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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아니죠. 아니죠. 0.01초도 아니고 0.03초잖아요. 앞으로 이걸 더 단축시킬 수도 있을 거라고요.”
강현은 0.03초를 단축시킨 것이 어지간히 뿌듯한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지도 않고 잔뜩 뻐기면서 자랑을 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 건물 안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겁니까?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요?”
“다른 사람들은 쉬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대련 상대가 필요하거나 누군가와 같이 훈련을 하고 싶으면 론 디어님을 찾아가라고 말을 들었거든요.”
“누구한테서요?”
“써전님이랑 지우 형요.”
“왜요? 나는 안 쉬어도 된다고 하던가요?”
“수형(受刑)기간이니까 참아야 할 거라고 말하라고 했어요.”
“허!”
“어차피 잠도 안 오는 것 같은 얼굴인데 5급 괴수 하나만 잡고 오죠.”
“오늘은 바디 펌에 출근해야 됩니다.”
그 말에 김강현은 서리맞은 야채처럼 풀이 죽어 어깨부터 축 늘어졌다. 그런다고 마음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익헌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피하지 않았다. 전에는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뻘쭘해하거나 어색해하거나 서로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보면서 지나쳤는데 이제는 제법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자세를 봐달라고 하기도 했다. 역시나 가장 적극적인 것은 김강현이었다.
태인도 이익헌에게 도움을 부탁하기는 했지만 부탁하는 사람 말투가 얼마나 쌀쌀한지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제 말투가 어쨌는지는 알지 못하고 이익헌은 태인이 사납고 매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은 이제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고 이익헌에게 도움을 구하곤 했다. 이태인은 손도끼를 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익헌을 찾아와서 자기는 왜 손도끼를 돌리는 게 안 되는 거냐고 하소연을 했다.
이익헌은 열등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본 적이 없었다. 이해해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레이드를 하다가 팔을 잃었을 때 잠시 그런 감정을 경험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능력없고 열등한 사람들이 게으르고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치부해왔는데 이태인을 보면서 그 마음이 조금씩 변했다. 이태인은 자신의 결함을 극복하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다. 옆에서 보기가 딱할 정도였다.
이익헌은 자기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대단한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 어느 순간에, 그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린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익헌이 의도했던 것은 그들의 기나 팍팍 죽여 놓으면서 실력자로서 그 위에 군림하는 거였는데 그들은 자기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결국 이익헌은 김강현에게 끌려갔고, 두 사람이 차에 타기 직전에 이태인까지 달려와서 합류했다.
“아침에 공략하러 갈 때는 미리 말 해 주세요.”
이태인이 말했다.
“왜요? 말해주면 이라도 닦으려고요? 괴수 잡기에 아주 딱일 것 같은데 왜 그래요? 입에서 썩은 냄새가 끔찍하게 나는데.”
이익헌이 말하자 이태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입에서 똥냄새 풍기면서 할 소리가 아니죠.”
이제는 서로 웬만한 말을 해도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내성이 생긴 것 같았다.
“냄새는 하나도 안 나는구만 두 사람은 서로 보면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예요?”
강현이 말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게 아니라 노예한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는 거다.”
이태인이 말하자 이익헌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지만 당연히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레이드 예정지는 가까운 곳에 있는 5급 늪이었다. 리드를 옮기기 전에 임정에게 말을 해 두면 임정이 나머지 부분은 알아서 처리했다. 세 사람은 착실히 갑옷과 장비들을 챙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5급 늪에서는 이익헌이 따로 탱킹을 하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방어력과 공격력으로 스스로 지키고 살아남으면서 사냥을 최단 기간에 마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갑옷은 필수였다.
늪에 들어가기 전에 브리핑을 한다거나 순서를 정한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대충 눈치를 봐 가면서, 두드러지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늪 아래로 내려가자 청설모 같이 생긴 녀석이 세 사람의 헌터를 바라보았다. 청설모는 자고로 볼따구가 찢어지게 입안 가득 도토리를 물고 있어야 귀엽지, 볼이 날렵한 모양의 청설모에게서는 꽤 살벌한 한기가 느껴졌다.
“캐츠 아이 스톤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면 좋겠다.”
강현이 말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아침 운동 대신 나온 곳에서 그런 걸 주워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익헌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냥 해 본 말이예요. 그냥 해 본 말. 뭘 또 정색을 하고 쳐다보신데!”
그렇게 말을 하고 강현이 네메시스를 제대로 잡고 청설모 괴수에게로 향했다.
전부터 몇 번이나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말을 못했는데, 이익헌은 네메시스보다 조금 더 긴 검이 김강현에게 더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언제 한 번 익스트림 헌터에 데리고 가서 적당한 검이 있는지 같이 보고, 만들어져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주문 제작을 의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헌은 바디 펌에서 하루에도 몇 천 명에서 몇 만 명까지의 사람을 온, 오프 라인을 통해 만나고 상대하는 사람이었다. 요즘은 클랜 A의 노예이자 수형자 신분이어서 바디 펌에 직접 출근을 하지 못해 예전만큼 사람들에 치이는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대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득하게 된 기준이라는 것이 있었다. 보편적인 것이 꼭 진리인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무리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보인다.
집단이 수 만 명이면 그중에는 우등생도 있고 열등생도 있었다. 우등생에게서만 좋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등생들의 습관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도 크다.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이익헌에게 정보로 축적되어 있다가 클랜 A의 클랜원들에게 지적질을 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자. 자. 얼마나 연습했는지 한 번 봅시다.”
이익헌이 말했다.
청설모 형상의 괴수는 싸늘한 눈길로 세 명의 헌터를 노려보았다. 이익헌은 일부러 뒤로 빠져 방관자 모드로 들어갔다.
태인과 강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서서히 발동을 걸고 괴수를 공격했다.
괴수는 날카로운 이와 사나운 발톱으로 몇 번이나 두 사람을 위협했다. 앞다리와 뒷다리로 이어지는 익막을 펴고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도 했다. 날아다니는 괴수는 가장 까다로운 유형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피해야 할 것은 괴수의 이빨과 발톱으로 딱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고 괴수가 움직이는 패턴은 곧 헌터들에게 파악이 되었다. 태인과 강현은 서로가 한 몸을 이룬 것처럼 자연스럽게 레이드를 이어나갔다.
손도끼를 움직이는 태인의 움직임도 전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원래 선호하고 편안해하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더 자주 공격을 가하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불편해 보이는 것은 있었지만 앞으로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그 자세도 숙달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익헌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김강현이 차크라를 모으는데 걸리는 시간이 0.03초 단축된 것 같다고 떠들어대더니 정말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처음 몇 십 분 동안은 단 한 번의 공격 기회도 허투루 날리지 않고 꾸준히 데미지를 입혔다. 이제는 D급 헌터여서 기본 공격력만 해도 600이었다. 차크라와 무기의 지원을 받은 공격력은 2천을 육박했다. 두 사람이 한 번씩 공격을 성공시킬 때마다 괴수의 체력이 거의 4천씩 까여나갔고 1분이면 거의 6만이었다. 다른 헌터들의 경우에는 초반에서 조금 지나면 그때부터 공격 기회를 잃는 경우가 많았지만 태인과 강현은 초반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런 식이라면 두 사람에게만 맡겨도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익헌이 레이드를 마치고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하려면 조금 더 서두를 필요가 있기는 했다. 드디어 이익헌이 론 디어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태인과 강현은 이익헌의 등장을 반겼다.
이익헌의 공격은 오답 노트와도 같았다. 어떤 때는 일부러 자신의 무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 사람의 무기로 정석에 가까운 공격을 펼쳐 보였다. 그럴 때마다 강현과 태인은 자신들의 공격에서 어떤 움직임이 군더더기였고 어떤 식으로 바꾸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다는 것을 깨달아가게 되었다.
서로 대화라고는 한 마디도 없었지만 그런 학습이 두 사람의 D급 헌터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이익헌은 의기양양하게 태인의 손도끼를 손 안에서 연달아 회전시키고 태인에게 손도끼를 건네주었다.
“빨리들 하고 나와요. 오늘은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미팅만 하고 일찍 올 거니까 점심 먹고 3급 늪 한 번 갑시다.”
3차 가자고 조르는 부장처럼 이익헌이 재빨리 약속을 잡아버렸다. 그렇게 말을 하는 이익헌을 보면서 정보창을 확인하자 괴수의 체력은 이제 이 만이 남아 있었다.
이익헌이 떠난 자리에서 괴수를 소멸시키고 태인과 강현은 러프 스톤을 챙겨나갔다. 두 사람의 헌터 타투에서 나란히 숫자가 변했다. 5씩의 경험치가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다.
“오늘도 캐츠 아이 스톤은 없었어요.”
늪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익헌에게 강현이 말하자 이익헌은 표정만 봐도 이미 알겠다고 말을 하고서 부지런히 차를 출발시켰다.
***
바디 펌의 회의실에 왜 자기들이 앉아 있어야 하는지, 지우와 천기정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이익헌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는 바디 펌의 부사장이고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인데 일무리의 깡패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일무리의 깡패라는 것이 클랜 A의 클랜원들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지우와 천기정은 어차피 다 알아들었다.
이익헌은 자기가 파이널을 몸에 달고 있고, 그것은 자기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자기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바디 펌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숙지하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왜 자기들이어야 하는 거냐고 천기정과 지우가 묻자 천기정에게는, 당신이 그 깡패 무리의 자산관리사니까! 라고 했고 지우에게는, 당신은 한 번도 내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라고 했다.
표면적으로 그가 밝힌 이유는 그 두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서 끌고 나온 거라는 건데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목적이 달성된 것 같기도 했다.
전무 하나가 이익헌에게 물었다.
“본 적 없는 두 분이 갑자기 와서 앉아 있는데 소개는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사장님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다가 갑자기 나타나셨으니까 부사장님 뵙는 것도 낯선데. 웬만큼 사교성 없는 사람들은 회의에 적응하기도 벅차겠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이익헌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알게 해 주는 말투였다.
“적응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내일부터는 바디 펌에서 볼 일이 없을 분들이니까요.”
이익헌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