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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아아. 저를 탱커님으로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강지연이라고 합니다. 바디 펌 소속이고요. 클랜 A에도 기웃거리고 있고요. 시현이 때문에 강현씨랑 급하게 나왔죠.”
지연이 서둘러 말했다.
“어디에서요?”
“미국에서요. 시현이가 거기에서 태어났거든요.”
지연은 한꺼번에 말을 해 버릴까 하다가 속도 조절을 하기로 했다. 이 남자는 지우로부터 아직 시현에 대해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상태였고, 시현이 스스로 매력 발산을 해서 자신의 마력으로 꽁꽁 묶어버릴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된 다음에는 이 남자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게 될 거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지우 이 자식. 샌님처럼 굴기만 해서 여자 하나도 제대로 못 사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처음 만난 여자가 진국이어서 다행이네요. 아, 처음 만난 건 아니지. 아니다. 그건 뭐 그냥 스친 거고. 자. 자. 그건 그렇고. 그래서 우리 안지우가 왜 아기를 저한테 보냈을까요? 아기를 낳고나니까 이 형님한테 아기를 보여줘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든 건가? 아하하하하.”
강현도 용하를 보고 따라 웃었다. 자기를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뜻이 아니라는 건데.
용하는 혹시 힌트 좀 줄 생각이 없냐는 표정으로 지연을 바라보았지만 지연도 미안하게 됐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뭐.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말하겠죠. 그럴 거죠? 지금 미국에서 오는 거라고요? 식사들은 하셨어요? 어이. 꼬맹이. 너는 뭘 먹냐? 삼촌이랑 처음 봤는데 삼촌이 뭘 해 주면 좋을까?”
“오면서 차 안에서 분유 먹었어요. 두 시간은 잠잠할 거예요.”
“삼촌한테 와 봐.”
용하가 아기에게 말했다.
아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굴고 있지만 아기를 나한테 넘기라고 지연에게 말을 하는 중이었다. 아기가 매개로 끼면 대화가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싸운 부부처럼, 상대에게 할 말을 아기를 거쳐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을 몇 주 동안 겪었기에 강현과 지연은 서로 바라보면서 웃기만 했다.
“아, 잠깐. 삼촌이 손 좀 씻고 올게. 씻긴 했는데 아기를 만지려면 비누로 빡빡 씻어야 되겠다. 잠깐만 기다려. 다른 데로 가면 안 된다.”
용하가 욕실로 튀어들어가는 걸 보고 지연과 강현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지우 형이 말했던 거랑 똑같은 사람 같아요.”
강현이 말했다.
사실 지우는 용하에 대해서 별로 말을 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우가 용하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걸 들으면서 만들어진 용하에 대한 상이 있었다.
지우는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리액션이 즉각적이라거나 풍부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 입을 열어서 한 마디를 하면 그런 말은 오래오래 기억이 되었다. 특히나 지우가 용하에 대해서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지우를 알아온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다 알 수밖에 없었다.
지우에게서 남 얘기가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 천기정과 신용하였다.
천기정은 이제 자주 마주치기도 했고 한 솥밥을 먹게 된 사람이니 만나고 싶다거나 궁금하다거나 그런 감정이 다 사라졌는데 신용하는 너무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너무 신비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현은 동그랗고 새카만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혼자서 목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호기심만큼은 어른들 못지 않은 것 같았다.
지연은 이제 제법 아기를 잘 안았다. 목이 툭 꺾이지 않도록 아기 뒷통수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방법도 완전히 숙지한 모습이었다.
신용하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아기가 그렇게 긴 비행을 해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지연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클랜 A 소식은 나도 듣고 있거든요. 러시아에 갔다가 미국으로 갔다가. 아. 그러고보니까 내가 지우 보면 사과하고 용서받을 일이 하나 있긴 한데. 기자 쓰레기놈들이 지우에 대해서 얘길 좀 해 달라고 밤낮없이 회사로 찾아오는 바람에 얘기를 좀 해 준 건데. 나는 기사가 그런 식으로 나갈 줄은 몰랐어요.”
말을 하는 폼으로 봐서는 용하 때문에 지우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사가 나간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지연과 강현의 눈이 빛났다. 그런 거야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이익헌의 말마따나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을 들게 해 놓으면 그 뒤의 협상은 쉬워진다는 것을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그 일로 지우 형이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긴 했죠.”
강현이 말했다.
“정말요? 나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니었거든요. 아우, 근데 그 기레기 새끼들이! 내가 신문사에 전화를 해서 따지고 정정기사를 내라고 했는데 고칠 게 없다는 거예요. 아니. 사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나는 친근함의 표시로 한 말을 그냥 그렇게 아우! 지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네. 그런데 이 자식한테 전화를 할 수가 있어야죠. 기사보면 지우가 항상 바쁘기만 한 것 같아서. 항상 레이드를 하고 위험한 괴수를 상대로 싸우고. 그러니까 내가 전화를 했다가 지우를 위험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못하겠더라고요. 한 번 들어가서 싸우면 여섯 시간, 여덟 시간, 그렇게 걸리나 보던데.”
용하는 마구 참회를 했다.
어느새 2층 난간에 세진이 내려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자기를 소개해 줬으면 하는 것 같아서 용하는 분풀이를 하는 겸 일부러 못 본 척했지만 시켜 먹을 게 생각나서 세진을 불렀다.
“야. 신세진. 거기에 있지 말고 뭐라도 내 와봐. 오빠 손님들 오신 거 안 보이냐? 냉장고에 과일이랑 쥬스도 있을 테니까. 아. 커피 드실래요? 뭘 드실래요? 쟤 있으니까 마음껏 시켜 먹으세요. 아, 참참. 지우가 혹시 쟤 때문에 보낸 거예요?”
용하의 얼굴에, 그날 들어 가장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드디어 신세진을 집에서 치워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 짐짝 때문에, ‘오빠, 나 집 앞인데 문 열어줘.’라는 톡을 받고도 돌려보내야 했던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말을 듣자마자 세진이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오다가 갑자기 조신하게 걸었다.
강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호기심을 보였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은 놓쳐서 지금은 뒷모습만 보이는 상태였다. 문을 열어주러 나왔을 때는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느새 모자를 벗고 있었다.
세진은 냉장고를 열어서 과일을 쟁반에 담고 쥬스를 꺼냈는데 뒷모습만 보면서 앞 모습을 상상하는 그 짧은 시간이 수 십 시간처럼 느껴졌다.
“저기…. 나는 커피 좀 마셨으면 하는데. 혹시 괜찮으면.”
강현의 사정을 눈치챈 지연이 말하자 세진이 고개를 돌려 지연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웃어버렸다. 천기정이 지우에게 준 사진을 본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게 훨씬 더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엽다!’
강현은 그때부터 계속 웃었다. 얼굴이 기본적으로 그렇게 세팅된 것처럼 얼굴에서 한동안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용하는 쾌재를 불렀다.
지연은 강현을 보면서 재미있어 했다. 이제는 볼까지 제법 붉게 물들이는 강현을 보자니, 얘도 어린 앤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한 채 괴수들을 상대해 오면서 훈련에 훈련만 거듭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 것이다.
마침 그때 시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 녀석도 헌터가 되면 자잘한 즐거움들은 느끼지 못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시현은 호기심 왕성한 표정으로 제 위에 있는 것들을 보려고 눈을 한껏 치떴다.
“그렇게 보지마. 못생겨지잖아.”
지연이 시현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이마에 생긴 주름을 판판하게 펴 주고 시현이 다른 곳들을 볼 수 있도록 방향을 틀어서 앉아 주었다. 시현은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 용하의 집을 보았다.
시현의 입 모양은 기본적으로, ‘오’ 모양으로 세팅이 되어 있었다. 윗입술의 중앙은 항상 부풀어 있었고 부풀음의 극에 달하면 입술 표피가 떨어졌다. 분유를 먹느라고 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지우와 임정은 그것들을 버리지도 않고 전부 모았다. 그럴 때 보면 부모의 사랑이라는 건 좀 끔찍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지금도 시현은, 입을 ‘오!’ 모양으로 오므리고 땡그란 눈을 열심히 굴리는 중이었다.
“다른 분은요?”
세진이 물었다. 금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따로 없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용하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무슨 저런 개 사기가 다 있단 말인가. 여자들은 다 저렇게 변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 자기가 만난 여자들도 집에서 혼자 있을 때는 쓰레기처럼 퍼져 있다가, 자기를 만날 때만 다소곳하고 섹시한 자세로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는. 네. 저도 커피요. 쥬스가 편하시면 쥬스로 주셔도 되고요.”
강현이 말했다.
“야. 신세진. 냉장고에 있는 쥬스 가져오지 말고 씽크대 옆에 블렌더 있으니까 오렌지 까서 갈아와봐. 그게 더 맛있어. 옆에 시럽 있으니까 그거 세 번 정도 펌핑해서 넣고. 냉동실에서 얼음 여덟 개 꺼내서 넣고. 그렇게 하고 8초 정도 돌리면 돼. 시간 잘 재라. 8초 넘어가면 씹히는 감이 없어지거든.”
세진은 낯선 사람들 앞이라 화를 내지도 못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머리로 피워올렸다.
“아아아아아아.”
시현까지 잔소리 대열에 합류하는 것처럼 소리를 냈다. 아직 옹알이를 할 단계는 아닌데 소리를 내는 게 신기해서 지연은 그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시현이도 마시고 싶어? 맛있을 것 같지? 그래도 안 주지.”
용하는 머리를 굴렸다. 이 사람들이 웃는다고 멍하니 그냥 같이 따라 웃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드디어 신세진을 데려가기로 한 거야. 천 대리님이 말씀을 잘 해 주신 거고. 안지우가 옛 정을 잃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네. 그래. 신세진은 이제 이 집에서 나갈 거고. 나는 드디어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거야.’
일단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웃음이 실실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리는 거야.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힘들겠지만 시현이랑 하루만 같이 있어봐도 시현이하고 헤어지는 걸 생각하지도 못하게 될 거야. 그리고 정말 좋은 조건이니까. 시현이를 일 년만 키워줘도 삼 사십 년 뼈빠지게 일해서 버는 것보다 더 벌 수 있을 텐데.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 아들 키워주는 일이고. 육아가 어렵기는 하겠지만 지나고 나면 다 잘 돼 있겠지.’
지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세진이 클랜 A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클랜 A에 확실히 활기를 불어넣어주기는 하겠네. 웬만하면 레이드는 빠지게 하는 게 나으려나? 에이. 그래도 가르쳐가면서 써야 되는 건가? 클랜 A에 들어오고 싶다는 건 헌터로서 크고 싶다는 걸 텐데. 가르치기는 해야겠지? 그러면 내가 사수가 되겠지? 재미있겠는데? 계속 내 뒤만 졸졸졸 따라다니겠지?’
강현의 생각이었고,
‘세상에. 진짜 클랜 A에 들어가는 거야? 내가 한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나를 미친 사람 취급만 했는데. 정말로? 정말로 내가 클랜 A에 들어간다고?’
그것은 세진의 생각이었다.
각 사람이 다른 꿈을 꾸었다. 드디어 세진이 쟁반을 들고 왔다.
“김강현. 가서 받아줘. 나는 시현이 들고 있느라고 바쁘잖아.”
지연이 말했다.
역시 김강현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지연뿐이었다. 강현이 벌떡 일어나서 세진에게 다가가자 세진은 훤칠하게 큰 강현의 키에 놀라는 것 같았다.
멀리서 눈대중으로 가늠했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