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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살려둘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놔뒀으면 그 사람들이 레오니드와 미하일을 죽였을 거예요. 두 사람의 캐츠 아이 스톤을 노리고요. 그 다음에는 야로슬라프까지 죽였겠죠.”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아서 겁이 나. 유리 세멘노프가 살아있는 동안 누가 또 그 남자를 만났는지도 모르고 누가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야.”
임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지우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시현이는 엄마에게 안겨있는 게 불편했는지 내려달라고 팔을 저어댔다. 시현이는 바닥으로 내려가자 제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내가 등급을 올리지 못하고 폭주하면. 당신도 나를 막지 못할 거야.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되기 전에 죽고 싶다는 소망밖에 없었어.”
지우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캐츠 아이 스톤을 찾을 거예요.”
“당신은 왜 이런 나를 만나서 고생을 하는 거야?”
“시현이를 낳으려고 그랬나보죠.”
임정의 말에 지우가 웃었다. 임정의 머리에 턱을 가져다 대고 지우가 평화로운 맵을 바라보고 있는데 임정이 소릴 질렀다.
“섰다! 시현이가 섰어요. 혼자서!”
지우가 시현이를 바라보자 시현이는 두 손을 제 아빠의 다리에서 떼고 발에 힘을 주고 서 있었다.
열 개의 발가락은 땅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오므려진 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땅에 주름이라도 잡힐 것 같았다.
“우리 시현이가 혼자 섰네?”
지우도 기특해하면서 시현이를 바라보았다. 시현이는 자기가 칭찬받을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손뼉을 쳤다.
"걷는 것도 이제 금방 하겠네."
지우가 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했고 시현은 내친 김에 걸음을 옮겼다. 두 발자국까지는 성공이었다. 그러고 바로 넘어졌지만 또 일어섰고 한 발, 두 발씩을 계속 걸었다. 맵의 부드러운 바닥에 시현의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그 시간에 늪 위에서는 클랜원들이 모두들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저 집 식구들은 아직 멀었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거래? 레이드 하러 안 갈 거래? 이러고 있다가 쉬운 괴수들은 다른 놈들이 다 채간다고.”
이익헌이 구시렁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지연의 감응기로 지우가 일어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클랜원들에게 소식을 알려준 사람도 익헌이었다. 지우가 깨어난 것을 보고 모두들 늪 아래로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임정과 가장 먼저 그 시간을 같이 나눠야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직 내려가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끼리 가도 충분하잖아요. 그리고 그 얼굴은 영 어색하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좀 바꿔요.”
태인이 잔소리를 해댔다.
"안돼. 이것도 자꾸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해야 지속시간이 길어진다고. 내가 밖에 나갔다가 체포되면 바디 펌은 누가 지키나?"
이익헌은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했다. 남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라고 하면서, 하는 짓을 보면 안에서만 얼굴을 바꾸고 있고 밖에서는 본래의 얼굴로 돌아다니는 게 반복되고 있었다. 강현과 태인은, 저 사람은 바보인 게 분명하다고 자기들끼리 거의 합의를 봐 가고 있었다.
“아짐. 나는 이 얼굴도 좋다고 생각해요. 전보다 훨씬 남자다워보이고 나는 이 얼굴이 더 좋아요. 차크라로 얼굴 바꾸는 거. 저도 알려주세요.”
야로슬라프는 아직도 이익헌을 향한 열렬한 지지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거의 지우를 추종하는 시현이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레오니드와 미하일도 틈만 나면 거기에 합세해서 이익헌을 마구 존경해주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잔뜩 대우를 해 주는 것인데 이익헌의 입장에서 딱히 좋아진 것은 없었다.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내가 좋아했던 건 이 얼굴이 아니라고요.”
때마침 들어오던 선아영이 야로슬라프의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 당장 반박을 하고 나섰다. 레오니드는 미하일의 얼굴을 지적질하면서, 가장 시급하게 기술 전수가 필요한 사람은 미하일이라고 말하고 당장 미하일에게도 그 기술 좀 전수해 주라며 성화였다.
서규태도 갑옷을 입고 일어섰다. 그의 옆구리에는 지우의 차크라에게 입은 상처가 흉터를 남긴 채 아물어가고 있었다.
"자, 자. 어서들 갑시다. 이 괴수들을 다 먹여 살리려면 필요한 캐츠 아이 스톤이 도대체 몇 개야?"
이익헌이 투덜투덜거리면서 일어섰다. 서규태가 그런 이익헌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웃었다. 서규태는 이익헌이 미국의 헌터 협회에서 캐츠 아이 스톤 스물 한 개를 강탈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천기정에게 그것을 떠맡기고 제 수중에 남아있는 캐츠 아이 스톤이 없으니 또 혼자 조급해져서 서두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부지런히 도토리 모을 생각에 정신이 없는 다람쥐 같아서 서규태의 입에서 웃음이 나온 것이다.
***
이익헌이 돌아왔을 때 선아영은 열정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그렇다고 그 방식이 친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선아영은 가슴을 졸이게 했던 대가를 충분히 치르게 해 주었다.
선아영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본 순간 이익헌은 선아영의 손이 날아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락없이 그 일이 일어났다. 선아영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얼얼해진 뺨을 어루만지면서, 한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선아영은 울고 있었다. 맞은 사람은 익헌이었는데 선아영이 울고 있었다.
“바보. 왜 울어. 왔잖아.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잖아.”
익헌이 말했다. 선아영이 익헌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내가 당신을 왜 좋아했는데. 당신같은 사람을 좋아하면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을 줄 알았단 말이예요. 당신은 이기적이고 당신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뛰어나가지는 않을 줄 알았단 말이예요.”
“그래서 어쩌고 싶은데? 물릴 거야? 물리고 싶으면 말만 해. 떠나줄 테니까.”
입을 놀리면서 이미, 이렇게 말을 하다가는 몇 대를 더 맞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떠나줄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면서 입이 혼자서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익헌이 웃으며 말하자 선아영이 익헌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이 정도면 꽤 아픈 수준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익헌이 선아영의 주먹쥔 손을 잡았다. 자꾸 감정이 실리다 보면 좋은 기분은 다 사라지고 이러다가 싸우게 될 것 같았다.
“아가씨. 이제 그만하자. 아프다, 나도.”
익헌이 말하자 선아영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씩씩대면서 익헌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고. 예쁘게 봐줘. 당신 보고 싶었어. 당신을 다시 보게 되면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너를 몰랐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왔어. 그 얘기를 꼭 해 주고 싶었어. 당신이 내 삶을 얼마나 많이 바꿔놨는지.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꼭 행복하다고만 할 수는 없고 당신 때문에 내가 많이 약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런데. 그게 좋더라. 그 기분이.”
선아영의 머리를 제 어깨에 꼭 끌어안고 그가 말을 이어갔다.
“사랑해. 선아영. 너를 보고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이 말을 못하게 될까봐 무섭더라.”
익헌의 어깨가 선아영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당신이 돌아올 거라는 거 알았어요. 당신은 못된 사람이지만 책임감은 있는 사람이니까. 당신을 좋아하는 나를 놔두고 떠나버리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았어요.”
“그렇게 말해봐야 소용없어.”
익헌의 말에 선아영이 익헌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익헌도 선아영을 바라보았다.
“다시 또 그럴 거라고 하면. 그럴 생각인 거면. 그냥 이대로 끝내요.”
“알았어. 바보들도 아니고 다시 또 그런 짓을 당하지는 않겠지. 알았어. 다시는 그런 짓 안 할게.”
선아영이 익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살아돌아왔다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다. 기껏 돌아왔는데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면 속상하겠다고 생각했어. 나한테 화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네.”
몇 번이나 선아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가 말했다.
***
헌터 협회장이 임정을 호출했을 때 임정은 시현과 지우를 놔두고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여러 말로 그의 호출을 피하려고 했다. 치안대장도 이제 재미없게 됐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협회장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메시집니다.”
“무슨 일인데요?”
“정보국을 통해서 입수한 정보예요. 나오는 게 힘들면 제가 갈 수도 있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혼자 가야 되는 건가요?”
“부군과 같이 나오셔도 상관 없습니다.”
“그럼……. 같이 갈게요.”
임정은 잠시 후에 지우와 함께 협회장을 만났다. 협회장은 그런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을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몸은 이제 어떠신가요?”
협회장은 전에 없이 안부까지 챙겼다. 임정은 그런 협회장을 보면서 협회장이 해야 할 말이 어지간히 중대한 일인가보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재촉했다.
“미국 치안대의 특수 전담팀이 꾸려져서 한국으로 급파됐다는 소식입니다.”
“…….”
“타겟은…….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만. 시현입니다.”
“……!”
“저희가 제안하는 것은. 클랜 A가 즉각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겁니다. 신용하씨와 시현이는 치안대와 헌터 협회가 책임을 지고 지켜낼 겁니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죠?”
지우가 물었다. 저절로 임정의 어깨를 안아서 제쪽으로 끌어안게 되었다. 제가 받은 충격도 컸지만 임정의 충격이 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미국측에서는 시현이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한 상탭니다. 저희는 시현이의 신분 세탁은 물론 모든 과정에 관여할 겁니다. 시현이와 신용하씨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말입니다.”
“……. 우리가 시현이하고 연결고리를 남기면 안 된다는 뜻이군요.”
지우가 말했다. 협회장은 자기가 만든 일도 아니면서 지우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출국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 가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미행이 붙어서 그 사람들이 시현이의 존재를 알아내게 되는 상황은 피하자는 겁니다. 시현이는 우리나라에도 중요한 존잽니다.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존재인지 괴수의 숙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뭐. 솔직하게 말해서 헌터도 정상적인 존재는 아니죠. 왜 헌터는 되고 헌터보다 더 특별하고 강한 차크라를 가진 존재는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헌터보다도 더 특별한 존재를 우리가 적대시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미국 정부도, 만약에 자기 나라에서 그런 존재가 발견됐다면 곧바로 적으로 간주해버리지는 않았겠죠.”
협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지우가 임정의 손을 쥐었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우가 물었다.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그럼……. 이대로……. 시현이한테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어요…….”
임정이 말했다.
“피하기만 하자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시현이하고는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게 시현이의 안전을 위해서 좋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두 분이 하셔야 합니다.”
협회장의 말에 임정은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레오니드와 미하일이 시현이를 가까이에서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협회장이 말했다.
"두 사람하고도 얘기가 된 건가요?"
지우가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아마 흔쾌히 승낙할 것 같은데요? 그러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