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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용하씨가 받아들여 줄까요? 용하씨가 해 준다고만 하면 그 열 배를 주는 것도 상관없고 몇 천 억을 주는 것도 상관없지만. 용하씨한테 여자친구는 없어요?”
임정이 물었다.
“오래 만나는 여자는 없는 걸로 알아. 그리고 용하는 원래 결혼 생각이 없었어.”
“어머. 왜요?”
“주위에 다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만 있어서. 연애의 결과들도 다 안 좋았고.”
그 사실에 변함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지우가 말했다.
시현은 머리 위에 앉으려는 파리를 쫓으려고 차크라를 모았고 파리는 깜짝 놀라서 꽁무니를 뺐다.
그런 시현을 보면서 두 사람은, 자기들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식을 보면 걱정을 떨칠 수 없는 게 부모이기는 했지만 시현에 관해서만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시현이 떠나기로 한 날의 하루 전이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차크라 회복을 핑계 삼아서 거의 모든 시간을 시현의 곁에서 머물렀다. 시현은 그 대단한 차크라를 파리를 쫓는데나 쓰고 있는 중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결이 흐르듯이 부드럽게 출렁이는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지우는 한없이 시현을 바라보았다.
“오래 못 볼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도 한 달에 두 주는 한국으로 들어가는 걸로 하죠. 캐츠 아이 스톤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레이드만 하다가 죽을 것도 아니고.”
서규태가 말하자 모두들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보름만 있으면 시현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하고 나니 이별을 대하는 자세도 훨씬 편해졌다.
“내일부터는 또 레이드, 레이드, 레이드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태인의 목소리에는 왠지 기대감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기다려온 것 같다.”
이익헌이 말하자 태인이 해죽 웃었다.
“솔직히 기대돼요. 탱커님도 복귀하고 야로슬라프 형도 점점 실전에서의 감이 무르익어가고 있잖아요. 이제 우리가 체력 4억짜리 1급 괴수를 만난다고 해도 그 녀석들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반나절이 안 돼서 끝낼 수 있어요.”
“원래 반나절이 안 돼서 끝내야 하는 거야. 라미실이랑 해리가 계속 죽을 쑤는 건 반나절을 넘겨서 그러는 거고. 그러니까 매번 체력을 거의 다 바닥내 놓고도 괴수 체력이 리셋이 되잖아.”
이익헌이 말했다.
“아, 그 사람들. 요즘에도 연락을 하고 있기는 해요?”
“아니. 가까이 해 봤자 좋을 게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자꾸 도와달라는 말만 하니까 거절하는 것도 지쳐서 말이야.”
이익헌의 말에 모두들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한테 쓴 캐츠 아이 스톤은 정말 아까워요. 그 사람들한테 쓸 게 있었으면 차라리 우리한테 주는 게 좋았을 텐데.”
강현이 말하자 지우가 강현을 바라보았다.
“혹시. A급 헌터가 되고 싶어?”
“아뇨. 아뇨. 두 사람이 A급 헌터로서 너무 못 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그런 거였어요.”
강현은 땀을 찔찔 빼면서 말했다.
이제 클랜 A에는 지우와 야로슬라프라는 두 명의 A급 헌터가 포진해 있었고 서규태, 이익헌, 임정, 태인과 강현까지 다섯 명의 B급 헌터가 있었다. 임정의 복귀로 당분간은 이익헌이 팔을 갈아 끼워가면서 탱커와 딜러의 역할을 오고갈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딜에 전념을 하고, 임정도 소박한 공격력이기는 하지만 데미지를 입힐 수는 있으니 한 번의 공격으로 클랜 A가 괴수에게 입힐 수 있는 데미지는 일반 공격대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지우의 공격력이 2000이었고 야로슬라프의 공격력은 1200이었다. 그리고 임정을 제외한 B급 헌터들의 공격력은 1000이었고 탱커인 임정의 공격력은 250이었다.
그들의 차크라 등급은 누구 할 것 없이 이제 전부 1등급이었고 차크라 숙련도도 100퍼센트까지 끌어 올려진 상태였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항상 두 배의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거기에 선아영의 익스트림 헌터가 최근에 공격 증폭률을 800퍼센트까지 끌어올린 무기의 개발에 성공을 했고 그것으로 클랜원들의 후방을 빵빵하게 지원해 주었다.
지우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2만에 가까운 데미지를 입힐 수 있게 되었고 강현의 증언대로 이제 2초에 다섯 번의 공격은 확실히 성공시키는 정도에 이르렀다. 1분동안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면 괴수에게 입히는 데미지가 거의 3백만이었다. 이제 5급 늪의 괴수를 상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오히려 더 오래 걸릴 터였다.
야로슬라프는 1분에 7만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지만 차크라를 모으는데 걸리는 시간을 빠르게 단축시켜가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강현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차크라를 모으는데 꼬박꼬박 7초나 기다리는 헌터가 클랜 A에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이, 야로슬라프가 차크라를 모을 때마다 바라보곤 해서 야로슬라프도 이를 악물고 훈련을 했던 것이다.
야로슬라프는 설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괴수의 차크라를 받은 사람인만큼 레이드 도중에 지치지 않아서 그 점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레이드의 후반에 이르러 다른 헌터들이 조금씩 체력과 차크라의 한계를 느낄 때도 야로슬라프는 지우와 똑같이 페이스를 맞춰나갔다. 그러면서 지우가 하는 것처럼 이제는 자기도 슬슬 공격기회를 만들어 줄 줄도 알게 되었다.
야로슬라프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 그 때였다. 야로슬라프는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한꺼번에 많은 차크라를 소모하고도 지치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이제는 지우에게까지도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일단 그렇게 되기만 하면 지우는 다시 무지막지한 딜을 퍼부으면서 괴수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가 있었다.
클랜원들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두 사람만 팀을 이루어다녀도 웬만한 상급 괴수들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였다. 다른 클랜원들도 30분 정도 부지런히 딜을 넣다보면 괴수에게 2백만 정도의 데미지는 입혔다. 이제는 각자가 능히 하급 늪의 괴수들을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각 사람이 훈련을 열심히 한 것도 큰 몫을 차지했지만 선아영의 공로가 컸다. 바디 펌을 통해서 좋은 재료를 제공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아영이 일머리를 잡아 쥐고서, 무기의 공격 증폭률을 높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지 않았다면 지금의 클랜 A의 전력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벌어들이는 익스트림 헌터의 수입도 대단해서 익스트림 헌터는 이제 세계 헌터 무기 시장의 구조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공격증폭률 350퍼센트가 한계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750퍼센트, 800퍼센트라는 말을 들려주면 헌터들은 그냥 미쳤다. 누가 그러지 않겠는가.
익스트림 헌터의 시장이 계속해서 자라게 되면 나중에는 A급 헌터가 되고 싶다는 의욕마저 스스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무기를 갖추는 것만으로 A급 헌터가 된 효과를 볼 수 있다면 누가 캐츠 아이 스톤을 낭비해 가면서 A급 헌터가 되려고 하겠는가. 그것은 장기적으로 클랜 A에게 좋게 작용할 터였다. 캐츠 아이 스톤을 탐내는 경쟁자가 줄어들면 그들은 편하게 캐츠 아이 스톤을 모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전력이다보니 괴수의 체력이 4억이니 6억이니 한다고 해도 겁이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1급 괴수들에게서 변칙적인 특성들이 나타난다는 게 문제였다. 그동안 발견되었던 맵들 중에도 위험한 맵들이 다수 존재하기는 했지만 맵의 지형과 기후를 이용하고 주관하는 괴수들이 나타나면서 특이한 공격으로 헌터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런 괴수들이 머무는 맵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고, 그런 경우에는 클랜 A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맞닥뜨리게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미 계약은 이루어졌고 그 계약은 파기될 수 없었다. 미국 정부와 한 계약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운명과의 한판 승부였다.
***
휴일 아침.
오랜만에 곤하게 자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열 시도 안 됐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잠을 깨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신용하는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해 보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려고 일어나서 늘어난 트렁크를 입고 밖으로 나갔더니 세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집 안에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 제발 신경 좀 쓰라고 지랄이었다.
‘아니! 남의 집에 들어와서 얹혀 사는 주제에?’
그래도 자기 복장이 너무 난감했던 것 같기는 해서 앞섶을 두 손으로 예쁘게 펴고 판판하게 정리를 했다. 그러자 그건 또 웬 해괴망측한 짓이냐고 한 번 더 지랄을 한다.
“아, 씨발아! 나 착한 사람이야. 착한 사람. 자꾸 건들지 마. 네가 내 사촌동생이지 우리 엄마냐? 이런 조카 십팔색깔 크레파스 같은 걸 그냥 확!”
“문 열어 주려고 나온 거면 그대로 다시 들어가는 게 좋을 걸? 내가 문 열어 줬고, 오빠가 그런 꼴로 나올 것 같아서 2분만 있다가 들어오시라고 했고, 밖에 있는 분은 여자분이야.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옆에는 젊은 남자도 있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 보려고 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 오빠 아이를 낳은 여자가 오빠한테 아이를 맡기고 젊은 애인이랑 새 삶을 찾으러 가기로 한 건가봐.”
세진은 태연하게 말을 하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집에서 모자 좀 쓰고 다니지 말라고! 집에서 왜 모자를 쓰는 거냐고!”
용하는 이제 괜히 세진의 모자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머리 안 감아서 그런다. 오빠하고만 있으면 상관없지만 밖에 있는 손님들이 무슨 죄야? 나는 머리 감으러 갈 거니까 오빠는 바지 좀 입어!”
그렇게 말하고 세진은 아예 달음박질을 쳐서 사라졌다. 신용하의 머릿속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오빠 아이를 낳은 여자가 오빠한테 아이를 맡기고 젊은 애인이랑 새 삶을 찾으러 가기로 한 건가봐.’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충분해. 충분해. 술에 떡이 돼서 쓰러졌다가 일어나면 숱한 여자들이 자기 배를 깔고 같이 자고 있었고 그때마다 어른놀이를 한 흔적들이 질펀하게 남아있곤 했었으니까.
신용하는 두리번거리다가 대충 바지를 꿰입고 거울 앞으로 달려가서 머리 모양을 수습했다. 끔찍한 입냄새를 무마해보고자 찬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욕실로 달려가 얼굴에 물을 묻히고 두다다다 거실로 나오는데 벌써 그들이 들이닥쳤다.
아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아는 얼굴이랑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여자가 안고 있는, 주먹만한 얼굴에 모자를 얹고 있는 꼬맹이 정도였달까.
“저건. 안지우다!”
안지우를 기계에 집어 넣어서 축소시켰다가 다시 빼고 그 풍요로운 머리카락을 송송송 뽑아 놓으면 저런 얼굴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드는 얼굴이었다.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의 방문객이 같이 웃었다.
“이 얼굴을 보고 지우 형 아들이라는 걸 알아보는 게 더 신기하네요.”
남자가 말했다.
“김강현입니다. 지우 형 클랜에 소속된 헌터예요. 간단하게 말해서 안지우 추종자죠.”
쑥 팔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데 헌터 타투가 있을 뿐만 아니라 B급이었다.
“B급…이네요?”
용하는 경탄하는 표정으로 강현을 보며 말했다.
“네. 클랜 A에서 쩌리를 담당하고 있어요.”
강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얘가 지우 아들이라고요? 지우는 어디에 있고요? 우리가 길이 자꾸 어긋나는 바람에 이제야 뵙게 되네요. 지우 친구 신용합니다.”
용하가 지연을 보고 활짝 웃으며 제 소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