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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정의는, 누가 쓰러져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감상적인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죠.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고,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 여러분 가슴에 정립하십시오. 누구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 이 싸움이 바른지, 그리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항상 그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하십시오. 어린 분이라도 그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에는, 어떤 것도 장담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빨리, 바르게 결정하고, 흔들리지 말고, 여러분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위해 싸우십시오. 당신들의 생에, 건투를 빕니다.”
임정은 두 손을 들고 그들을 격려하는 박수를 쳐주었다. 건투를 빌며 치안대원과 헌터들, 각 사람을 치하해주는 의미였다. 그곳에 있던 헌터들이 같이 박수를 쳐주었다.
“한국 정부는 입장 발표를 하지 않습니까?”
미국인 기자가 물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책임진 기관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가진 대표성에 의심을 품은 질문입니까?”
임정이 물었다.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OO 신문 XXX 기잡니다. 치안대장이 신분을 밝힌 것은 이례적인데 신분을 밝히기로 결심을 한 데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심경의 변화랄 것까진 없고. 내가 치안대장이라는 걸 알고 나를 공격하려는 바보는 없을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클랜 A를 꼭 해산해야만 하는 겁니까? 한국에 있는 1급 늪들이 성장하기 시작하거나 오픈이 되면 그때 클랜 A가 나서줘야 하지 않을까요?”
기자의 질문에 임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 말을 집중해서 듣지 않은 모양인데. 기자님을 이해시키자고,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하는 건 낭비일 것 같습니다. 자. 쓸 기사들 많이 건지셨죠? 치안대장이 누군지도 알았고 클랜 A가 해산한다는 것도 알았고. 그럼 우리도 해산하죠?”
임정이 먼저 말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기자들은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겨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원고를 보내기 위해서 혈안이 돼 있는 표정들이었다.
강현과 태인이 임정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국 정부를 겨냥하고 말을 한 거였으면서 너무 에둘러서 말한 거 아니예요? 멍청한 애들은 못 알아들을 것 같아요.”
강현이 말했다.
“멍청한 애들한테 상처입히고 싶진 않아서.”
“뒤에 한 말은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따라왔다 죽은 헌터들을 두고 한 말이죠?”
태인이 물었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거라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사람을 지키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한테는 적이 되는 거니까요.”
임정의 말에 태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같이 차에 올랐을 때 태인이 운전석에 앉은 것을 보고 강현이 웃었다.
“태인이 형이 운전석에 앉아있는 걸 보니까 굉장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드네요. 누나 지바겐 생각도 나고.”
태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익헌 부사장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살인을 저지른 게 밝혀지긴 한 거잖아요.”
태인이 말했다. 그러자 임정이 웃음을 지었다.
“사체 운반 헌터팀이 론 디어를 쫓을 때 일. 기억 안 나요?"
“네?”
“론 디어는 자기 차크라로 얼굴을 바꿀 수가 있었죠. 지속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레이드를 하는 동안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었죠.”
“그랬었죠. 그렇게 도망다닐 거래요?”
태인의 말에 임정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그게 생각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안 거래요?”
“블랙 호크 트리플 조종사가 부지런히 입을 놀려댔으니까요. 해리의 해변 별장에 자기가 클랜 A를 태워다줬다고 말했나봐요. 방송사 관계자한테요.”
“그런데 그 블랙 호크 트리플 조종사는 어떻게 했어요? 가만히 놔둬도 되는 거예요?”
강현이 묻자 태인이 강현을 바라보았다.
“기사 못 봤냐? 그 사람도 죽었다던데?”
“그 사람이 죽은 게 기사에 나와요? 왜요?”
“클랜 A의 블랙 호크 트리플 조종사였다는 이력이 특이해 보였나보지.”
“저기에서 꺾죠. 앞에 사고난 모양인데.”
임정이 말했다. 클랜 A에서 손에 사람의 피를 묻힐 일이 생기면 그건 자신의 전담으로 하자고 했던 이익헌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이익헌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 많은 느낌이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그 일은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문득 문득 웃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들어준 평화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처는 어때요?”
태인은 임정의 움직임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이상하죠? 처음에는 이런 게 정상적이었던 건데 헌터가 되고 차크라를 운용하고 어느새 나는 아픔을 오래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돼 버렸어요. 나는 지우씨가 내 상처를 알아보고 괴로워할까봐 걱정돼요.”
임정이 말했다.
“도대체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런 게 걱정될까요? 나같으면 화가 날 것 같은데.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었냐고 할 것 같고.”
태인이 말하자 임정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우씨는 나한테 오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간 거죠.”
“나는 지우가 걱정되지 않아요. 시현이도 그렇고요. 우리가 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태인이 말했다.
“고마워요.”
임정이 웃으며 말했다. 임정도 사실,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클랜 A는 어떻게 될까요?”
강현이 물었다.
“지우씨가 깨어나면 우리는 같이 레이드를 하러 떠날 거야. 아마 시현이랑 같이 살지는 못할 것 같아. 그건 지우씨 생각이기도 하고. 대통령이 시현이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을 때 마음을 정한 것 같았어. 우리가 시현이하고의 연결 고리를 끊어줘야 시현이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우리라는 게 누나랑 지우형만 말하는 건 아니죠?”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숨어 살자고 말할 수는 없어.”
“그건 누나 생각이죠. 지우 형은 누나만의 지우 형이 아니라고요. 지우 형이 가는 곳에는 나도 따라 갈 거예요. 캐츠 아이 스톤은 원래 내 눈에 더 잘 띈다고요.”
강현이 말했다.
“나도 눈치없이 들러붙고 싶지는 않지만 강현이랑 같은 생각이긴 합니다. 지우는 내 지우이기도 하거든요.”
태인이 말하자 임정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을 기다리면서도 먼저 부탁을 하지는 못한 자신의 사정을 두 사람이 알아준 것 같아서 고맙기도 했다.
***
이익헌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하여간. 웃기는 사람들이라니까.”
그가 밑도 끝도 없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야로슬라프만이 제 생명의 은인에게 열심히 눈을 빛내가면서 부담스러운 관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뭐가요, 아짐? 뭐가요?”
“이 사람들 말이야. 내 몸에 폭탄이 들어있다고 뻥쳤거든. 자기들이 스위치를 하나씩 다 나눠가지고 있어서 내가 조금만 허튼 수작을 하면 나를 날려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뻥이었다고요?”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그래. 내가 해리랑 라미실을 해치우고 거기에서 같이 끝내려고 스위치를 눌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이익헌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강현과 태인의 안색은 검게 변했다.
“왜 그래?”
이익헌이 물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처음부터 나를 믿어줬던 거였으면서, 그랬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지? 괜찮아. 나도 이제 다 안다고. 그런 망나니 같던 시절의 나를 믿어준 것도 고맙고.”
“아닐 거예요. 설마. 아닐 거예요. 제가 눌러볼게요!”
강현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미 제 스위치까지 꺼내고 있었다. 태인도 강현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이건 명백히 사기지. 아니. 살인 방조지. 누가 그랬다는 거야? 안지우가? 안지우 그 쓰레기가? 말도 안 돼. 나는 이 스위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줄 알았단 말야! 그것만 믿었다고. 아니 그랬으면 내가 이 살인자랑 어떻게 같이 지냈겠어?”
태인이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써전님! 써전님은 알고 계셨던 거예요?"
“제가 눌러볼게요.”
강현이 스위치를 손에 잡자마자 이익헌이 몸을 날려 강현의 스위치를 빼앗았다. 좋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이제는 각자의 얼굴색이 전부 바뀌어 있었다. 이익헌의 얼굴은 거의 창백해졌다.
“아니야. 알았어. 착각이었나봐. 하긴. 너희들이 나를 쉽게 믿어줄 놈들이 아니지. 써전 스위치만 불발이었던 건지도 몰라. 징한 놈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감격했잖아. 내가 감격했던 거 다 물어내라고!”
태인은 스위치를 슬며시 뒤로 돌리고 저도 돌아서서 스위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익헌은 태인의 스위치까지 강제로 압수했다.
“이 인간들 진짜! 그러지좀 말라고. 이제 당신들 차크라 숙련도면 내가 당신들 영역에 몰래 침입하는 것도 불가능하잖아. 그만해, 이제!”
이익헌은 거의 광분한 상태로 소리쳤다.
“아, 정말 그러겠네요.”
강현이 태인을 바라보자 태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동안 괜히 들고 다녔던 거네. 무거운 걸.”
태인이 말했다. 이제는 그게 분하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800그램정도밖에 안 나가겠다. 1킬로도 안 돼!”
이익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기가 식은 땀을 흘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지만 야로슬라프가 손등으로 땀을 닦이주었다.
“많이 놀랐나보네요, 아짐.”
***
그날은 유달리 햇살이 따뜻했다. 가까이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이의 웃음 소리가 꽤 멀리에서 들려 임정은 깜짝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 늪이 시현이를 보호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멀리까지 간 것은 아닌가 해서 걱정이 된 것이다. 몸을 갑자기 일으키느라고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임정은 몸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우의 차크라에 찔렸던 곳들을 확인하자 상처가 사라져있었다.
임정의 몸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지우가 누워있던 곳이 비어 있었다. 임정이 일어서자 시현이의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곳에 지우가 있었다.
“지우씨…….”
임정의 목소리에 지우가 임정을 돌아보았다. 지우가 시현이를 안고 환하게 웃으며 임정에게 다가왔다.
“언제 깼어요?”
“나. 오래 잤어?”
지우가 물었다.
“오래 잤냐고요?”
어이가 없어서 임정이 얼굴을 찌푸리자 지우가 시현이를 안겼다. 임정은 시현이를 안으면서 지우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걱정을 끼치고 일어나서 너무 태연하게 말을 하는 모습을 보려니 심술이 나려고 했다.
“기분은 어때요?”
“당신이 데려와줬어?”
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지?”
시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지우가 말했다.
“우리가 같이 사는 거요?”
“응.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내가 멈출 수 있을지 모르겠어. 시현이한테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나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어. 이따위 세상은 필요가 없다는 생각 뿐이었어.”
임정이 지우에게 다가가 지우에게 안겼다. 지우는 제 품에 들어온 두 사람을 같이 안았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죽었어요. 해리와 라미실도 죽었고요.”
"누구한테?"
"론 디어요."
“……. 우리가 심한 일을 시킨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