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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거기에 우락부락한 팔.
패션의 완성인 헌터 타투.
그것도 B급.
세진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이리저리 구르면서 강현을 스캔하는 동안 강현은 제 아래에서 긴장한 채 방황하는 세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으악, 귀여워!’
이렇게 생긴 애의 축소판을 만들어서 침대맡에 놓고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내둘렀다. 이제는 상상 속에서만 만들던 세상을 밖으로 끄집어낼 때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축소판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의 아이를 마주 바라보고…….
‘아, 그 다음은 상상을 못 하겠다.’
강현의 애정관을 쌓아올려준 지식의 근간은 9할이 야동이었다. 강현은 그게 현실 세계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컵의 끝까지 채운 커피가 잘분잘분하게 찰랑거렸다. 그것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서툴고, 남들 앞에서 잘 보이고 싶어서 자꾸만 자기 모습에 신경쓰는 세진을 보면서 강현은 자기도 얼마전까지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묵묵히 믿어주면서 조용히 기다려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세진과 똑같은 모습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진도 세진 나름대로 부지런히 강현을 뜯어보고 있었다. 용하 오빠가 안지우와 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일단 말은 해 놨으니까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기약도 없는 걸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슬슬 걱정이 되는 중이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몇 주 전부터는 괴수 사체 운반일을 하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 느낀 건, 자기한테는 인복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거였다. 써전은 자기 팀에 고정으로 불러주겠다고 하면서 세진에게 따로 만나자고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줄 보너스를 세진에게 줄 수 있다고도 했고 자기가 지금은 쓰지 않는 무기가 몇 개 있는데 집에 오면 그걸 주겠다고도 했다. 세진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례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거절했지만 써전은 세진에게 화를 냈다.
사회 생활을 할 줄도 모르는 새파란 것들이 헌터 타투 생겼다고 사회에 발을 들이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을 모른다면서 멍청하다고 하기도 했다. 세진은 써전이 잘못하고 있는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런 말들에 일일이 상처를 받게 되었다. 가장 싫은 것은, 써전이 내뱉은 그 말들로 인해서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게 된다는 거였다.
나는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을 모르는 멍청이인가 보다, 사회생활을 할 줄도 모르는 새파란 헌터인가 보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꾸 안 좋은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계속해서 그런 식의 평가만 받다 보니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런 때 상의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독일에 있는 부모님에게서는 당장 다 그만두고 돌아오라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 십 통씩 왔다. 그래서 더더욱 주위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세진이 그런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집에서는 난리가 날 거였다. 클랜 A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당장 헌터 일을 때려치우고 싶었을 정도였다.
지금은 써전을 바꾸고 매일매일, 그때마다 나오는 늪을 찾아가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전혀 재미가 없었다. 혼자서 매일 훈련을 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용하 오빠. 혹시 클랜 A에서 연락 왔어?’
그 질문을 용하에게 매일 했지만, 시원하게 답을 해 줄 수 없는 용하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천사들처럼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 중에 한 사람, 아기는 정말로 천사같았다.
게다가 같이 들어온 남자는, 그 사람이 맡은 역할만으로도 이미 점수를 엄청나게 따고 들어간 거라서 오크같이 생겼다고 해도 좋게 보였을 텐데 보기 좋은 얼굴에 비현실적인 근육질 몸매로 다져져 있었다. 이제 세진은 운명적인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이 된 심정으로 그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낙관적인 생각으로 가득찼다. 거절하는 말을 하려고 그 먼 곳에서 두 사람이나 왔을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신세진씨는 나랑 바로 미국으로 가서 클랜 A에 당장 합류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거죠?”
강현의 입이 열렸고 거기에서 분명히 그런 말들이 나왔다.
세진은 놀란 얼굴로, 초면에 그런 모습을 보여서 정말로 미안했지만, 턱이 거의 빠진 얼굴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는 것 같네.”
지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아아아.”
시현도 말했다. 세진은 감격에 겨워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용하야말로 그 감격을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지우가 자신의 절친이라고 말을 해도 안 믿어주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렇게 친한 친구가 클랜 A의 클랜원이라면 돈을 포크레인으로 퍼다 나를텐데 너한테는 뭘 해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내 친구도 아직은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니까. 그리고 헌터 무기가 얼마나 하는 줄 알아? 장비랑 갑옷은 또 어떻고. 그리고 우리 지우는 낮은 등급 괴수들은 상대를 안 하고 상급 괴수들만 상대로 싸우니까 그게 더 많이 필요하잖아. 그러려면 갑옷도 자꾸 찢어지고 그러겠지. 무기도 닳을 거고. 그래서 그런 거지, 뭐. 그리고 친한 친구라고 꼭 뭔가를 해 줘야 되는 건 아니잖아? 마음으로 주고 받는 게 있는 건데.’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어도 세진의 일을 부탁해 놓은 것에 대해 지우로부터 답이 돌아오지 않자 속으로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예전처럼 편하게 연락을 하지도 못하는 사이가 되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지우가 정말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용하가 물었다.
지우가 세진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지우가 세진을 클랜에 받아주기로 했다는 것은 순전히 자신을 봐서 그런 거라는 걸 용하는 알고 있었다.
세진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사촌 오빠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용하가 대단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던 세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용하가 그야말로 전설적인 영웅처럼 보였다.
“오빠!”
세진이 와락 용하를 껴안았다. 이 녀석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싶기도 했고, 외국에서 자라서 감정 표현이 적극적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게 고맙지는 않았다.
“이제 어지간히 하고 떨어져라.”
걸레를 집는 것처럼 엄지와 검지 두 개만으로 세진의 옷을 잡아서 떼어내자 세진은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제 사촌 오빠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놔두면 사랑한다는 말까지 나올 것 같아서 용하는 치를 떨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는 언제 떠나는 거예요? 짐을 쌀까요? 당장 올라가서 짐을 싸야겠네요. 그렇죠? 아예 다 싸야 되는 거죠?”
세진이 지연과 강현을 번갈아보며 묻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래야 되겠죠? 짐이 많아요?”
지연이 묻자 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캐리어 두 개면 끝나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언니. 저.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편하게 불러요.”
“저는 그러면 올라가서 짐 정리할게요. 정말 감사해요. 절대로 후회하시지 않게 잘 할게요. 오빠. 진짜로 고마워. 정말 별 기대 안 했는데. 오빠가 최고야.”
세진은 꽤나 부산스럽게 굴더니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 용하는 세진이 하는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때를 잘도 맞춰서 톡이 들어온 것이다.
가끔 용하의 집으로 찾아오는 여자였다.
[오빠, 다른 여자가 생긴 거면 확실하게 그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내 친구가 그러는데 오빠가 어떤 어린 여자애랑 집에 같이 들어가는 걸 봤대. 누구야? 다른 여자 생긴 거야? 그러면 확실히 말을 하면 되잖아.]
용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톡을 보낸 여자애의 성격을 용하가 알지만, 그것이 정말 여러 번 편집을 거쳐서 최종본에 이른 것일 거라는 게 확실했다. 수많은 욕설과 폭력적인 언사가 마지막 순간에 삭제되었을 것이다.
[아니야. 오빠 지금 미팅 중인데 금방 오빠가 전화할게. 걔는 내 사촌이고.]
[사촌. 그럴 줄 알았어. 사촌이라고 말할 줄 알았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이라니까? 어떻게 해 줄까? 어떻게 인증해 주면 믿을 건데?]
[됐어. 그 여자랑 오빠가 정말 아무 사이 아니라면 우리가 지금 만나는 거, 아무 문제 없는 거지? 오빠 집으로 가도 돼? 비밀 번호도 바뀌어 있더라?]
[오늘은 안 돼. 그래도 내일부터는 오빠는 완전히 다시 네꺼가 될 거니까 오늘만 참아.]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화내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용하는 일이 잘 해결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설마 그 여자애가 집 밖에서 톡을 보내는 중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연은 물을 마시겠다면서 주방에 가 있었고, 초인종 소리를 듣고 자기가 열어주겠다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냥, 기능적으로, 자기가 가까이에 있으니까 가서 열어준 것 뿐이었다.
그러나 밖에 서 있던 여자가 읽어낸 메시지는 완전히 달랐다. 자기 연락을 씹던 남자의 집에서 웬 여자가 걸어나와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로만 이해되었던 것이다.
“신용하 개새끼 여기에 있어요?”
여자가 소리쳤다.
“아! 네.”
지연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 여자가 상황을 오해하는 것을 바라잡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현이가 여기에서 잘 정착을 하려면 이 여자는 없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둘이. 무슨 사이예요?”
여자가 물었다. 구질구질하게 버티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온 듯했다.
지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지연이 말했다. 신용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아주 조용히.
신용하가 그걸 안다면 자기를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연은 자기가 그 순간에 시현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뭐라고요?”
여자가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순순히 시인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지연이 말하자 여자는 화가 치민 표정으로 쿵쿵거리면서 나가버렸고 신용하는 한발 늦게 현관 앞으로 나왔다. 그렇다고 용하가 크게 아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해했나봐요.”
지연이 말했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헤어질 애였고, 2, 3주 더 만나다 헤어지려고 한 거였는데. 뭐. 잘 된 걸 수도 있어요.”
“여자가 많은가 봐요?”
“서넛은 꾸준히 있어요. 언제 누구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무슨 일이 생긴다니요?”
“갑자기 진짜 애인이 생긴다거나 결혼을 한다거나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간다거나.”
“왜 여자들을 그렇게 많이 만나는 건데요?”
지연이 물었다.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를 맺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무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여러 사람과 인연을 약하게만 이어가고 있는 용하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요. 이런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건 꽤 겁나는 일이잖아요. 세상에 괴수가 출몰하고 그 놈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판국인데. 전에는 아무 때나 지우 집에 가서 노가리를 까면 마음이 편해졌는데 이제는 지우가 떠나버리고 혼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돼서. 그리고 내 사생활에는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맙시다.”
용하가 딱 선을 그었다.
지연은 지금이야말로 얘기를 꺼낼 적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용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