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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91화 (9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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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뭘 가져갈 수 있어요? 제법 필요한 게 많은데. 연구실도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요? 거창할 필요는 없고 그냥 좁은 공간이라도 괜찮은데. 나. 이제 인질이 되는 건가?”

강지연은 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여기에 있는 건 전부 다 가져가도 되니까. 원한다면 지금처럼 사회 생활을 계속 영위할 수도 있을 거다. 또다른 파이널도 지금까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럭저럭 병행을 하고 있으니까.”

서규태의 말을 들으면서도 강지연은 조금도 위안을 받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는 건지. 강지연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으로 땅이 파일 것 같았다.

임정은 혼자서 지우에게 돌아갔다. 서규태는 임정을 데려다 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반대말이 증거라고 하지만 클랜 A에게 믿음의 반대말은 파이널이었다. 자기를 믿어달라고 백 번 말을 하는 것보다는 순순히 제 몸에 파이널을 이식받는 게 자신의 의지를 확인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강지연이 다시 서규태의 앞에 섰을 때 강지연은 자신이 더 이상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를 터뜨려버릴 수 있는 스위치를 다른 사람이 언제든지 누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정신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 사실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적응에는, 도무지 한계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입이 간질거리면 생각해. 당신 몸 안에 들어있는 파이널에 대해서.”

서규태가 말했다.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불쾌한 표정으로 강지연이 대답했다. 그렇게 또 한 마리의 새가 클랜 A라는 새장에 갇혔다.

***

지우는 문 앞에서 임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나와 있어요?”

지우를 발견하고 임정이 묻자 지우가 임정을 향해 마주 걸어왔다.

“피곤하지는 않고?”

“괜찮아요.”

“콩알도 괜찮고?”

“괜찮대요.”

“다행이네. 아빠한테 화 난 건 아니래?”

“화났대요. 아빠가 놀아주지도 않고 잠만 잔다고.”

“미안해서 어쩌지? 아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버렸어.”

지우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임정은 자기가 지우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건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 괴수일 리가 없지 않은가.

“잘 했어요. 그렇게 쉬어야 피로가 풀리죠.”

지우가 임정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임정의 몸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긴 채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써전님이랑은 무슨 얘길 했는데?”

“치안대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어서 써전님 도움이 필요했어요.”

“어떤 건데?”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요. 괴수가 늪을 나가면 그 늪을 공격하는 걸로 괴수를 죽일 수 있다는 거 알아요?”

“정말?”

“늪 아래의 공간이 밀폐 공간이라는 것도 몰랐죠?”

“밀폐 공간이라고?”

“거기에 네이팜탄을 투하해서 산소가 전소될 때까지 태우면 괴수가 질식해서 죽는대요. 밖으로 나간 괴수가 여전히 늪 아래의 공간이랑 연결돼 있는 거예요. 태아처럼요.”

“그래?”

임정은 지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정했다. 지우도 그 일을 같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람은 괴수가 아니다. 괴수의 차크라를 흡수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은 절대로 괴수가 아니다. 그건 이 사람이랑 같이 사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다.’

임정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지우는 임정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네.”

“네. 할 말 있어요. 지우씨의 늪. 그리고 지우씨와 지우씨의 차크라에 대해서요.”

“아주. 긴 얘기가 될 것 같군.”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이야기는 두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소파에 앉은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지우는 남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어 하면서 얘기를 들었다. 가끔, ‘정말?’ 이라면서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듣는 말을 제대로 믿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임정은 지우에게, 늪이 나타날 즈음 이상한 건 없었는지 물었다.

“그러게. 그때는 머리가 자주 아팠던 것 같고. 신용하가 필요하겠다. 신용하가. 용하는 기억을 해 줄지 몰라. 나는 그때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일을 하느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고. 용하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집안 청소도 해 주고 밥도 해 놓고 가고 반찬도 갖다주고 그랬는데. 내가 정수기 앞으로 가지 못하니까 그걸 옮겨준 것도 용하였고. 그래. 맞아. 그랬었어. 정수기 앞으로 가질 못했어. 머리가 아파서. 그랬던 것 같아.”

“그때 괴수가 밖으로 나돌아다녔던 걸까요?”

“그렇다면 이상하잖아. 왜 나를 가만뒀겠어? 자기도 동영상을 봤잖아. 미국에서 출몰한 1급 괴수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동영상. 어떤 괴수가 거실에 나와서 산책하듯이 어슬렁거리기만 하다가 자기 늪으로 돌아가겠어?”

지우는 거대한 차크라 결정체가 지우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한 가지를 생각했다. 소진되지 않는 지우의 차크라는 그것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괴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지우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되는 것 아니예요? 지우씨는 괴수예요?”

임정이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괴수였다면 내가 이런 헌터 타투를 가지고 있겠어? 내가 괴수였다면 헌터 타투가 생기지도 않았겠지. 괴수한테 왜 헌터 타투가 생기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아아. 나는 왜 평범한 남자를 만나지 못한 걸까?”

“콩알은……. 괜찮은 거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내 말은…….”

“괜찮을 거예요.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병원에 가 볼까? 병원에 가 보긴 해야 하잖아. 임신을 하면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겠죠.”

하지만 임정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강지연의 집에서 봤던 붉은 차크라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태아에게서도 차크라가 보이는 게 정상인 건지, 나중에 강지연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이만 붉은 차크라에 휩싸여 있었는가 하는 것도.

병원에 가서 아이가 이상하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아기를 뺏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지우와 강제로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임정은 불안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일 없이 괜찮다가도, 조금 전까지 같이 웃다가도 일단 불안한 마음이 한 번 들면 자기도 어떻게 손을 써 볼 사이가 없이 우울하고 두려웠다.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임정이 절대로 경험해 볼 수 없었을 감정이었다.

“지우씨.”

“응?”

“우리는 절대 안 헤어지죠?”

“당연하지. 왜 그런 말을 해? 우리는 안 헤어져. 너하고 콩알은 내가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뭘 해서라도.”

지우가 말했다.

처음에는 임정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가 그는 이내 임정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우는 소파에서 내려가 임정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임정을 바라보았다. 임정의 얼굴이 그날따라 파리해보였다.

“당신. 아이 때문에 힘들어?”

“아뇨.”

임정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이도 들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말은 일부러라도 감추는 편이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임정은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축복으로 믿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지우가 임정의 손을 붙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당신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 나를 바라봐줬어.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좋아해줬고 무턱대고 믿어줬고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껴지게 해 줬어. 내가 오해한 게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기뻐해줬고.”

임정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오해 아니예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걸요?”

“그래도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불안해하지도 말고.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당신이랑 우리 아이. 건들지 못하게 할 거니까.”

“만약에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런 세상은 내가 부술 거야. 걱정하지마. 당신 옆에 내가 있으니까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자. 자도 돼. 당신이 만난 남자는 그런 남자니까. 우연히 발에 걸린 줄 알겠지만 사실은 세상에서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일 걸?”

지우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웃었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지우는 임정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한 번도 당신한테 거짓말 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더군다나 이 말은 콩알도 다 들었잖아. 콩알 앞에서 한 말이 거짓말이 되게 하진 않을 거야.”

임정은 그의 말을 믿었다. 내일 다시 해가 떠오를 거라는 사실보다 더 강하게, 그의 말을 믿었다. 그가 그의 말을 지킬 사람이라고 임정은 믿었다.

아니. 강지연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었다.

***

김강현이 이익헌을 보고 그를 향해 달려왔다. 얼굴에 웃음까지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이렇게 마주친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이익헌은 먼저 방향을 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토끼같이 쌩하니 달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목표가 자기로 정해진 것 같아서 이익헌은 마음이 불편했다.

이익헌을 아는 사람들 중 누구도 이익헌이 정해 놓은 경계선을 그렇게 함부로 넘어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익헌이 착한 인간 코스프레를 하고 친절하게 굴고 웃음을 지을 때라고 해도 사람들은 이익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김강현은 수시로 그 선을 넘어왔고, 돌아갈 때도 아주 돌아가지는 않고 그 경계에 세워진 목책에 걸터앉아 이익헌을 구경하는 포지션을 취했다. 한마디로 이익헌은 자기가 원치않게 김강현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하지 않은 팬을 얻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은 이익헌에게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팬을 반납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가서 반납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꽃같은 웃음을 날리면서 달려오는 저 철부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외면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현은 엄마 젖을 발견한 소 새끼처럼 신나게 달려들었다.

“론 디어님!”

“아, 또 뭡니까! 아침부터 귀찮게. 그리고 론 디어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는 바디 펌 부사장이니까 차라리 그냥 부사장이라고 부르든지 이태인씨처럼 노예라고 부르든지. 론 디어님이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이것저것 다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라 이익헌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노예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강현은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뭡니까? 왜 부르는 거예요?”

“저요. 차크라를 모으는 시간을 단축시킨 것 같아요.”

“그래요? 얼마나요?”

“0.03초요.”

“그걸 알아챘다는 게 더 용하네요.”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것을 알아내야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절박한 사정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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