말했다.
지연은 시현의 차크라 양을 확인했다.
시현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지연도 알 수 있었다.
괴수들이 빠른 속도로 다시 채워지는 것을 봤고, 자신의 차크라 공격으로 한 번에 많은 괴수가 죽는 것도 봤기에 자기가 조금 더 많은 부분을 감당해 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이 하는 것은 두 번이나 세 번에서 멈춰야 했다.
차크라의 영구소실을 가져오는 공격을,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감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클랜 A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한 번 정도의 공격을 시현에게 부탁하고 그 후의 일을 자신들이 맡으려는 것 같았다.
하늘과 바다가 다시 괴수들로 채워지자 시현의 차크라가 다시 치솟아 올랐고 그 거대한 차크라의 막에 휩싸인 괴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셸터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응기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괴수들이 전멸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 나타나기는 하겠지만 이번에는 하늘을 채우는 속도가 느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콜로니가 생겨난 것인지.
괴수들이 한 번에 수 만 개씩의 알을 낳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렇게 낳은 알이 몇 초만에 성체로 자라나버리기라도 한다는 것인지.
모니터에서 클랜 A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끝이 없이 이어질 거라면 이제부터는 시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자기들이 싸우다가 지치면 시현에게 한 두 번 다시 요청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나서서 싸울 생각인 것이다.
괴수들을 마주하고 선 헌터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지 않으려고 애썼다.
솔직히 겁이 났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을 했다.
시현이가 같이 있는데, 게다가 클랜 A인데 이 싸움이 힘들어져봤자 얼마나 힘들어지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이 혼자서 해치운 것이 거의 천 마리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고양이 섬을 향해 날아오는 괴수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 진지하게 그걸 고민해야 하는 건지도 몰라. 러프 스톤이 계속 바다로 떨어지면서 수위가 올라가면 이 섬이 가라앉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무영이 말했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라보자.”
효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그렇게 많은 수의 괴수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하다보니 정신이 없었다.
레오니드가 나뭇가지를 관통시켜 삼십 여 마리의 괴수를 해변가로 끌고 왔고 그것들을 세진이나 임정 같은 다른 헌터 몇이 공략했다.
임정은 탱커라는 한계 때뭉에 기본 공격력의 수치는 딜러인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참 뒤진 상태였기 때문에 묵묵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