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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이 시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확답할 수가 없었다.
“주비……. 그냥 쓰레기인줄만 알았는데.”
시아가 말했다.
효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아야. 너 혹시 주비를 질투하는 거야?”
“시현 오빠는 언제까지나 나를 애 취급하고만 있잖아요.”
“우리 시아. 에휴.”
효재가 비맞은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면서 시아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
결국 시현도 알게 되었다.
정원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괴로워하기는 했지만 시아와 돌의 기억을 공유하고 나서 시현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편해 보여요, 오빠 얼굴요.”
시아가 말하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이렇게 놔 줘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 옆에 있는 동안은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시아는 시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그냥 꼬맹이기만 한 줄 알았던 시아가 이런 것도 하게 될 줄 알고. 대단하다.”
시현은 시아를 대견해 했다.
그것으로 끝이기는 했지만, 시아도 우선은 그런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주비는 옷에 묻었던 피가 그대로 말라서 굳어버리자 다시 옷을 벗어 던졌다.
주비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섬에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던 남자들은 손대신 다른 것을 들어서 주비에게 인사를 했다.
고양이 섬에는 성인군자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바디 펌과 익스트림 헌터의 종사자들 뿐만 아니라 클랜 A의 그늘로 피해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주비를 구경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클랜 A의 여자들은 주비를 고쳐준 시현을 비난하면서 주비를 제대로 교육시키거나 옷을 입히거나 하라고 윽박질렀다.
자기들이 주비에게 직접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주비가 직접 말했으니.
주비가 옷을 입지 않고 다니면 자기들이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고 레이카와 세진이 말하자 주비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당신들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수치감? 당신들을 보면서 나는 허기를 느끼는데 내 허기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당신들이 나한테 방법을 찾아줄 건가? 팔이라도 하나 떼 줄 거야? 서로 참는 거야. 서로. 나도 딱히 당신들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니라고.”
주비의 만행은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전에는 긴 머리카락으로 몸의 중요한 부위를 가리려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여자 헌터들에 대한 반감으로 아예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녔다.
시아와 제이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자기가 벗고 있다가 사람들한테 그 모습을 들킨 것 이상으로 기분이 나쁘고 수치심이 들어서 주비를 설득해보고 옷을 줘 보고 충고를 해도 주비는 도대체 말을 들어처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제이가 시현과 담판을 보기로 했다.
“안시현. 주비가 어쨌든 네 말은 듣잖아. 네가 해결해. 다시 네 셔츠를 주든지. 안 그러면 나는 고양이 섬에서 나갈 거야.”
제이가 정말로 고양이 섬을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현은 이 문제가 어떤 사람들한테는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현도 주비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현을 대하는 주비의 태도도 미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느슨해졌다고 해야 할지, 포기한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그 이유가 뭔지를 알려준 사람은 서규태와 레이카였다.
서규태는 주비의 상처가 나은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주비가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은 서규태가 지우의 차크라에 공격을 받아서 경험한 일이기도 했다.
시현은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주비도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서규태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아는 주비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괴수가 아닌 것 같았지만 시현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여자들한테 물어보는 것이, 그것도 레이카한테 물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서규태의 말에 시현은 레이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레이카는 주비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힘을 가지고 주군의 곁에서 주군의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가 힘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 레이카는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주비가 왜 그런 건지 모르겠어요.”
시현이 말했다.
레이카는 별난 바보를 다 본다는 듯이 시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모른다고?”
“네?”
“여자가 그러는 건, 주군에 대한 충성심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닐 걸? 물론 그런 여자들이 있기도 하겠지. 제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럴 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널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바보야.”
“그렇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주비는 괴수고 저는 인간이잖아요.”
“네 입으로 그 말을 했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레이카는 그렇게 말해놓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질문을 했으면 대답할 시간을 주고 대답을 기다려주든지 아니면 자기가 답을 알려주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시현은 골치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항구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고, 제이나 시아가 봤으면 뒷골이 뻐근해질만한 복장으로 -그러니까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로- 걸어오는 주비를 보았다.
주비는 시현을 뒤늦게 발견하고 걸음을 옮길까 하는 것 같았다.
몸이 이전처럼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주비의 마음 속의 갈등과 실망감이 어찌나 컸는지 요즘에는 시현에게 괴수의 왕이 되어달라고 조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주비가 힘없이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보고 시현이 주비에게 다가갔다.
주비는 시현이 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고개를 들어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비.”
시현이 주비를 부르고 주비의 곁에서 속도를 맞추며 걸었다.
주비는 자기가 정원을 구한 일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현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시현로서는, 주비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치적을 알리기에 급급한 주비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원과 자신의 감정을 동시에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비를 제대로 바라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시현이 주비를 따뜻하게 바라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주비는 오히려 힘을 많이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주군이 저에게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군을 바라보았다.
주비는 속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주비는 여전히 보빗 대신 시현이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 전에는 자기가 그의 측근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자기라면 다시 세를 규합할 수도 있고 주군을 위해서 뭘 해야 할지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건 글쎄올시다였다.
제 주군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정원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기가 떠나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뒤에서, 멀리에서도 그를 위한 지원은 계속하겠지만 그의 옆자리를 지키기에는 부족해졌다고 생각했다.
시현이, 자기가 입고 있던 남방 단추를 풀어 그것을 주비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너는 상관없다고 하겠지. 너희들은 옷 같은 건 입고 다니지 않으니까. 자연계에서 옷을 지어 입는 건 인간뿐이지. 너희는 이런 걸 이해 못 할 거야. 수치감 운운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을 거고. 하지만.”
시현이 주비의 동그란 어깨를 손으로 쥔 채 주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시선이 너한테 닿는 거.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어지럽혀. 너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하게 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불쾌해져.”
주비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 입어줄래? 싫으면 주비 너만의 옷을 사 줄 수도 있어.”
주비가 고개를 저었다.
옷을 입는 게 싫다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 멍청한 관습이나 규범 같은 건 너희들이나 지키라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주비는 팔을 들어서 남방에 끼워 넣었다.
시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그걸로 옷을 입는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걸어가려고 하는 주비를 보고 깜짝 놀라며 다시 주비를 붙들어 세워야했다.
“이건 셔츠랑 달라서 단추를 끼우는 거야.”
단추를 끼워주면서 시현은 주비의 몸을 확인했다.
서규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몇 차례 자신의 차크라를 쏟아 부었지만 회복되지 않는 곳이 있었다.
“내 차크라에는 회복시키는 능력이 없나봐.”
시현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한 번 더……. 해 주실 수 있어요?”
“어떤 걸?”
“차크라 주입요.”
“도움이 되지 않고 있잖아.”
“걷지도 못했는데 걷고 있잖아요.”
주비가 말했다.
나 때문에 네가 얼마나 많은 걸 잃었는지 안다고 말을 해 주려다가 시현은 그저 주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도움이 된다면.”
시현이 말했다.
주비는 저를 대하는 주군의 태도가 왜 달라진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주비를 위해서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서 시현은 주비에게 차크라를 주입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시현은 주비를 엎드리게 하고 주비의 등과 허리에 두 손을 짚었다.
주비의 몸이 천천히 시현의 차크라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똑같은 몸인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괴수라는 생각에 시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정이 되고 출산을 하면 2세는 어떤 식으로 나와? 주비 너는 처음에 어땠어? 자라는 동안 변화가 컸어?”
시현이 물었다.
“뭐. 이런 식으로 작았다가 거기에서 점점 더 커진 거죠.”
“사람이랑 다르지 않은 거네?”
“네.”
“…….”
“다 나으면 떠날 생각이예요. 제 생각만 하고 주군을 괴롭혔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군의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어요. 제가 꿈꿨던 걸 주군에게 강요한 것 같아서 제가 잘못한 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괴수의 왕이 되더라도 인간과 공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주군이 만들 세상이니까 주군이 선택하고 결정해야죠. 멀리에서나마 힘이 돼 드리고 싶어요.”
오늘 주비가 왜 이러나 하면서도, 눈에 자주 보이던 주비가 이제 영영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분히 감정적이 되었다.
시현은 모로 누운 주비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주비의 몸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주비가 시현의 품 안에 안겼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 주군을 주군으로 여기는 건 나뿐인데 주군의 유일한 신하가 주군의 말을 가장 안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기특하네. 그럼 이제부터 옷은 입고 다닐 거지?”
주비가 시현의 손 아래에서 고개를 저었다.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잖아요.”
또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말이 시현의 가슴에 불을 키운 것 같았다.
주비는 시현의 품 안에서 제 몸이 으스러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시현을 바라보았다.
주비의 입술이 시현의 것으로 덮였다.
***
야나는 주비의 주위를 조용히 돌고 있었다.
주비는 야나를 한 번 바라보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주군을 주군으로 여기는 건 나뿐인데 주군의 유일한 신하가 주군의 말을 가장 안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즉흥적으로 했던 말이었지만 말을 해 놓고 보니 정말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